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명윤 제공2019년 11월18일 홍콩 시위대가 인간 띠를 이어 물품을 옮기고 있다.

1년 전 홍콩 폴리텍 대학 점거 시위 현장에 있었다. 그 취재가 마지막 홍콩 취재가 될 것이란 생각은 꿈에도 하지 못했다. 그때만 해도 코로나19가 터지기 전이었다. 그날 폴리텍 대학에 어둠이 깔리기 시작할 즈음 홍콩 친구들로부터 텔레그램이 도착했다. “오늘부터 등록된 외신기자가 아니면 모두 체포한대.” “어서 외곽으로 나와. 폴리텍 대학은 봉쇄될 모양이야.”

대학 주변은 이미 고무총과 최루탄을 든 경찰이 곳곳을 막고 있었다. 출구 구실을 하는 두 곳의 길도 막혀 있었다. 겨우겨우 홍콩 역사박물관 뒷길을 통해 가방 수색을 받은 끝에 빠져나올 수 있었다. 그로부터 10여 분 뒤 폴리텍 대학 주변은 전면 봉쇄됐다. 운이 좋았다.

저녁을 먹고 나오니 이미 침사추이 쪽 나단로드는 시위대로 가득 차 있었다. 이 행렬은 4㎞ 떨어진 몽콕까지 이어졌다. 내가 머물던 숙소 앞은 시위대에 보급품을 전달하는 주요 루트였다. 80㎝쯤 되는 간격으로 청년들이 끝도 보이지 않는 긴 줄을 만들었고, 밤새도록 물건이 전해졌다. 수신호에 따라 우산, 헬멧, 생수, 의약품 그리고 시위대가 ‘불의 마법’이라 부르던 화염병이 전달됐다. 경찰은 틈만 나면 이 보급로를 끊기 위해 돌진했다. 그러면 사람들은 흩어졌다 다시 모였고, 어디서 가져오는지 모를 물품들은 다시 도착했다. 이 긴 줄의 끝이 어딘지 알 길이 없었다. 어쩌면 끝이 없었는지도 모르겠다.

과거 홍콩 시위의 방향성을 두고 평화시위대인 화리비(和理非)와 폭력시위대인 용무파(勇武派) 간에 벌어졌던 격렬한 논쟁은 없었다. 그들 모두는 화리비이기도 했고 용무파이기도 했다. 경찰과 맞붙은 전선에 사람이 없으면 출근 중인 듯한 여성이 시위대에 합류해 용무파가 되었고, 물자가 부족할 땐 용무파의 최전선에 있던 청년이 튀어나와 보급품을 날랐다. 내가 겪어본 시위 현장에서도 본 적 없는 끈질김이 이어졌다. 이 싸움은 설사 홍콩이라는 도시가 사라져도 끝나지 않을 것 같았다.

그때쯤 조슈아 웡이 메가폰을 들고 나타났다. 그가 무슨 말을 했는지는 모른다. 다만 인상적이었던 건 2014년 우산혁명 때와 달리 아무도 조슈아 웡 곁으로 모여들지 않았다는 점이다. 시위대는 그저 물자를 나르고, 보도블록을 깨고, 텔레그램을 들여다보기에 바빴다. 그는 혼자 자기 할 말을 하고는 다시 다른 곳으로 이동했다. 놀라웠다.

홍콩 시위를 ‘Leaderless’라고 하는 이유

홍콩인들은 더 이상 지도자를 필요로 하지 않았다. 홍콩 민주화 시위를 일컬어 ‘Leaderless’라고 규정한 게 무슨 뜻인지 단번에 이해할 수 있었다. 홍콩은 그들의 민주주의를 텔레그램 투표 안에서 구현했고, 그렇게 구축한 시스템을 신뢰했다. 그들은 2014년 우산혁명의 실패를 지도자에 대한 의존 탓으로 규정하고, 그들만의 민주주의를 만들어가고 있었다.

그리고 2020년 11월23일 홍콩 시위의 상징적 인물들인 조슈아 웡과 아그네스 초우, 그리고 이반 람이 수감됐다. 지도자 부재의 홍콩 시위를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이런 일이 있을 때마다 이제 홍콩의 저항은 끝난 것 같다며 호들갑을 떤다. 나는 몇 번의 시위 취재 끝에 깨달았다. 이 싸움은 누군가를 잡아 가둔다고 끝날 싸움이 아니며, 홍콩의 시위대는 위축되지 않으리란 걸. 물론 무턱대고 희망을 말할 수는 없다. 그들 앞의 거인은 너무 크고 강하다. 중요한 건 홍콩은 여전히, 생각보다 끈질기게 싸우고 있다는 점이다. 적어도 아직 끝은 아니며, 그날이 오늘은 아니다. Not Today.

기자명 환타 (여행작가·<환타지 없는 여행>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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