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6년 스페인 내전 당시의 게르다 타로(왼쪽)와 로버트 카파.이 두 사진가는 연인이자 동료였다.

로버트 카파. 그 이름만 들어도 가슴 벅찬 시절이 있었다. 내가 뉴욕 국제사진센터(ICP)로 사진 유학을 가기로 결정했던 가장 큰 이유도 바로 이 학교가 로버트 카파를 기리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그는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펼쳐지던 디데이의 모습을 실감나게 촬영한 사진으로 잘 알려진 인물이다. 그는 중요한 상황이 벌어지고 있는 곳이 어딘지를 직감하고 그 속으로 목숨 걸고 뛰어들 용기를 가진 사진가였다. 그가 “만약 당신의 사진이 만족스럽지 않다면 그것은 충분히 가까이 가지 않았기 때문이다”라고 이야기한 것은 물리적인 거리만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휴먼드라마가 펼쳐지는 사람들 속으로 들어가라는 뜻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그는 사진계의 ‘레전드’다. 로버트 카파라는 ‘신화’는 그의 사진적 재능만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헝가리 출신의 유태인이었던 그는 파리로 이주한 후 그곳의 치열한 사진 시장에 진입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하지만 다소 방탕하고, 자기관리가 부족했던 그에게는 옆에서 도와줄 조력자가 필요했다. 그 사람이 바로 카파의 연인으로 잘 알려진 게르다 타로다. 타로는 나치의 핍박을 피하기 위해 독일에서 프랑스 파리로 이주했던 인물로, 카파를 처음 만난 순간 그가 모래 속에 감춰진 진주임을 바로 알아챌 수 있었다.

타로는 돈도 장비도 제대로 챙기지 못했던 카파에게 정장을 입혀 시장에서 돋보일 수 있도록 만들었다. 그리고 안드레 프리드만과 게르타 포호릴레였던 자신들의 이름을 각각 로버트 카파와 게르다 타로로 바꾸었다. 처음에 타로는 재능 있고 잘나가는 미국 사진가 로버트 카파라는 가상의 인물을 만들었다. 우리가 로버트 카파로 알고 있는 안드레 프리드만에게는 그의 암실 조수 역할을 부여했다. 나중에 많은 편집자들과 주변 사람이 그들의 전략을 알아챘지만, 두 사람은 시장에서 큰 성공을 거뒀다.

두 사람은 직업적으로는 물론 연인으로도 서로 챙겨주고 사기를 북돋우는 사이가 되었다. 카파는 타로에게 사진을 가르쳤고, 스페인 내전을 함께 촬영했다. 그들은 참전 부대를 따라다니면서 전쟁을 취재했고, 그 결과물로 세계적인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타로는 재빠르게 명성을 얻었지만 실제로 사진가로 활동한 기간은 1년밖에 되지 않았다. 스페인 내전 취재 중에 목숨을 잃었기 때문이다. 그는 전쟁터에서 사망한 최초의 여성 종군기자다. 당시 파리에 있던 로버트 카파는 이 소식을 듣고 절망에 빠졌지만, 스페인 내전을 끝까지 취재해서 결국 세계 최고의 전쟁 사진가라는 호칭을 얻게 된다. 타로는 잊혔다.

‘레전드’를 만들어낸 진정한 예술가

하지만 2007년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4500장에 달하는 로버트 카파의 필름을 찾아낸 것이다. 그의 필름이 들어 있던 ‘멕시칸 슈트케이스’로 불리는 3개의 가방에는 스페인 내전에서 촬영한 필름들이 담겨 있었다. 로버트 카파가 파리로 몰래 가지고 들어오려 했던 필름이 복잡한 여정 끝에 멕시코까지 흘러갔던 것이다. 많은 학자가 분석한 결과 가방에 담긴 필름 중 상당한 양이 게르다 타로의 것으로 밝혀졌다. 게르다 타로는 로버트 카파라는 위대한 사진가를 쫓아다닌 존재처럼 부수적으로 여겨졌지만, 사실은 카파 못지않은 위대한 사진가였던 것이다. 그는 로버트 카파라는 ‘레전드’를 만들어낸 진정한 예술가로 인류사에 남을 것이다.

기자명 김성민 (경주대학교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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