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 도쿄도 다치카와시의 노인요양시설 시세이홈 아오링고와 같은 사회복지법인이 운영하는 한 어린이집의 교사들과 아이들. ⓒ시사IN 이명익

〈총·균·쇠〉의 저자 재레드 다이아몬드는 코로나19 팬데믹이 인류 역사상 ‘첫 번째 글로벌 위기’로 기억될 것이라고 말했다. 그에 반해 각 나라가 팬데믹에 대응한 경험과 지식은 조각난 채 뿔뿔이 흩어져 있다. 코로나19로 국경이 막히고 교류가 단절된 탓이다.

우리의 머릿속에 고착된 나라 밖 코로나19 이미지는 체육관에 대규모로 설치된 임시 병상이나 한꺼번에 사망자의 관을 묻는 모습 등 2020년 초 단편적인 장면에 머물러 있다.

코로나19 유행 동안 모든 공동체는 상실의 아픔을 겪었고, 크든 작든 실패의 수렁에 빠졌다. 완벽한 정답을 찾아낸 사회는 없다. 우수한 방역 성과를 거뒀다고 평가받는 한국 역시 그렇다. 팬데믹이라는 거대한 사건 앞에 우리가 할 수 있는 최선은 서로의 경험과 고민, 반성과 성찰을 성실하고 치열하게 한데 모으는 일이다.

코로나19라는 공통의 상대에 맞서 각 사회는 무엇을 중시하고, 어떤 길을 택했을까? 〈시사IN〉은 이 질문을 들고 일본·스웨덴·영국을 찾았다. 그 결과를 4주에 걸쳐 연재한다. 그리고 마지막 회에 다시 한국으로 돌아올 것이다.

팬데믹의 기억을 되짚어보는 작업은 단순히 다음 감염병 위기에 대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다. 재난을 딛고 더 나은 사회로 나아갈 발판을 마련하기 위함이다.

오미나미 패밀리 클리닉의 미야치 소장(왼쪽)과 다카하시 간호사(뒤)가 한 왕진 가정을 방문했다. ⓒ시사IN 이명익

세월의 흔적이 엿보이는 8층 아파트 건물 주차장에 흰색 경차 한 대가 들어섰다. 차량 외부에 주황색으로 쓰인 글씨는 ‘오미나미 패밀리 클리닉’. 이날 가정 방문 진료를 맡은 의사 미야치 히데아키 소장, 간호사 다카하시 게이코 씨, 운전석에 앉은 원무과 직원 요시노 가오리 씨가 곧 만날 환자의 차트를 보며 차 안에서 한동안 이야기를 나누었다.

마스크 위에 페이스실드를 덧쓴 의사와 간호사가 차에서 내려 아파트 3층으로 올라갔다. 간호사 다카하시 씨가 초인종을 누르자 한 할머니가 방문진료팀을 반겼다. 만으로 89세, 한국 나이로 치면 90세인 H씨다. 방 하나와 작은 거실과 부엌으로 이뤄진 이 아파트에 H씨 혼자 살고 있다. 단정한 집의 한쪽 벽면에 가족들의 사진과 잘 보이게 큰 글씨로 쓴 친지들의 연락처가 빼곡하게 붙어 있었다.

다카하시 씨가 혈압과 체온 등을 체크하는 사이 의사인 미야치 소장이 말을 붙였다. “이제 기침은 멈추셨나요? 요즘 불편한 것 있으세요? 식욕은요?” H씨는 오늘 손님들이 많이 와서 더욱 감사하다며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식욕은 괜찮아요. 무릎이 조금 아프지만 걷는 데는 지장 없어요.” 미야치 소장이 혈압과 체온, 문진 내용을 노크북에 받아 적었다.

다카하시 씨가 익숙한 듯 ‘연락장’이라고 적힌 수첩을 찾아 펼쳤다. 떨어져 사는 H씨의 딸과 방문진료팀이 메시지를 주고받는 수첩이다. 딸이 남긴 메모를 확인한 뒤 다카하시 씨는 그 뒷장에 메시지를 적었다. H씨는 2017년 10월부터 오미나미 패밀리 클리닉에서 방문 진료를 받고 있다. 2020년 코로나19 유행이 시작된 이후에도 한 달에 두 번 이곳을 찾는 방문진료팀의 발길은 끊긴 적이 없다. “8월31일. 언제나처럼 진찰받으셨어요. 점안액 처방해드렸습니다. 단기 입소 일정 알려주신 것 감사하고요. 다음 왕진 날은 9월14일, 29일입니다. 갑작스러운 취재 (허락해주셔서) 감사합니다.” 갑작스러운 취재란 한국에서 찾아온 취재기자와 사진기자를 말하는 것이었다.

2일 오후 도쿄에서 가장 오래된 사찰인 센소지 사찰 앞을 찾은 일본인 관광객들. ⓒ시사IN 이명익

〈시사IN〉은 해외 코로나19 기획의 일환으로 8월29일부터 9월2일까지 일본 도쿄도를 찾았다. 일본의 코로나19 방역은 팩스·서류에 의존하는 확진자 집계 방식이나 입과 코를 겨우 막는 일명 ‘아베 마스크’ 등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로 뇌리에 남아 있다. 그러나 전 세계적 추이에 비춰봤을 때 일본은 한국과 함께 코로나19 방역에서 선방한 나라로 분류된다. 인구 100만명당 코로나19 누적 사망자 수는 국제적 수준에서 상당히 낮은 편인 한국보다도 더 낮다. 이번 기획을 준비하며 의료·방역 전문가들에게 자문했을 때, 가장 궁금한 곳으로 꼽는 나라가 일본이었다.

물론 확진자 수나 사망자 수 같은 방역 지표가 코로나19 대응의 성패를 가르는 절대적 기준일 수는 없다. 일본 정부가 발표하는 코로나19 통계는 과소 집계된다는 의혹의 눈초리를 받는 것도 사실이다(일본 현지에서 만난 전문가들은 일본 정부의 방역 정책에 비판적인 전문가라 할지라도 정부가 의도적으로 사망자 수를 축소하지는 않았을 거라고 봤다). 다만 전체 인구의 30% 가까이가 65세 이상인 초고령사회 일본에서 코로나19 고위험군인 노인들과 고령자 요양시설을 보호하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는지는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일본 방역의 중심 ‘방문 진료’

일본에서 코로나19 방역을 주도하는 법적 지위는 중앙정부가 아니라 ‘도도부현(한국의 광역지자체에 해당)’이 가진다. 지자체마다 지역 상황에 맞춰 대응할 수 있다는 이점이 있지만, 중대본(국무총리)-중수본(보건복지부)-방대본(질병관리청) 체계를 갖춘 한국처럼 일사불란한 방역은 이뤄지지 못했다. 정부의 빈틈을 메운 것은 지역사회에 뿌리 내린 의료기관들이었다. 〈시사IN〉은 ‘전 일본 민주의료기관연합회(민의련)’의 협조를 얻어 도쿄도에 위치한 동네 의원과 병원, 노인요양시설을 방문하고 의료진을 동행 취재했다. 코로나19 기간, 주민들을 지키기 위해 자발적인 활동을 벌였던 곳이다.

그 중심에 ‘방문 진료’가 있다. 1986년 방문 진료가 제도화된 일본은 2006년부터 본격적으로 이를 확대해왔다. 배경에는 초고령 시대에 불어나는 복지예산을 절감해야 한다는 현실적 고려가 있었다. 노인 한 명이 요양시설에 입소하는 것보다 자신의 집에 거주하며 ‘방문 진료’ ‘방문 간호’ ‘방문 요양’ 서비스를 받을 때 정부가 지원하는 비용이 절감되기 때문이다.

의사·간호사가 환자를 만나러 집으로, 요양원으로 직접 찾아가는 방식은 코로나19 유행 기간 완벽하지는 않더라도 취약계층의 의료 접근권을 유지하는 역할을 했다. 사회적 고립을 막는 장치이기도 했다. 자가격리 중에 상태가 악화되거나, 발열 증상으로 병원 진료가 막힌 환자들이 병상을 기다리는 것 외에는 의료적 처치를 받을 길이 막혀 있던 한국과 다른 점이다. 방문 진료는 포스트 코로나 시대에 의제로 떠오른 ‘노인 돌봄’ 문제를 모색할 단서가 될 수도 있다.

일본에서도 병상과 의료진이 부족해 제때 치료를 받지 못한 채 많은 이들이 사망했다. 요양시설에서 발생한 집단감염과 그로 인한 피해도 깊은 아픔으로 남아 있다. 영리만을 목적으로 형식적인 방문 진료를 하는 병원들 역시 적지 않았다. 도쿄 올림픽 개최는 지쳐 있던 일선 방역 요원과 의료진들을 더욱 좌절시켰다. 이 기사는 확실한 성공 사례나 더 나은 모델을 다루고 있지 않다. 〈시사IN〉이 이번 기획을 통해 전하고자 하는 것은 코로나19라는 감염병 위기에 맞선 또 다른 사회의, 또 다른 경험이다. 재난에서 위험에 처한 이웃과 환자들을 구하고 싶었던 또 다른 사람들의 노력과 좌절·성찰이다. 바다 건너 한국과는 떨어져 있지만 또 어느 길목에서는 맞닿을 이야기다.

오미나미 패밀리 클리닉의 미야치 소장(왼쪽)과 다카하시 간호사(오른쪽)가 방문 진료 환자의 집을 찾았다. ⓒ시사IN 이명익

8월31일 도쿄도 무사시무라야마시
오미나미 패밀리 클리닉

도쿄도 북서쪽에 위치한 무사시무라야마시는 인구가 7만명가량 되는 소도시다. 도쿄도에 있지만 철도나 국도가 지나가지 않는 지역으로 한적한 분위기가 감돈다. 1차 의료기관, 즉 동네 의원인 오미나미 패밀리 클리닉(이하 오미나미 클리닉)은 1985년 개원했다. ‘아기부터 노인까지 치료받을 수 있는 진료소’라는 슬로건을 내걸었다. 오전에는 클리닉을 찾아오는 환자들의 외래진료를 보고, 오후에는 방문 진료를 나간다. 방문 진료 횟수는 한 달에 150건 정도다. 8월31일 오후에는 H씨를 포함해 총 6명의 집을 방문해 진찰했다.

무사시무라야마시에서 동네 의원 9곳이 연합해 ‘코로나19 자택요양자 지원사업’을 꾸린 건 2021년 8월이었다. 5차 유행기였던 당시 하루 신규 확진자 수가 한 달 사이 2만명까지 불어나자 일본 정부는 입원할 정도로 상태가 심각하지 않은 코로나19 확진자는 ‘자택 요양’을 기본으로 한다고 지침을 바꿨다(자택 요양은 한국의 재택치료와 비슷한 개념이다).

유행이 더 심각했던 도쿄 중심부에서는 자택 요양 중에 사망자가 생겨났다. 주민들의 불안이 커지고 있었다. 미야치 히데아키 오미나미 클리닉 소장은 “이런 배경이 우리 지역의 진료소(의원)들을 모이게 했다”라고 말했다. ‘자택요양자 진료 사업’의 역할은 크게 두 가지였다. 첫 번째는 보건소 의뢰를 받아 코로나19 환자의 중증도를 분류한 뒤 입원이 필요한지 판단하는 것이다. 입원이 필요하다고 판단된 환자는 무사시무라야마 센터병원으로 연계된다. 두 번째는 자택 요양 중인 확진자의 건강 관찰 사업이다. 한국으로 치면 중수본(보건복지부) 병상배정반의 역할과 재택치료자 전화 모니터링 업무를 동네 의원들이 자발적으로 도맡은 것이다.

오미나미 패밀리 클리닉의 방문진료팀. 의사, 간호사, 원무과 직원이 한 조를 이룬다. ⓒ시사IN 이명익

미야치 소장은 이 사업의 목표를 네 가지 키워드로 설명했다. “첫 번째는 ‘병진 연계’입니다. 여기서 병은 병원, 진은 진료소인데요. 코로나19 의료 대응에서 우리 지역의 진료소와 중심 병원(무마시무라야마 센터병원)이 ‘콜라보’ 한다는 것입니다. 두 번째는 ‘보건소 업무의 경감’입니다. 코로나19 유행 기간 보건소가 거의 파탄 지경에 몰렸는데 그 일을 동네 의원들이 십시일반 나누자는 것이죠. 세 번째는 ‘지역완결성’. 무사시무라야마시에 있는 의료 자원을 최대한 활용해서 코로나19 환자를 치료하고, 다른 의료 기능들 역시 마비되지 않도록 하자는 뜻입니다. 마지막 키워드는 지역 주민들의 안심이었습니다.”

감염병 위기 속에서 큰 병원도 아닌 동네 의원들이 마을을 지키는 데에 앞장섰던 배경은 무엇일까? 애초에 지역 의원들을 연결하던 네트워크라도 있었던 걸까? 미야치 소장은 잠시 뜸을 들이더니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9개 진료소 모두 코로나19 유행을 겪으며 처음 교류하게 된 곳입니다. 무사시무라야마시에 진료소가 27개 있는데요, 그러고 보니 이 사업에 참여한 진료소는 모두 ‘종합 진료’를 추구한다는 공통점이 있네요.” 종합 진료는 단편적인 의료만이 아니라 생활태도, 식습관, 가정환경, 가족관계 등 환자의 건강을 결정짓는 다양한 측면을 고려한다는 뜻이다. 방문 진료도 여기에 포함된다.

코로나19 유행 기간에도 한 달에 두 번 정기적인 방문 진료는 계속되었다. 코로나19 감염이 의심되는 발열 환자는 의료진이 방호복을 입고 찾아갔다. 자택 요양 중인 코로나19 확진자의 상태가 갑자기 나빠지면 예정에 없던 임시 왕진을 가기도 했다. 방문 진료를 받는 환자들 중에는 치매 노인들의 비율이 높아 마스크 쓰기 등 기본적인 위생 수칙이 지켜지지 않는 경우가 많았다. 팬데믹 속에서 방문 진료를 이어가는 데에 어려운 점은 없었을까? 오미나미 클리닉의 가와하라 가요 간호부장의 대답은 다소 뜻밖이었다. “방호복을 챙겨 입고 이러는 건 사실 그리 힘든 일이 아니에요. 그렇게 찾아간 집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치료 범위를 넘어선 위중한 환자를 만나는 경우가 있어요. 병원에 병상이 없어서 입원 조정이 안 된다거나 그 환자를 병원까지 데려다줄 구급차를 구하지 못할 때, 그게 참 힘이 들었습니다.”

일본 도쿄도 다치카와시 다치카와 상호병원의 야마다 히데키 부원장. ⓒ시사IN 이명익

8월30일 오후 도쿄도 다치카와시
다치카와 상호병원

오후 2시 다치카와 상호병원 2층 세미나실. 야마다 히데키 부원장을 비롯한 다치카와 상호병원 관계자들과 지역 의사회 회장, 주민대표 등이 모인 회의가 진행 중이었다. 다치카와 보건소 직원과 소방서 구급대원은 온라인 회의 프로그램 ‘줌’으로 연결돼 있었다. 다치카와 상호병원은 일본 정부에서 ‘지역의료지원병원’ 자격을 취득한 곳으로 지역 보건의료계와 행정기관, 주민대표가 참여하는 회의를 분기별로 한 번씩 열어야 한다.

이날의 주제는 ‘본원(다치카와 병원)의 코로나 대응 현황과 과제’였다. 다치카와 상호병원 관계자는 코로나19 전용 병상 50개가 거의 꽉 찬 상태라며 119 구급차가 태우고 온 환자들을 돌려보내는 상황에 대해 양해를 구했다. 2022년 여름 일본은 7차 유행의 고비를 힘겹게 넘기고 있었다. 8월 중순 최대 규모인 25만명까지 치솟던 확진자 커브는 꺾였지만 8월 말 여전히 하루 15만명가량 확진자가 나오고 있었다. 6월 34건이던 응급차 거부 횟수가 7월에는 108건으로 증가했다.

다치카와 상호병원. 지난해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병원 창문에 올림픽 반대 벽보를 붙였었다. 현재 그 자리에는 우크라이나 전쟁 반대 문구가 붙어있다. ⓒ시사IN 이명익

다치카와 상호병원은 280병상 규모의 종합병원(2차 의료기관)이다. 유행 초기부터 코로나19 환자를 보고 있다. 에크모 장비를 달아야 하는 최중증 환자를 제외하면 경증, 중등증, 중환자를 모두 치료한다. 공공병원을 비우고 코로나19 환자를 전담하게 했던 한국과 달리 일본 민간병원들은 적정한 시설(200병상 이상)을 갖췄다면 대부분 코로나19 환자 치료에 참여해왔다. 다치카와 상호병원은 그중에서도 발 벗고 나선 곳이었다.

지금은 사정이 많이 나아졌지만 2020년 초 신종 감염병 치료에 동참하는 건 위태로운 일이었다. 코로나19 환자가 입원해 있다는 사실이 알려지자 다른 환자들의 발길이 뚝 끊겼다. 병원 직원들은 자녀가 다니는 보육원에서 등원을 자제해달라는 소리를 들었다. 도쿄도의 요청으로 코로나19 전용 병상 42개를 마련했으나 예산과 물품 지원은 턱없이 부족했다. 방호복, N95 마스크가 모자라 비닐을 잘라 직접 가운을 만들어 써야 할 지경이었다. 일본 민의련과 교류해온 녹색병원, 사회적의료기관연합회(사의련) 등 한국 의료단체에서 방역 물품을 보내주기도 했다. 이러다가 병원이 완전 도산할지도 모른다는 얘기가 돌았다.

그때 마침 TV아사히에서 코로나19 환자를 보는 병원을 물색하고 있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있다는 소문이 나면 환자가 더 줄어들까 봐 다른 병원들이 몸을 사릴 때 다치카와 상호병원의 야마다 히데키 부원장이 손을 들었다. 야마다 부원장은 방송에 출연해 이렇게 호소했다. “저희 병원과 직원들은 감염병 위기를 극복하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여러분(환자들)이 병원을 찾지 않아 완전 적자 상태입니다. 여러분이 와주셔야 합니다.” 이런 호소에도 불구하고 환자들은 한동안 돌아오지 않았지만 방송을 계기로 도쿄도의 지원금이 대폭 인상되었다.

일본 도쿄도 다치카와시 다치카와 상호병원의 코로나 격리 병동에서 의료진이 각자 업무를 보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다치카와 상호병원은 지난해 도쿄 올림픽을 앞두고 한국 언론에 소개되기도 했다. 병원 창문에 붙인 올림픽 반대 벽보가 SNS에서 화제가 되며 한국까지 전해졌다. 벽보 문구는 “의료는 한계, 올림픽 그만!”이었다. 야마다 부원장은 4차 유행과 5차 유행이 이어졌던 지난해 봄·여름을 극한 상황으로 기억했다. 코로나19 확진자 규모는 지금의 7차 유행보다 훨씬 적었지만 당시에는 오미크론보다 치사율이 높은 델타 변이가 유행을 주도하고 있었다. 특히 오사카 지역의 상황이 심각했다. 4차 유행 시기인 2021년 4월과 5월, 자택에서 사망한 코로나19 확진자가 오사카에서는 19명, 오사카 인근의 효고현에서는 24명 발생했다. 중증 환자가 폭발하자 효고현에서는 85세 이상은 응급차를 태우지 않는다는 지침까지 세워졌다.

일본 정부는 오사카 지역의 큰 피해를 겪으며 의료기관들이 방문 진료에 적극 나서도록 유도하는 정책을 도입했다. 원래 방문 진료(월 2회 기본)를 나가면 5만7760엔(약 57만원)을 수가로 받을 수 있었다. 일본 정부는 2021년 7월 ‘특례 코로나 가산’이라는 이름으로 9500엔(약 9만5000원)을 기본 수가에 덧붙였고, 9월부터는 가산금액을 2만8500엔(약 28만원)으로 올렸다.

야마다 부원장은 활발한 방문 진료가 고령층을 보호하고 사망자 수를 줄이는 데에 일조했다고 평가했지만 동시에 어두운 면을 짚었다. 노인 돌봄은 ‘방문 진료’와 한국의 요양보호사 격인 헬퍼들이 생활을 보조해주는 ‘방문 요양’이 맞물려 돌아가는데 ‘방문 요양’에는 가산 수당이 전혀 책정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환자들과 접촉이 많아 감염 위험이 높은 사람들은 목욕을 시키거나 집안일을 돕는 요양보호사들이에요. 이들에게는 어떠한 금전적인 보상이나 지원도 없었습니다. 그래서 의료진은 오지만 코로나19에 위험을 느낀 요양보호사들이 방문을 중단해 돌봄을 받지 못하는
1인·2인 노인 가정들이 생겨났어요. 이런 집들은 큰돈을 들여서 의사나 간호사를 왕진 보내도 오히려 상태가 나빠졌어요. 요양보호사가 오지 않으니 제대로 먹지 못하고, 탈수 상태가 되고, 생활이 파탄나버렸습니다.”

8월30일 오전 도쿄도 다치카와시
시세이홈 아오링고

시세이홈 입소자들이 방문 진료를 받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시세이홈 아오링고는 다치카와 상호병원에서 약 2㎞ 떨어져 있는 노인요양시설이다. 다치카와 상호병원이 속한 의료재단 ‘건생회’에서 이곳으로 방문 진료를 나온다. 노인요양시설로 방문 진료를 나가는 의사를 ‘촉탁의’라고 한다. 한국에도 요양원마다 인근 의료기관과 계약을 맺어 촉탁의를 지정하고 노인들의 건강을 관리하도록 하고 있지만, 현장의 얘기를 들어보면 형식적인 수준에 그치는 경우가 대다수다. 그마저도 코로나19 유행 기간에는 제대로 운영되지 못했다. 한국에서는 집단감염으로 코호트 격리된 요양시설에 촉탁의들의 발길이 끊겼기 때문이다.

8월30일 시세이홈 아오링고(이하 시세이홈)로 방문 진료를 나온 촉탁의는 가정의학과 전문의인 나카니시 리에코 씨였다. 7층 건물 한 채를 쓰는 시세이홈에는 노인 129명이 입소해 있다. 노인들의 거주 공간은 3층부터 6층까지다. 각 층은 다시 E(동) W(서) S(남) N(북) 네 구역으로 나뉜다. 한 구역에는 10~11명이 생활한다. 모두 개인실을 쓴다. 중앙에 있는 거실이 있고, 그 주위로 개인실이 들어선 구조다. 구역마다 촉탁의가 지정돼 있는데 나카니시 씨가 맡은 구역은 4S(4층의 S)였다.

오전 10시, 간호사실에서 입소자들의 진료기록을 챙긴 나카니시 씨가 4층으로 올라왔다. 시세이홈에 근무하는 간호사들이 동행했다. 4S 구역에 들어서자 헬퍼(요양보호사)들이 입소자들을 태운 휠체어를 밀고 나왔다. 나카니시 씨 앞으로 긴 줄이 늘어섰다. 그는 특히 한 할머니의 전신을 꼼꼼히 진찰했다. 91세인 D씨다. 대장암을 앓고 있는 D씨는 오랫동안 자택에서 방문 진료를 받다가 얼마 전 시세이홈에 입소했다.

〈시사IN〉 취재를 돕기 위해 시세이홈을 찾은 다치카와 상호병원의 야마다 부원장은 상·중·하로 구분한다면 이곳은 전반적인 일본 요양시설 수준과 비교해 ‘상’에 해당한다고 말했다. 일본 요양시설의 구조는 1인실로 바뀌는 추세이지만 여전히 3~4인실도 드물지 않다. 무엇보다도 이곳은 1912년 설립 당시 취지를 잘 이어오며 간호사와 요양보호사, 직원들이 정성껏 입소자들을 돌본다고 했다. 그에 비해 이용료는 저렴한 편이라 인기가 많다. 보통 2~3년을 대기해야 한다. 그 때문에 혼자서는 활동이 어려워 특별 케어를 받아야 하는, 상태가 중한 노인들에게 주로 입소 기회가 돌아간다. 정부로부터 최대 지원을 받을 경우 입소자가 부담해야 하는 시세이홈의 한 달 이용료는 16만7000엔(약 165만원)이다. 야마다 부원장은 “부유한 노인들은 굳이 이런 시설을 기다릴 필요가 없다. 비싼 이용료를 내고 고급 시설에 바로 입소한다. 반면 서민들은 시세이홈 같은 곳에 들어오는 게 제일 좋은 방법이다. 하지만 자리가 쉽게 나지 않으니 평범한 일본 노인들은 대부분 재택의료(방문 진료와 방문 요양)를 받을 수밖에 없다”라고 말했다.

팬데믹 기간 일본의 요양시설도 코로나19 집단감염으로 큰 어려움을 겪었다. 2022년 여름에 닥친 7차 유행으로 8월 셋째 주에는 고령자 시설 집단감염 건수가 736건에 달했다. 이날 찾은 시세이홈의 분위기는 무척 안정적이라 코로나19의 광풍에서 한 발짝 비켜나 있는 곳이라고 짐작했는데 알고 보니 아니었다. 야마다 부원장은 4층의 4E 구역과 4N 구역이 코로나19 때문에 격리 중이라고 말했다.

‘4E 그린존’으로 들어가는 직원의 모습. ⓒ시사IN 이명익

4E 구역 앞에는 ‘그린존’이라는 표지가 붙어 있었다. 한 직원이 4E 구역 입구 앞에서 방호복을 덧입고 페이스실드를 쓰더니 수건 여러 장을 챙겨 안으로 들어갔다. ‘그린존’은 밀접접촉자들이 있는 구역을 가리킨다. 4E 구역을 담당하던 시설 직원이 코로나19에 걸려 이곳이 ‘그린존’으로 지정되었다고 야마다 부원장은 설명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있는 곳은 ‘레드존’, 코로나19 의심 환자가 있는 곳은 ‘옐로존’으로 설정된다.

일본은 2021년 여름을 기점으로 요양시설에서 코로나19 감염이 발생할 시 일명 ‘조닝(Zoning)’을 방침으로 삼고 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한두 명 발견되면 시설에서 빼내 병원에 보내지만 그보다 큰 규모일 경우 그 구역을 통째로 닫아버린 뒤 입원 치료가 필요한 상태의 환자만 병원으로 보낸다. ‘조닝’ 구역은 외부와 격리되지만 그 안에서는 비교적 자유롭게 생활할 수 있다.

야마다 부원장은 코로나19 확진자가 있는 격리 구역일지라도 월 2회 촉탁의의 정기 방문 진료는 끊기지 않는다고 말했다. 방호복을 입고 들어가서 환자들을 본다는 것이다. 그래도 확진자와 접촉해 감염 위험에 노출되는 건데 마다하는 의사는 없었을까. 야마다 부원장은 이렇게 답했다. “코로나19 확진자가 나오든, 인플루엔자가 돌든, 지진이 나든 무조건 가게 돼 있습니다. 정기 왕진이니까요.” 집단감염이 발생한 요양시설에서 촉탁의의 방문이 제구실을 했는지는 일본 의료인들 사이에서도 의견이 분분하다. 어느 정도 도움이 되었다고 보는 전문가가 있는 반면, 확진자가 속출하는 상황에서 감염병 치료에 전문성이 없는 촉탁의의 역할은 제한적이라고 평가하는 이들도 있다.

낮 12시15분. 방문 진료를 마치고 간호사실로 돌아온 나카니시 씨가 93세 M씨의 가족과 통화하고 있었다. 이 할아버지는 나카니시 씨가 담당하는 4S 구역 입소자는 아니었지만, 전날 목욕을 하다 의식을 잃어 그가 임시 왕진을 보게 되었다. 폐기종을 앓고 있는 할아버지는 본래도 상태가 좋지 않은 입소자였다. 병원으로 옮길지 시설에서 임종을 맞이할지 나카니시 씨와 케어매니저(사회복지사)가 번갈아 통화하며 가족과 논의했다. 코로나19로 요양시설 면회는 금지돼 있지만 임종 전에는 가족들의 면회가 허용되었다. 그러나 할아버지의 가족은 코로나19에 걸려 격리 중이라고 했다. 수화기를 붙든 나카니시 씨가 눈을 질끈 감았다.

방문 의사 나카니시 리에코 씨가 임종을 앞둔 한 환자의 보호자와 통화하고 있다. ⓒ시사IN 이명익

나카니시 씨는 2020년 2월부터 시세이홈 방문 진료를 담당하고 있다. 코로나19 유행 기간 내내 한 달에 네 번 정해진 요일에 맞춰 이곳을 찾았다. 그가 맡은 구역에서는 다행스럽게도 코로나19가 돌지 않아 코로나19 환자를 치료한 적은 없지만, 코로나19가 의심되는 발열 환자는 종종 나왔고 그럴 때는 방호복을 입고 진료를 봤다. 팬데믹이라는 혼돈의 시간이 펼쳐진 2년 반 사이 달라진 것이 있을까? 나카니시 씨는 당혹스러운 질문이라며 난처한 웃음을 지었다. 그리고는 잠시 뒤 이렇게 답했다. “제가 이곳에서 하는 일은 변함이 없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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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도쿄/글 김연희 기자·사진 이명익 기자 다른기사 보기 un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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