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조남진

‘철덕’이라고 있다. ‘덕질’ 중에서도 내공과 몰입도를 상급으로 치는 ‘철도 덕후’를 이렇게 부른다. ‘철덕’들은 그 복잡한 수도권 지하철의 배차간격을 줄줄이 꿰고, 희귀한 열차를 타본 경험을 꼼꼼히 기록하고 공유하며 논다.

전현우씨(35)는 더 희한한 ‘철덕’이다. 분석철학을 전공해 석사까지 마쳤다. 그리고 분석철학의 방법을 철도에 적용하여 ‘덕질’을 철학으로 끌어올렸다. 그의 책 〈거대도시 서울 철도〉는 정체불명이다. 철도 ‘덕질’ 이야기처럼 읽히다가, 교통의 지리학이 되었다가, 철도의 역사와 정치를 훑더니, 정신을 차려보면 통계물리학이 펼쳐진다. 그리고 이 모든 종횡무진의 바탕에 분석철학이 깔려 있다. “철도는 분석철학도에게 매력 있는 주제다. 제대로 된 분류체계가 없는 분야다. 객관적인 분류 방식부터 만들어보자고 생각했다. 그랬더니 철도를 넘어 교통수단 일반에 적용할 수 있는 분석틀이 나왔다.”

그는 ‘속도’와 ‘마찰’(그 교통수단에 접근하는 데 드는 시간. 승용차가 가장 짧고, 철도가 중간, 비행기가 가장 길다)이라는 간단한 두 변수를 조합해 매우 풍부한 결론을 끌어낸다. 철도가 경쟁력이 있는 구간은 대략 100~1000㎞ 사이다. 이동거리가 이보다 짧으면 승용차가, 길면 비행기가 유리해진다. 이 기본 틀에 더해 인구밀집도, 소득수준, 재정투자, 환경부담금 등 변수를 추가로 고려하면 철도의 경쟁력 구간은 늘어나거나 줄어든다. 이렇게 해서 철학은 현실의 문제를 새롭게 바라볼 렌즈를 준다.

철도의 경쟁력 구간을 어떻게 늘릴 것인가? 도시는 어떻게 재설계하고, 재정은 어디에 들어가야 하며, 승용차와 비행기 이용은 어떤 방식으로 불편하게 만들 수 있을까? 이게 요즘 그가 파고드는 주제다. 도시인구가 늘고(메가시티), 철도망이 더 촘촘히 연결되도록 인프라 투자를 늘리면, 철도를 이용하는 ‘마찰’이 줄어드니까 철도의 경쟁력 구간은 늘어난다. 유류세·혼잡통행료와 같은 환경비용을 제대로 물리면, 자동차와 비행기의 ‘마찰’이 늘어나서 철도의 경쟁력 구간이 늘어난다.

그런데 왜 늘려야 할까? “기후변화 때문이다. 같은 숫자의 사람을 같은 거리만큼 수송할 때 철도의 에너지 효율은 승용차나 비행기의 10배가 넘는다. 철도가 경쟁력 있는 구간이 늘어날수록 탄소배출량이 줄어든다.” 지금 시장에서 승용차와 비행기가 철도보다 경쟁력이 높은 한 이유는 환경파괴 비용을 치르지 않아서다. 승용차와 비행기에 환경파괴 비용을 제대로 물리면 철도가 경쟁력 있는 구간을 더 늘릴 수 있다. 기후변화에 대응하는 세계적 추세다. 4월10일 프랑스 하원은, 철도로 2시간30분 이내 거리에서는 항공편 운항을 금지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한국으로 치면 서울-제주 노선을 제외한 국내선 항공이 다 금지되는 셈이다. 전씨는 이렇게 덧붙였다. “스웨덴의 10대 환경운동가 그레타 툰베리도 ‘철덕’이다.” 어쩌면 정말로 ‘덕질’이 지구를 구할 열쇠일지 모른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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