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년 11월8일, 독일 라이프치히 대학병원 중환자실에서 의료진이 환자들을 돌보고 있다.ⓒAP Photo

지난 1월 독일 연방 보건장관인 카를 라우터바흐는 독일 일간지 〈빌트〉와의 인터뷰에서 의료 개혁과 의대 정원 확대 필요성을 강조했다. 그는 주정부가 의대 정원을 신속히 늘리지 않는다면, 은퇴 연령에 들어선 베이비부머 세대의 건강을 돌보는 데 큰 문제를 겪을 것이라는 경고의 목소리를 냈다. 독일에서는 1950년대 중반부터 1960년대 중반까지 출생한 사람을 베이비부머 세대라고 한다. 라우터바흐 장관은 노인 인구가 증가할 뿐만 아니라, 향후 몇 년간 베이비부머 세대 의사들이 대거 은퇴할 예정이기 때문에 의대 입학정원이 5000명가량 증가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현재 추진 중인 의료 개혁 또한 의사가 부족하다면 의미가 없어진다며 의대 입학정원 확대에 힘을 실었다. 독일 연방정부의 자료에 따르면, 현재 독일 의대 입학정원은 약 1만1600명이다.

의대 정원을 늘리라는 요구는 갑작스러운 것이 아니다. 오래전부터 여러 의사 단체와 정치권이 정원 확대를 요구해왔다. 2020년 당시 여당이던 기민당·기사당(CDU·CSU) 연방의원들은 합의를 통해 지방의회에 의대 정원 확대를 요구하기도 했다. 하지만 교육과정을 결정하는 권한을 가진 주정부는 의대 정원을 늘리는 데 소극적이었다. 재정 부담이 크기 때문이다. 독일 통계청에 따르면, 의사 한 명을 교육하는 데 드는 비용은 2022년 기준 평균 26만6000유로(약 3억7000만원)다.

독일 의협, 의대 정원 6000명 확대 요구

독일 최대 의사 노동조합인 ‘마부르크 분트’는 지금까지 의대 정원 증가 속도로는 시간과의 싸움에서 이길 수 없다며 주정부가 의대 정원 증가를 위해 당장 움직일 것을 촉구했다. 독일 의사협의회 또한 지난해 5월 총회의에서 의대 입학정원을 6000명 더 늘리고 이를 위해 연방정부가 주정부에 재정지원을 할 것을 요청했다.

2020년 기준 독일의 인구 1000명당 의사 수는 4.5명으로 OECD 국가 중 일곱 번째로 높았다. 같은 통계에서 한국은 2.5명으로 하위권에 속해 있다. 독일의 의사 수는 꾸준히 증가해왔다. 하지만 의사의 노동시간은 지속적으로 줄어들고 있어 필요한 의사 수는 더욱 많아졌다. 의사 노동시간이 줄어든 주요 원인 중 하나로 젊은 의사들이 이전 세대처럼 장시간 노동을 원하지 않는다는 점이 꼽힌다. 개원의가 아니라 일반 병원에서 일하는 의사는 추가 노동시간이 길기 때문에 풀타임 노동을 할 경우 정규 노동시간보다 훨씬 더 많은 일을 해야 한다. 하지만 젊은 의사들은 자신의 일상이나 가족과 시간을 보내기 위해 풀타임이 아닌 50~70% 노동시간만을 계약하는 경우가 많다. 마부르크 분트(의사 노조)의 자료에 따르면, 2013년에는 15%였던 파트타임 의사 수가 2023년에는 31%까지 증가했다.

여성 의사가 늘며 이런 경향이 강화되었다. 의사협의회에 따르면, 1991년부터 2021년까지 여성 의사 비율은 34%에서 50%로 증가했다. 2022년 기준 의대 입학 신입생의 3분의 2가 여성이기 때문에 여성 의사의 비율은 앞으로도 증가하리라 예측된다. 여성 의사들은 출산과 육아를 위해 휴직하는 경우가 많고, 그 후에도 풀타임이 아닌 파트타임으로 일하는 경우가 많다. 여기에 젊은 남성 의사 또한 육아나 가족과의 생활을 위해 휴직을 하거나 노동시간을 줄이는 경우가 늘고 있다.

그런데 의사들 입장에서는 의사 수가 늘어나면 임금이나 수입이 줄어들 것이 걱정스럽지 않을까? 독일 대학병원이나 지역 공공병원 의사들은 단체협약을 통해 연차와 직급에 따라 정해진 월급을 동일하게 받는다. 자신의 클리닉을 운영하는 개원의도 공보험(건강보험) 환자를 받는 경우 수입을 늘리는 데는 한계가 있다. 독일 건강공보험협회(Kassenärztliche Vereinigung)는 진료 과목이나 기존 환자 등을 기준으로 개업의가 다룰 수 있는 최대 진료 횟수를 정하고, 그 횟수를 넘어선 진료에 대해서는 실제 비용보다 더 적게 보험비를 지급한다. 의사가 수익을 위해 너무 많은 환자를 받아 의료의 질이 떨어지는 것을 막기 위해서다. 독일의 경우 2021년 기준 인구 중 88.1%가 공보험에 가입되어 있으며, 건강공보험협회에 가입되어 있지 않은 개인병원은 공보험 환자를 받을 수 없다. 이런 제도적 장치 때문인지 수입을 근거로 의대 정원 확대를 반대하거나 찬성하는 목소리는 찾아보기 어렵다.

2023년 3월17일 독일 작센주 대학병원에서 의대생과 간호사들이 소생술 교육을 받고 있다.ⓒDPA
2023년 3월17일 독일 작센주 대학병원에서 의대생과 간호사들이 소생술 교육을 받고 있다.ⓒDPA

의대 정원 확대에 회의적인 의견이 없는 것은 아니다. 다만 반대쪽에서 우려하는 바는 의대 정원을 갑자기 늘리면 교육의 질이 저하될 수 있다는 점이다. 지난 1월 독일 의대협의회는 2010년 대비 현재 의대 입학정원은 이미 23% 증가했다며, 중요한 것은 고령화 시대와 디지털 사회에 맞는 교육을 실시하고 의사를 적재적소에 배치하는 일이지 의대 정원 확대는 대안이 될 수 없다고 지적했다. 의대협의회는 의대 정원을 갑자기 늘리는 것은 교육의 질을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을 수 있다고 경고했다. 독일 ‘의사신문’ 보도에 따르면, 의대 학생들 사이에서도 의대 정원 확대만이 목표가 되면 교육의 질 저하로 이어질 수 있다는 우려가 나온다.

포괄수가제로 인해 의사의 노동강도가 높아진 것도 의사 부족 문제의 또 다른 원인으로 지적된다. 2004년부터 독일은 병원에 입원한 환자에게 포괄수가제를 적용하고 있다. 포괄수가제는 개별 환자에게 들어가는 실제 비용과 상관없이 질병 진단에 따라 정해진 비용이 일괄 지급되는 제도다. 포괄수가제 이전까지 병원은 환자의 입원 일수에 따라 의료보험에서 진료비를 지급받았다. 하지만 포괄수가제가 도입되면서 입원 기간과 관계없이 환자 한 명당 받을 수 있는 진료비가 고정되자, 병원은 환자의 입원 일수를 줄여 병상 회전율을 높이고 더 많은 환자를 빠른 시간 내에 치료하는 식으로 수익성을 높이게 되었다. 의사들의 노동조건은 나빠졌고 이는 다시 의사들이 노동시간을 줄이고 휴식을 늘리는 원인이 되었다.

2021년 라디오 방송 ‘도이칠란트풍크’의 보도에 따르면, 포괄수가제 도입으로 환자 한 명당 평균 입원일이 10일에서 7일로 줄어들었다. 또한 포괄수가제로 인해 병원들이 수가가 높은 수술 등 진단을 과도하게 한다는 지적도 있다. 2021년 독일 통계청 집계에 따르면 12년 동안 무릎관절 수술 건수는 50% 증가했다.

포괄수가제는 인구밀도가 낮아 환자가 많지 않은 농촌지역에 특히 악영향을 미쳤다. 농촌지역의 병원 역시 인력과 시설을 유지하기 위해 대도시 병원과 같은 수준의 운영비가 필요하지만, 진료 건수가 적기 때문에 수입이 줄어 재정 문제를 겪게 되었고 결국 파산하는 경우도 생겨났다. 지역 병원이 대거 문을 닫으면 응급환자가 의료적 처치를 제때 받지 못하게 되어 큰 사회적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기존 의료 인력도 지역을 떠나기 때문에 지역의 의사가 부족한 상황은 점점 더 심각해진다.

“이대로 가면 병원 25% 사라질 것”

카를 라우터바흐 보건장관은 포괄수가제를 개혁해 지방 병원을 유지하면서도 효율적인 병원 시스템을 통해 의료 비용이 과도하게 증가하지 않도록 하는 개혁을 추진하고 있다. 라우터바흐 장관은 의료시스템에 경제 논리가 적용돼서는 안 되며 환자가 최선의 치료를 받을 수 있는 환경을 만드는 것이 중요하다고 주장해왔다.

라우터바흐 개혁안의 핵심은 병원 수입에서 포괄수가제의 비중을 줄이고 인력 충원이나 시설 유지를 위해 기본적으로 지급되는 예산을 늘리는 것이다. 개혁안에 따르면 병원은 전체 재정의 60%를 인력이나 시설 유지를 위한 기본 운영비로 지급받고 나머지 40%만 포괄수가제를 통해 충당한다. 이를 통해 인구밀도가 낮아 환자가 적은 지역의 소규모 병원 또한 생존할 수 있다.

의료 개혁과 의대 정원 확대를 추진하고 있는 카를 라우터바흐 독일 연방 보건장관.ⓒAFP PHOTO
의료 개혁과 의대 정원 확대를 추진하고 있는 카를 라우터바흐 독일 연방 보건장관.ⓒAFP PHOTO

개혁안의 또 다른 핵심은 병원을 치료 역량에 따라 3단계로 구분하는 것이다. 환자 수와 관계없이 병원에 기본 운영비를 지급하려면 시설이나 인력 등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개혁안에 따르면 1차 병원은 가장 기본적인 의료 행위만 담당하고, 2차 병원은 분야별로 세분화된 전문 인력과 시설을 갖추고 해당 의료만을 담당한다. 그리고 대학병원 같은 3차 병원은 가장 복잡한 의료를 책임진다. 지금까지는 각 병원이 자신의 능력과 상관없이 모든 환자를 다 돌봤다면 라우터바흐 개혁안은 환자를 진단해 중증도에 따라 알맞은 단계의 병원으로 이송할 것을 요구한다. 해당 개혁안은 지역의 1차 병원이 할 수 있는 역할을 제한하기 때문에 인구밀도가 낮은 지역에서 주민이 누리는 의료 질이 더욱 낮아진다는 비판을 받기도 한다.

라우터바흐 장관은 6월1일 〈빌트〉와 한 인터뷰에서 개혁안을 긴급히 실행하지 않으면 병원 25%가 사라지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그는 병원을 유지하려면 개혁이 불가피하기 때문에 지역 병원의 역할 축소는 피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라우터바흐의 개혁안이 통과되기 위해서는 각 주정부의 동의가 필요하다. 언론 보도에 따르면 현재 연방정부와 주정부들은 포괄수가제의 비중을 줄이고 기본 운영비를 지급하는 재정 개혁안에 대해서는 합의를 마쳤다. 하지만 병원 설치와 운영은 주정부 권한이기 때문에 연방정부 기준에 따라 병원을 3단계로 구분하고 새롭게 배치하는 데 대해서는 주정부들이 반대하고 있다. 라우터바흐 장관은 개혁안에 대해 연방정부와 주정부가 90%까지 합의했다며 2024년에는 개혁안이 실행될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전망했다.

기자명 프랑크푸르트∙김인건 통신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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