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9월, 캐나다 토론토에서 7학년(중 1)에 다니는 딸아이가 인터넷을 보다가 갑자기 환호했다. “아빠! 아빠! 아빠! 슈퍼주니어 뉴욕 온대!” 어떤 게 좋은 아빠 노릇인가를 생각하는 데 몇 초도 걸리지 않았다. 막는다고 될 일이 아니라면 선수를 치는 게 ‘남는 장사’다. “언제? 표 빨리 알아봐! 매진되기 전에….” 

토론토에 살러 올 때 두 살이던 딸아이는, 영어는 유창하고 한국말은 어눌하다. 한국 문화는 낯설고 북미 문화는 익숙한데, 특이한 예외가 하나 있다. 대중음악이다. 팝은 관심 밖에 있다. 관심사는 오로지 케이팝(K-pop)이다. 걸 그룹으로는 투애니원(2NE1), 보이 그룹은 슈퍼주니어를 최고로 친다(덕분에 나도 슈퍼주니어 원 멤버 13명 이름을 다 외운다).  

 

ⓒSM엔터테이먼트 제공

 

 


10월23일(일) 새벽, 티켓 2장(1장에 200달러)을 손에 들고 뉴욕으로 향했다. 850㎞를 달려 맨해튼에 도착한 시각은 오후 3시께. SM타운의 공연이 열리는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두 블록 떨어진 K타운부터 들렀다. 브로드웨이 코너에서 펼쳐지는 플래시 몹이 눈에 들어왔다. 팬 20여 명이 슈퍼주니어·샤이니 등의 노래에 맞춰 일사불란하게 춤을 춘다. 두 외국 소녀가 태극기를 들고 뒤에 서 있다. 매디슨 스퀘어 가든 앞은 분위기가 훨씬 더 뜨거웠다. 100m쯤 길게 늘어진 줄이 보였다. 공연할 때 사용할 소도구와 브로마이드 같은 기념품을 사기 위한 줄이었다. 

팬들의 자지러지는 소리도 여기저기서 터진다. ‘슈주 사랑해요!’라는 플래카드를 들고 다니며 환호를 유도하는가 하면, 신문·방송 카메라 앞에서 길거리 공연을 펼치는 팬도 많다. 카메라맨들이 “쏘리 쏘리” “런 런” 하고 주문하면 노래와 춤은 자동판매기처럼 튀어나온다. 한국인을 포함한 동양인은 10% 정도밖에 보이지 않는다.  

매디슨 스퀘어 가든. 안으로 들어서자 위용이 대단하다. 뉴욕 닉스(NBA), 뉴욕 레인저스(NHL)가 홈 코트로 사용하는 체육시설인 동시에 팝 스타들이 공연장으로 쓰는 다목적 홀이다. 이 무대에 서는 것만으로도 전 세계를 향해 유명세를 과시할 수 있는, 가수에게는 꿈의 무대이다. 2011년 10월23일 오후 7시. 케이팝이 이 무대에 올랐다. 

에프엑스가 ‘라차타’를 부르며 〈SM타운 라이브 월드투어 인 뉴욕〉의 막을 올리자 1만5000여 객석은 순식간에 달아올랐다.  


‘종합선물세트’ 같은 화려한 공연

많은 팬이 북미 각지에서 모여들었다. “어디서 왔느냐”라며 서로를 궁금해했다. 보스턴에서 온 타이완 출신 유학생도 만났고 버지니아에 산다는 백인 여학생도 보았다. 10시간 거리의 토론토는 먼 곳이 아니었다. 17~19세 백인 여학생 3명은 일리노이 주 스프링필드에서 꼬박 24시간 버스를 탔다고 했다. 15시간이 걸리는 조지아 주 애틀랜타에서 온 소녀도 있었다. 하루 이틀 학교까지 빠지며 ‘죽어라 하고’ 달려온 만큼, 그들은 ‘죽자 하고’ 즐겼다. 

뒷자리에 앉은 여학생 둘이 퍽 인상적이었다. 이슬람 전통 복장인 검은색 히잡으로 몸과 얼굴을 가린 채 두 눈만 내놓은 두 소녀는 “오빠, 사랑해요”를 목이 터지도록 외쳐댔다. 

SM타운의 가수들은 팬들의 가슴을 터지게 만들 만큼 훌륭한 공연을 선사했다. 슈퍼주니어, 소녀시대, 샤이니, 에프엑스에 이어 관록의 가수 보아와 강타가 번갈아 등장해 공연장을 달구었다. 폭죽이 터지고, 가수들이 무대 위로 솟아오르고, 5명이 한꺼번에 공중으로 오르는 등 무대 장치는 화려하고 정교했다. 각 팀이 번갈아 나와 히트곡과 신곡을 부르고, 나올 때마다 의상을 갈아입는 성의를 보이기도 했다. 공연 사이 사이에 보여주는 SM 및 한류 광고도 훌륭했다.  

열기가 조금 식는 기미만 보이면 예상치 못한 이벤트가 등장했다. 강타와 설리가 듀엣으로 노래하고, 춤꾼들만 따로 뽑아(루나·윤아·유리·효연·수영·은혁·민호·태민) 댄스 브레이크를 가지는 등 팬 서비스도 풍성했다. 3시간쯤 지나 분위기가 가라앉을 무렵 동방신기가 처음 등장해 열광의 도가니를 4시간 넘게 이어갔다. 공연은 훌륭했고, 북미 팬은 열광했다. 

세계 문화예술의 메카인 뉴욕, 가수 보아의 표현에 따르면 “2009년 미국에 진출하면서 이 무대에 오르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던” 매디슨 스퀘어 가든에서 공연했다는 것은 한류가 세계 대중문화의 주류와 접속했다는 신호탄이다.  

 

 

 

 

 

ⓒ뉴시스뉴욕 타임스 스퀘어의 MTV 전광판에 등장한 소녀시대의 모습을 보고 케이팝 팬들이 환호하고 있다.

 


본격적인 첫 무대인 만큼 이런저런 한계를 보이기도 했다. 먼저, SM 소속 가수들을 모두 동원한 종합선물세트로서의 단점이다. 먹을 것은 많으나 바로 그것 때문에 모두가 스타인 각 팀의 개성이 극대화되지 못했다. 특히 보아는, 소모되는 것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까워 보였다. 보아는 여럿 가운데 하나로 끼워 넣을 그릇이 아니었다. 무대를 압도하는 카리스마는 여전했으나 화려한 군무를 자랑하는 그룹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빛을 잃었다. 

다음은, 반주음악(MR)의 한계로 인한 아쉬움이다. 가수들은 모두 MR에 맞추어 열심히 노래했으나 매디슨 스퀘어 가든이 지닌 공연장으로서의 장점을 살려내지 못했다. 라이브에 능숙한 보아마저도 MR로 노래하게 한 것이 못내 아쉬운 부분이다.  

이런저런 아쉬움에도 불구하고, 케이팝은 SM군단을 앞세워 뉴욕 진입에 일단 성공했다. 구미 팝에서는 찾기 어려운 강점, 곧 △그룹들의 화려한 군무와 다양한 캐릭터 △밝고 경쾌한 음악 △술·파티·마약이 등장하지 않는 밝은 내용 등으로 북미 지역 10대마저 사로잡았다. 

뉴욕 거리에 포스터 한 장 붙이지 않고도, 신문에 광고 한번 내지 않고도 티켓을 삽시간에 매진시키는 케이팝은 앞서간 제이팝(J-pop)과 달리 온라인 시대의 혜택을 100% 누리고 있다. 시대를 타고난 것이다. 진검승부의 장에 본격 첫발을 뗀 종합선물세트의 선물이 어떤 전략적 개성을 가지고 각개전투에 나설 것인가 하는 데 케이팝의 미래가 달려 있다.

 

 

 

 

기자명 토론토·성우제 편집위원 다른기사 보기 sungwooje@gmail.com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