산업재해보상보험법의 본질은 노동으로 인한 위험을 사회가 분담하자는 것이다. 2009년 제주의료원 간호사 4명은 선천성 심장질환을 가진 아이를 출산하고 산재신청을 했다. 임신 초기 유해물질에 노출되었다는 점이 명백했다. 그들이 제주의료원의 간호사로 일하지 않았다면 이런 불행한 사태가 발생하지 않았으리라는 것도 분명했다. 그러나 2심 법원은 수급권자인 노동자 본인의 질병이 아니므로 산재가 아니라고 판단했다. 일터에서의 위험이 고스란히 노동자 개인에게 전가된 사태다. 지난 4월29일 대법원은 원심을 뒤집고 ‘임신한 노동자의 업무로 인해 태아의 건강이 손상되었다면 업무상 재해에 해당한다’고 판단했다. 이미 산재가 발생한 상황에서 출산으로 분리된 아이가 노동자가 아니라는 이유로 산재보험 수급자격을 부정해버리면, 헌법의 생존권적 기본권, 국가의 모성보호 의무, 산재보험법의 취지가 제대로 작동할 수 없다고 봤다. 법의 기술보다 법의 본질을 우선한 판단이다.
본질을 살피지 못하면 법은 제구실을 못하는 반쪽짜리 법으로 전락한다. 산업안전보건법의 본질은 위험을 생산하는 사람이 그 위험에 노출되는 사람들에 대해서 책임을 져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반복되는 안전사고에서 보듯 법이 제대로 작동하지 못하고 있다. 최근 노동자 38명이 사망한 이천 물류창고 화재 사고는, 2008년 40명이 사망한 이천 물류창고 화재와 닮았다. 당시에도 다단계 하도급 구조 속 안전시설과 관리감독 미비가 사고의 근본 원인으로 거론되었지만, 이런 구조적 문제는 해결되지 않았다.
왜 그럴까? 이는 우리 사회가 ‘죽음’을 다루어온 방식과 관련된다. 산업안전보건법은 ‘직접고용’을 기본으로 제정되어 있다. 기업은 위험 업무를 외주화하는 방법으로 손쉽게 책임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최근에는 관련 법률이 원청 책임을 강화하는 쪽으로 개정되기도 했다. 그러나 원청이 의무적으로 시행해야 하는 안전조치의 범위가 너무 좁다. 위험 창출자인 사용자가 (직접)고용 여부와 별도로 “(해당) 위험에 영향을 받는 모든 사람”에 대해 책임져야 하는 영국과는 대조되는 대목이다.
기업의 대표이사가 처벌된 사례는 거의 없다
기업의 책임이 향하는 방향도 문제다. 우리 사회에서 재해 사고가 발생하면 대개 현장소장, 공장장 등 일선의 하급직 담당자나 중간관리자를 처벌하고 교체하는 수준에서 수습이 마무리된다. 실무관행상 중소 규모 기업을 제외하고는 대기업의 대표이사가 처벌된 사례는 거의 없다. 복합적 관리체계가 작동할수록 구체적·직접적 조치의무가 인정되기 어렵다. 그 결과 ‘개인의 행위’가 아닌 ‘경영진의 경영 판단’에서 비롯되는 구조적·복합적 원인, 매번 사고의 배경으로 지목되는 기업의 안전문화와 관행, 안전보다 속도를 중시한 결정은 제대로 평가되지 않았고 그에 대한 책임도 부과되지 않았다. 중요한 의사결정을 하는 기업의 경영진들은 중대 재해의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웠고, 이런 구조적 요인에 대해 기업과 경영진의 책임을 묻는 법안은 최우선 과제로 논의되지 못하고 있다.
‘위험은 외부로, 책임은 아래로’와 같은 지금의 체계에서는 위험을 생산하는 사람이 그 위험에 노출되는 사람들에 대해 책임을 져야 한다는 원리를 온전히 구현하기 어렵다. 해외 사례처럼, 원·하청, 특수고용을 불문하고 ‘위험에 영향을 받는 모든 노동자’가 보호되어야 한다. 기업 내에서 실질적인 의사결정을 할 수 있는 권한과 책임이 있는 자에게, 실제로도 징벌이 될 수 있는 형벌이 부과되어야 한다. 2017년 고 노회찬 의원이 발의한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은 5월 말 제20대 국회 회기 만료로 폐기될 예정이다. 억울한 죽음이 반복되지 않도록, 법의 본질을 온전히 되살리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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