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형동, ‘2019년’, 대구의 한 재개발 지역.

윤명희의 수필 〈버려진 사진〉을 보면 화자(話者)가 친구 고물상을 찾아갔다가 문득 쓰레기더미 속에서 쏟아져 나온 오래된 사진을 자신도 모른 채 밟고 있는 사실에 깜짝 놀란다. 누군가의 얼굴 위에 서 있다는 생각이 들었던 것이다. 화자는 자신의 어머니가 돌아가신 뒤 ‘남은 사진’을 가족들이 정리했던 기억을 떠올린다. 이후 그는 자신의 모습이 카메라 프레임 안에 들어가는 것을 원치 않게 된다. 자신이 없는 세상에 남은 사진이 떠돌아다니는 것이 싫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다가 문득 ‘우리는 왜 사진을 찍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우리는 자신에게 소중한 무엇인가를 기억하기 위해 혹은 누군가 ‘나’를 기억해주길 원하면서 사진을 찍는다. 지방의 한 광역시 공무원들에게 사진 교육을 하던 도중 수강생들의 카메라 메모리 카드를 모두 걷어서 찬찬히 훑어본 적이 있다. 몇몇 수강생의 메모리 카드 안에는 길게는 5년 전 해외여행에서 촬영한 사진까지 수천 장이 들어 있었다. 다음 날 궁금해서 ‘사진을 한번 정리해봤냐’고 수강생에게 질문하니, 여행지에서 보고 그냥 놔뒀다고 했다. 나는 사진의 분류 및 정리, 그리고 데이터 백업의 중요성에 대해 일장연설을 늘어놓았다. 하지만 ‘보지도 않을 사진을 뭘 그렇게 많이 찍었냐’는 이야기는 차마 꺼내지 못했다.

손안에, 주머니 안에 휴대할 수 있는 ‘스마트폰’이라는 요물만 있으면 수많은 사진을 찍어낼 수 있다. 너무 쉽게 사진을 찍고 공유할 수 있는 과잉 이미지 시대다. 그래서 그런지 너무 쉽게 찍고, 쉽게 지우고, 너무 쉽게 잊어버린다. 자신이 SNS에 공유한 사진의 존재조차 잊을 때가 많다. 물론 〈버려진 사진〉의 저자처럼 어느 날 세상을 떠난 이후 자신이 찍힌 사진이 누군가에게 소홀히 대해지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것이 싫어서 사진을 정리할 수 있다. 사진을 무작정 찍어두고 방치하는 무관심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다. 이는 사진에 대한 적극적인 자기 의사 표현이기 때문이다.

박제가 된 사진을 아시오?

대구에서 공무원 시절부터 퇴직 이후까지 꾸준히 사진 작업을 해온 작가가 있다. 대구의 재개발 지역에서 오랫동안 사진을 찍은 분이다. 〈버려진 사진〉을 읽다가 문득 그의 사진 한 점이 떠올랐다. 철거를 기다리는 빈집에 남겨진 가족사진을 촬영한 작품이다. 가족사진들은 액자가 된 채 그대로 벽에 걸려 있거나 심지어 바닥에 버려져 있었다. 부부의 결혼, 자녀의 돌잔치, ‘리마인드 웨딩’ 등 옛 거주자들의 중요한 인생의 순간들을 담고 있었다. 그곳에서의 모든 기억을 ‘철거’와 함께 깨끗하게 지워버리고 싶었던 것일까? 각자 사정이 있었겠지만, 폐허 속에 남겨진 액자 속 사진을 보면 많은 생각이 떠오른다.

롤랑 바르트가 이야기한 것처럼, 사진은 영원히 돌이킬 수 없는 ‘데스마스크’ 같은 존재다. 사진에 찍힌 순간은 프레임 안에 갇히면서 박제가 된다. 그래서 사진은 언제나 ‘과거형’이다. 하지만 사진으로 박제된 과거는 그 사진을 보는 ‘현재의’ 우리에게 여러 가지 감정을 던진다. 과거의 한순간이 타임머신을 타고 현재를 살고 있는 우리 마음 속 깊은 곳을 찌르고 들어온다. 하지만 사진 속 주인공이 버리고 간 ‘사진’이 다른 누군가의 사진 속에 담기면서 새 생명을 얻어 우리에게 다시 말하기 시작한다는 것은, 여전히 수수께끼다.

사진 속 버려진 사진이 이렇게 말하는 것 같다. “나를 기억해!”

기자명 김성민 (경주대학교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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