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월13일 JTBC 〈썰전〉 스튜디오에서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 상임공동대표(오른쪽)와 이준석 국민의힘 당대표의 토론이 진행되었다. ⓒJtbc 〈썰전〉 화면 갈무리

지하철 안내방송이 나온다. “장애인 여러분의 집단 승하차로 인하여 열차가 많이 늦어져서 선량한 시민이 피해를 보고 있습니다. 손님 여러분께 불편을 끼쳐드려 대단히 죄송합니다.” 휠체어를 탄 사람들이 열차 안으로 줄지어 들어오자 승객들이 그들을 향해 소리친다. “시민들을 볼모로 이렇게 해도 되는 거예요?” “불법이지 뭐야 이게.” “근데 집단으로 타고 다닐 건 없잖아.” “이렇게 대중한테 피해를 입혀야 되는 거야? 나쁜 놈의 ××들.” 박경석 전국장애인차별철폐연대(전장연) 상임공동대표는 그들에게 “죄송합니다”라고 고개를 숙인다. 동료들을 향해서는 이렇게 말한다. “그래, 우리는 병신입니다. 병신이라도 당당한 병신이길 원합니다.”

낯설지 않은 이 풍경은 2022년의 모습이 아니다. 2001년 3월9일 지하철에서 열린 시위 현장이다. 고 박종필 감독의 다큐멘터리 〈장애인 이동권 투쟁 보고서-버스를 타자!〉(2002) 도입부 장면이기도 하다. 당시 전장연이 주도한 시위 이름은 ‘장애인과 지하철을 탑시다’였다. 21년 뒤인 2022년에 열린 시위의 이름도 크게 달라지지 못했다.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시위를 할 때마다 쏟아지는 시선도, 욕설도 그대로였다. 달라진 부분이 있다면 시위에 나선 박경석 대표의 머리카락과 눈썹이 하얗게 세었다는 점 정도다.

1960년생인 박 대표는 윤석열 대통령 당선자와 동갑이다. 비장애인으로 태어나 해병대 특수수색대에서 복무를 마쳤다. 복학한 뒤 행글라이딩을 하다 추락 사고를 당해 하반신이 마비됐다. 스물세 살 때였다. 사고 이후 스스로 집 밖에 나오기까지 5년이 걸렸다. 장애인복지관에서 운영하는 직업재활 훈련 프로그램에 등록했다. 훈련생들이 점심시간에 하는 국민체조를 거부하자고 뜻을 모았을 때 혼자 반대했다. “나는 해병대 나왔고 국기에 대한 맹세를 3년 동안 했어요. 데모는 나쁘다고 생각했어.”(〈유언을 만난 세계〉, 오월의봄)

‘착한 장애인’이 되고 싶었다. “그때는 복지관에서 하라는 대로 열심히 하면 장애인도 취업하고 평범하게 살 수 있을 줄 알았거든요.” 당시를 회상하던 박경석 대표가 웃었다. “사실 저희하고 이준석 국민의힘 당대표하고 콘셉트는 표현상으로 똑같아요. 착한 사람은 필요 없다는 거요. 이 대표는 ‘착한 정치인은 필요 없다’고 말하죠. 자신은 ‘약자가 절대선’이라고 말하는 사람들의 눈치를 보느라 할 말도 못하는 정치인과 다르다는 거죠. 약자가 절대선은 아니라는 말은 맞아요. 그런데 왜 거꾸로 장애인은 선해야만 인간의 기본권리를 누릴 수 있는 건가요? 그래서 저희는 ‘착한 장애인은 필요 없다’고 이야기해요.”

자신을 ‘물들인’ 활동가들은 먼저 세상을 떠났다. 장애인 언론 〈비마이너〉는 지난해 이동권 투쟁 20주년을 기념해 이들을 기리는 책 〈유언을 만난 세계〉를 출판했다. 박경석 대표는 발문에 이렇게 썼다. “그러나 마음 한켠엔 언제나 찜찜함이 남아 있었다. 술 한잔 얻어먹은 운명 때문에 그들과 각종 투쟁을 함께하기는 했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내가 왜 싸워야 해?’ 하는 생각도 있었기 때문이다. 피할 수만 있다면 도망가고 싶었다.”

도망가고 싶었던 ‘착한 장애인’은 21년이 흐르는 사이에 ‘전과 27범’이 됐다. 주로 장애인 기본권리 보장을 요구하며 불법 시위를 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지금까지 지하철 연착 투쟁 때문에 형사재판이 열린 적은 없어요. 지하철 승강장은 집회 신고 자체도 안 되는 곳이에요. 집회 신고가 안 나는 곳에서 집회가 아닌 출근을 한다는데 어떻게 처벌합니까.” 수많은 재판을 받았던 그가 말했다. 불법과 합법을 판단하는 건 사법부의 몫이지 정치인이 딱지를 붙일 일이 아니라고 덧붙였다. “설사 그게 불법이라 하더라도, 이준석 대표의 말처럼 불법과 합법이 문명과 비문명을 가르는 유일한 기준일까요?”

4월8일 박경석 전장연 상임공동대표(오른쪽)와 강혜민 〈비마이너〉 편집장이 대담을 하고 있다. ⓒ시사IN 조남진

장애인 활동가 시위를 취재한 〈비마이너〉

강혜민 〈비마이너〉 편집장은 장애인 활동가들의 시위 현장을 빠지지 않고 찾아다니며 기사를 쓴다. 그의 목적은 이들의 투쟁이 ‘불법이 아니다’라고 사람들을 설득하기 위함이 아니다. “파편 조각을 하나씩 뒤따라가며 일일이 해명하는 건 너무 소모적이거든요. 최대한 현장을 꼼꼼히 살펴서 이들이 거리로 나올 수밖에 없었던 전체적인 맥락을 전달하려고 해요.”

강 편집장은 우리 사회가, 언제든지 개정되고 바뀔 수 있는 현실 법보다 그 근간이 되는 헌법 정신에 주목해야 한다고 말했다. 박경석 대표가 말을 받았다. “법이 왜 있나요. 인간이라면 누구나 법 앞에 평등하고 차별받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아닌가요. 그런데 지금 장애인이 비장애인과 평등합니까. 아니라면 국가는 이를 시정하기 위해 노력해야 할 의무가 있는데 지난 21년 동안 스스로 약속한 계획마저 지키지 않았잖아요. 이 불법에 대한 책임은 대체 누가 묻나요.”

지난 21년 동안 장애인 권리는 아주 느리게 조금씩 확장돼왔지만 여전히 갈 길이 멀다. 박경석 대표는 장애가 있는 사람은 0점도 아니고 그 자체로 -100점인 삶을 살 수밖에 없다고 말한다. “2022년에 태어나면 비장애인은 아무리 가난해도 버스를 탈 수 있고 의무교육은 받을 수 있잖아요. 장애인은 버스를 타기도 어렵고 의무교육을 받기도 어렵습니다.” 그는 서울지하철 역사 내 ‘엘리베이터 설치율 94%’도 이렇게 설명했다. “비장애인의 관점에서 보면 94점짜리겠지만, 장애인의 관점에서는 -100점에서 이제 겨우 -6점까지 끌어올린 겁니다. 아직 0점조차 되지 못한 거예요. 2017년에도 리프트를 타던 사람이 떨어져 죽었습니다. 그래도 -6점이 어디냐며 감지덕지해야 할까요?”

3월29일 대통령직인수위원회 측과 면담을 한 전장연은 당분간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 시위를 멈추기로 했다. 장애인 차별철폐의 날인 4월20일까지 장애인 권리 예산을 반영하겠다는 인수위 측의 답변을 기다리겠다는 의미였다. 출근 시위를 멈춘 박경석 대표는 이준석 대표에게 토론을 제안했다. “지금까지 저희가 뭘 요구해왔고 이걸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정치의 책임이 무엇인가를 좀 이야기하고 싶어요. 21년 내내 저희가 외쳤다는 건 21년 내내 두 정당 모두 저희에게 무관심했다는 뜻이니까요.” 그는 토론에서 담판을 짓거나 승패를 가르고 싶은 게 아니라고 설명했다. “지금 무슨 최다 득표가 필요한 대통령 선거에 나가는 게 아니잖아요. 권력이 아니라 권리를 달라는 거니까요.”

주위에선 그가 방송 토론에 능한 이준석 대표와 일대일로 만나는 걸 만류하기도 했다. 하지만 그에게 방송 토론은 놓칠 수 없는 간절한 기회였다. 당사자가 텔레비전 토론회에 나가 시민들에게 직접 장애인의 현실에 대해 알릴 수 있는 발판이었다. “제가 좋아하고 자주 떠올리는 책 구절이 있어요. ‘목소리가 없는 자는 없다. 듣지 않는 자, 듣지 않으려는 자가 있을 뿐이다.’”

강혜민 편집장은 토론을 앞둔 박경석 대표를 이렇게 응원했다. “이 토론이 어떻게 될지는 모르지만 앞으로의 운동에 크게 영향을 미칠 것 같진 않아요. 박경석 선생님(그는 지난 24년 동안 노들장애인야학을 이끌어온 교장선생님이기도 했다)이 텔레비전 토론 방송에 한번 나가보는 게 소원이라고 그렇게 말씀하셨는데, 드디어 메이저 언론에서 장애인 이슈가 토론 주제가 될 만큼 주목을 받은 거잖아요. 이 자체가 운동의 결과라 생각하고, 토론 역시 앞으로 펼쳐질 운동 과정의 한 단계일 뿐이라고 봐요.”

4월13일 오후 JTBC 〈썰전〉 스튜디오에서 박경석 대표와 이준석 대표가 마주 앉았다. 박경석 대표는 출근 시위로 불편을 겪은 시민을 향한 사과로 말문을 열었다. “‘출근길 지하철 탑니다’라는 말을 비장애인의 입장에서 보면, 지하철 타시는 서민들의 삶은 고되지만 공기처럼 너무나 자연스러운 일이 아닙니까. 전장연은 감히 공기처럼 자연스러운 서민 분들의 일상의 바쁜 출근길을 침범했습니다. 전장연은 시민 분들을 볼모로 잡았다는 비난과 혐오적인 욕설도 감수하면서 장애인 이동권은 문명사회에서 생존권이자 기본적인 시민의 권리라고 21년 동안 외치고 있습니다.”

“그저 0이라도 맞춰줬으면 해요”

이날 토론의 주제는 두 가지였다. 첫째, 출근길에 지하철을 타는 전장연의 시위 방식이 시위 목적과 부합한 것이었는가. 둘째, 그래서 이 문제에 대한 해법은 무엇인가. 이준석 대표가 “우리가 장애인 정책을 안 하겠다는 것도 아닌데 왜 이런 방식의 시위를 하느냐”라고 비판하자 박경석 대표는 “안 하겠다고 한 적은 없지만 결국 안 하지 않았느냐. 우리가 100을 요구하면 국가에서는 겨우 20이나 30을 들어주겠다고 약속했고 그 약속마저도 번번이 지키지 않았다. 그래서 21년을 기다려왔는데 또다시 구체적인 약속 없이 언제까지 기다리라는 건지 모르겠다”라고 되물었다.

편집국에서 토론을 지켜본 강혜민 편집장은 이준석 대표가 토론 준비를 제대로 해오지 않은 듯한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이준석 대표는 구체적 대안이나 예산에 대해서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저희도 원래 팩트체크 기사를 준비하고 있었는데, 그게 무슨 의미가 있나 싶기도 해서 고민 중이에요.”

유튜브 실시간 댓글은 “전장연은 결국 돈 달라는 거네” “다 필요 없고 돈 내놓으라는 장애인” 등으로 도배됐다. 토론이 끝나고 난 뒤에 댓글 반응을 전해들은 박경석 대표가 황당한 목소리로 말했다. “저희의 요구를 다들 정확하게 이해하셨네요. 맞아요. 돈 달라는 거 맞아요. 장애인들도 버스와 지하철을 탈 수 있게 예산을 달라는 거예요. 비장애인이 쓰는 예산을 저희에게도 달라는 거예요. 저희의 절박한 요구를 이해했는데도 이걸 고작 조롱거리로 쓰는 건가요.”

박경석 대표와 이준석 대표는 오는 5월 초에 다시 한번 토론을 하기로 약속했다. 두 사람이 헤어지기 전 박 대표는 가방에 있던 책 〈유언을 만난 세계〉를 꺼내 이준석 대표에게 선물했다. 다음 토론 때 바라는 점이 있느냐는 질문에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JTBC 스튜디오에 들어가서 책상에 앉았는데, 저한테는 너무 높더라고요. 비장애인 기준 높이로 만들어진 책상이라 제가 자료를 넘겨 보기가 쉽지 않았어요. 그 정도는 조정을 해줄 수 있지 않을까요. 21년째 말하는 거지만, 100을 바라지도 않고 그저 0이라도 맞춰줬으면 해요.”

기자명 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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