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호 변호사’라 불리는 박주민 의원. ⓒ시사IN 조남진
‘세월호 변호사’라 불리는 박주민 의원. ⓒ시사IN 조남진

세월호 참사 당시 박주민 의원(51)은 민변(민주사회를 위한 변호사모임) 소속 변호사였다. 참사 이후 그는 ‘세월호 변호사’로 불렸다. 세월호 참사가 발생한 직후 청와대 인근 청운효자동 주민센터 앞에서 집회신고를 직접 내고 촛불을 든 것이 세월호와 함께한 인연의 시작이다. 20대 총선에서 서울 은평갑 지역구에 출마했을 때 세월호 가족들이 찾아와 선거운동을 도왔을 만큼 세월호 가족들과 유대가 강하다.

“처음에는 대한변협(대한변호사협회) 차원에서 지원팀이 꾸려졌어요. 대한변협 변호사 중에 민변에도 적을 두고 계신 분이 계셨는데 ‘두세 명이서 감당이 안 된다’라며 도와달라고 했어요. 민변 상근 변호사여서 곤란해했는데, 이후에 민변 차원에서도 뭔가 역할을 해야 한다는 결정이 났어요. 저는 주로 안산에 가 있었어요.

처음 안산에 갔더니 가족분들이 너무 격앙되어 있고, 화가 나 있었어요. 이상한 상황이 계속 벌어지다 보니 가족들이 외부인을 무척 경계했어요. 그래서 가족분들 식사할 때 짜장면·짬뽕 그릇 비닐 까서 놓고 숟가락도 놔드리고. 옆에 서 있다가 다 드시면 또 치우고, 의자 세팅하고, 식탁도 치우고…. 제가 변호사인 것도 한참 동안 몰랐다고 해요. KBS 방문하려고 상경할 때(5월8일 KBS 막말보도 항의 방문) 경찰차가 가족들 보호한답시고 앞뒤로 붙어서 속도를 못 내게 하더라고요. 그래서 버스를 세우고 뛰어 내려가서 경찰차 두드리면서 뭐 하는 짓이냐고 막 고함지르고 하니까 ‘쟤 뭐 하는 애지?’ 하시면서 진짜 우리 편인가 보다 생각하신 것 같아요. 그 덕분에 가족분들하고 많이 가까워지고 신뢰를 좀 받게 됐죠.

교황 온다고 했을 때 어떻게든 교황과 손을 잡기 위해 100여 명이 세종문화회관 지하에서 비닐을 깔고 밤을 새웠어요. 그때 가족 한 분이 ‘이런 일을 겪고 나니까 사회가 어떻게 돌아가고, 어떤 문제가 있는지 이제야 알겠다’고 말하면서 ‘근데 1년이라도 먼저 알았으면 사회가 이렇게 가지 못하도록 애를 썼을 테고, 그런 작은 노력들이 조금 더 모였다면 세월호 참사는 안 일어났을 수도 있었다. 너무 후회된다’고 얘기하시더라고요. 유가족 중에 그렇게 얘기하시는 분이 정말 많았어요. 그 모습을 보면서 세월호 참사라는 굉장히 큰 아픔을 통해 유가족뿐만 아니라 우리 사회 구성원 모두가 생명의 소중함과 국가의 역할에 대해 함께 공부했던 것 같아요.

사참위법(사회적참사 진상규명특별법)을 굉장히 힘들게 만들었는데, 통과시키기 위해서 법이 너무 약해져서 아쉬웠어요. 또 정부와 공공기관들이 조직적으로 방어를 하다 보니 자료 제공 같은 협조가 잘 안 됐죠. 사참위 위원을 좋은 분들로 많이 모시려 했는데 하겠다는 분이 많지 않았고, 설득하는 과정도 힘들었어요. 그렇다고 사참위가 밝혀낸 게 없다고는 생각하지 않아요. 꽤 많이 밝혀냈다고 생각하는데, 국방부와 국정원 자료, 대통령기록물 등을 완벽하게 본 것은 아니어서 아쉽죠.

가족분들은 생명안전기본법 같은 안전 관련된 기본법을 만들어야 한다고 많이 말하세요. 무슨 일 터지고 나서 그 일에 대한 특별법을 만들 게 아니라 평상시 안전 태세를 사전에 점검하고 안전과 관련해 미비한 것들을 바로잡아나갈 수 있고, 또 일이 터지면 자동으로 객관적이고 중립적인 진상규명위원회 같은 조사기구가 출범하도록 시스템적 법체계가 갖춰졌으면 좋겠다는 말씀을 굉장히 많이 하세요. 사회적 시스템으로 안착이 돼 있도록 하는 거죠. 기회가 된다면 그런 법을 꼭 만들어보고 싶습니다.”

국회 의원회관 박주민 의원실 앞에 붙어 있는 세월호 명패. ⓒ시사IN 조남진
국회 의원회관 박주민 의원실 앞에 붙어 있는 세월호 명패. ⓒ시사IN 조남진

 

기자명 조남진 기자 다른기사 보기 chanmoo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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