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민 제공1913년경 ‘사진 신부’들이 하와이에 도착한 후, 자기 신랑을 찾아 흩어지기 직전 찍은 사진. 〈100년을 울린 겔릭호의 고동소리〉 (2007년). 재외동포재단 지음, 현실문화연구 펴냄.

얼마 전 증명사진을 찍으러 동네 스튜디오를 찾았다. 촬영을 마친 스튜디오 사장님은 포토샵을 통해 나의 비대칭인 두 눈을 대칭으로, 미간의 주름은 매끈하게, 백발도 적당한 수준으로 보기 좋게 다듬어주셨다. 이런 기술을 사용할 일이 없는 다큐멘터리 사진가인 나로서는 빠른 속도와 복원력에 놀랄 수밖에 없었다. 요즘 면접장에서 증명사진과 실물을 보면서 본인 여부를 재차 확인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고 들었다. 증명사진의 본래 목적인 ‘확인’조차 어렵게 되었다는 것은 디지털 시대의 딜레마가 아닐 수 없다.

과거 일제강점기에 조선의 많은 여성이 하와이 사탕수수 농장에서 일하는 이주 남성과 결혼하기 위해 태평양을 건너갔다. ‘맞선’은 그 남성의 사진 한 장으로 대체되었다. 이런 조선의 처녀들을 ‘사진 신부(picture bride)’라고 불렀다. 1910년부터 ‘동양인배척법안’이 통과되는 1924년 5월까지 1000명에 달하는 사진 신부들이 겔릭호라는 이민선을 타고 하와이로 넘어갔다. 포토샵 기술이 없었던 당시, 척박한 이국땅에서 오랜 세월 일하며 늙어간 조선 남성들은 이민 수속을 위해 찍었던 20~30년 전의 증명사진을 보냈다. 사진 신부들은 하와이 호놀룰루 항구에 도착한 이후에야 신랑이 자신의 아버지나 삼촌뻘인 늙은 남자라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돌아갈 뱃삯조차 없었던 그들은 울며 겨자 먹기로 혼인식을 올린 뒤 험난한 삶 속으로 빠져들었다.

1926년 8월13일자 〈조선일보〉의 ‘사진 결혼을 하여도 좋을까?’란 기사는, 사진으로 성격과 외모를 판단할 수 있다는 당시의 일반적인 믿음이 잘못되었다고 지적하며 사진 결혼을 통렬하게 비판한다. 배우자의 모습도 보지 못한 채 부모가 정해준 대로 강제 혼인을 해야 했던 전근대적 결혼제도는 사진 결혼과 다를 바 없다는 것이다. ‘신랑이 실제 그 사람인지’ 진위를 가리기 어려운 사진만으로 인생의 중대사를 결정하는 것은 분명히 모험이었다. 이런 위험을 무릅쓰고 조선의 수많은 여성이 사진 한 장만 보고 태평양을 건너간 이유는 무엇일까? 1913년 캘리포니아로 이주한 김석은이라는 여성은 이북 출신으로 12세에 서울의 사립기숙학교에 다닐 정도로 부유한 환경에서 자랐고 출국 당시에도 학생이었다. 그녀는 자유를 위해, 그리고 더 좋은 환경에서 공부하기 위해 스스로 미국행을 결정했다고 밝힌 바 있다.

사진보다 훨씬 더 늙은 신랑의 모습처럼

이런 선택을 한 ‘사진 신부’들의 앞날이 밝기만 했을 리 없다. 사진보다 훨씬 더 늙은 신랑의 모습처럼, 그들이 꿈꾸었던 ‘아메리칸 드림’ 또한 사탕수수 밭의 고된 노동과 가부장적인 남편의 폭언과 폭력, 가난한 삶으로 이어졌다. 이런 상황에서도 자신의 삶을 포기하지 않았던 그들의 의지 덕분에 한인 동포 사회는 미국의 주류 사회 속으로 깊이 뿌리내릴 수 있었다. 사진 신부들에게 사진 결혼은 일제 폭압의 절망적인 현실에서 벗어나 새로운 꿈을 펼칠 수 있는 유일한 탈출구였는지도 모른다. 호놀룰루 항구에 도착할 때까지 갖고 있었던 ‘젊은 신랑’의 사진은, 그들이 간직할 수 있었던 유일한 희망이었는지도 모른다. 요즘처럼 화려한 디지털 기술로 멋지게 포장할 수는 없었지만, 젊을 때 얼굴로 어떻게든 고국에 있는 여성의 환심을 사려 했던 그 사진엔 타지에서의 외로운 삶을 이겨내려던 늙은 총각들의 ‘슬픈’ 희망 또한 담겨 있었을 것이다.

기자명 김성민 (경주대학교 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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