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P Photo1989년 5월 톈안먼 광장을 가득 메운 시위대. 이후 6월4일중국인민해방군이 이곳을 점령했다.

1989년 6월4일 톈안먼(천안문) 광장이 중국인민해방군에 의해 점령됐다. 인민을 해방시키겠다는 목적으로 인민의 자제들로 구성된 군대가 인민에게 총부리를 겨눈 사건은 중국 인민은 물론 전 세계를 충격에 빠트렸다. 1997년 중국 반환을 앞둔 홍콩으로서는 상상할 수 있는 최악의 악몽이 펼쳐졌다. 항쟁 초기인 1989년 5월1일 베이징 지역 대학생 연합체인 ‘고자련(高自聯·가오쯔롄)’은 ‘홍콩 동포에게 드리는 글’을 발표했다. 가오쯔롄은 이 시위로 중국의 민주화를 앞당기겠다며 홍콩 시민들의 지지와 성원을 당부했다. 홍콩 시민들은 톈안먼 광장의 시위대에게 홍콩 달러를 후원하며 화답했다. 홍콩에서 매년 6·4 항의집회를 조직하고 있는 전직 민주계 의원 이척얀은 당시 상황을 ‘곧 떨어질 돌을 머리에 이고 있는 것’이라고 묘사했다.

“항쟁 지도부를 홍콩으로 탈출시켜라”

무엇보다 베이징 어딘가에 숨어 있는 톈안먼 항쟁 지도부를 방치할 수 없었다. 중국 내부에서도 지도부를 구해야 한다는 공감대가 퍼졌다. 당시 홍콩이 거의 유일한 탈출구로 떠올랐다. 중국 정부는 6·4 진압 이후 항쟁 지도부 21명, 즉 ‘반혁명 책동자’들을 신고하라며 방송을 통해 대대적으로 엄포를 놓았다. 이웃끼리 감시가 일반화된 중국에서 오랜 도피는 불가능했다.

‘노랑새 작전(Operation Yellow Bird)’은 베이징의 반체제 인사들을 홍콩으로 도피시키기 위해 실행됐다. 한 명을 구출하기 위해 평균 30여 명의 협조자가 움직여야 했던 이 비밀작전은, 현재까지도 이름을 밝힐 수 없는 중국 관료, 중국과 홍콩의 활동가, 양쪽 접경에서 밀무역을 하던 스피드보트 선주와 삼합회는 물론 CIA까지 얽힌 그야말로 대규모 프로젝트였다.

얼마 전 이 작전을 수행한 삼합회 출신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다. 흔히 홍콩의 어두움을 대표하는 조폭이 왜 이 일에 개입했느냐는 질문에 그는 “그때 홍콩에 있는 사람들은 모두 같은 마음이었다”라고 말했다. 해상을 통해 홍콩으로 오기 위해서는 야마하 보트엔진 세 개를 얹은 70노트짜리 개조 보트를 사용해야 했다. 발각되면 기관총 세례를 맞기 때문에 탈출은 최대한 빠른 속도로 이루어져야 했고, 이런 배를 몰 수 있는 숙련자를 찾는 것도 큰일이었다. 수많은 이들의 노력 끝에 항쟁 지도부 21명 중 7명, 그리고 500~800명의 반체제 인사가 홍콩으로 탈출했다.

그런데 왜 하필 작전명이 ‘노랑새’였을까? 아이티의 민요 중에 노랑새라는 노래가 있다. 연인을 잃은 사람이 바나나 나무 위에 올라앉은 노랑새에게 말을 거는 내용이다. ‘넌 하늘로 날아갈 수 있어. 넌 나보다 운이 좋아. 나도 노랑새였다면 날아갈 수 있을 텐데’라는 가사가 나온다.

홍콩은 오랜 기간 중국 민주화운동을 품는 노랑새의 둥지였다. 홍콩 국가보안법으로 인해 이제 노랑새의 둥지가 파괴되고 있다. 둥지가 파괴된 지금 노랑새는 어디로 날아가야 할까? 누가 노랑새를 위해 다시 둥지를 만들어줄 수 있을까?

이 글을 쓰는 와중에 중국 정부를 강하게 비판해온 홍콩 〈빈과일보〉의 사주인 지미 라이가 구속됐다 보석으로 석방됐다. 민주화를 열망하는 홍콩의 분위기는 그 어느 때보다 무겁다. 침울하게 뉴스를 지켜보고 있는데, 평소 연락을 주고받던 홍콩의 한 활동가로부터 텔레그램 문자메시지가 왔다. “만약 네가 우리를 보러 올 수 있다면, 너를 다시 보게 된다면 무척 행복할 거야. 하지만 이제 우리는 (외국인) 친구들이 홍콩으로 와서 정부의 표적이 되는 걸 원치 않아.”

살면서 받아본 그 어떤 이별 통보보다 더 막막했다. 결국 눈물이 터졌다.

기자명 환타 (여행작가·<환타지 없는 여행>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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