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PA5월11일 스위스의 한 초등학교에서 수업이 진행 중이다.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 학생들은 절반씩 나눠 학교에 나오고 있다.

최근 스위스 언론은 1년 전에 나온 한 연방 대법원 판결 관련 기사를 뒤늦게 쏟아내고 있다. 판결을 요약하면 ‘고용주는 재택근무자에게 집세의 일부를 지급하라’는 내용이다. 1년여 전 나왔던 이 판결이 지금 주목을 받는 이유는 코로나19로 인해 재택근무 트렌드가 확산되고 있어서다. 재택근무를 독려했던 회사들과, 회사 방침 때문에 집에서 일하는 스위스의 직장인들이 이 판결에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

판결문을 통해 본 상황은 다음과 같다. 2014년 10월, A가 운영하는 금융 관련 1인 기업에서 B가 파트타임으로 일하기 시작했다. A가 사무실을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에 B는 자신이 사는 아파트에서 일을 했다. A와 B는 고용계약서에 이 같은 재택근무 상황에 대해 어떤 조항도 넣지 않았다. 구두로 합의한 내용도 없었다. 2016년 8월12일, B는 A를 상대로 밀린 임금 2만418스위스프랑(약 2600만원)을 지급하라는 소송을 냈다. 그러자 A는 이를 무효화할 것을 주장하며 근무와 관련된 물품과 자료를 돌려달라고 맞소송을 냈다. 법원은 B의 주장을 부분적으로 수용해, ‘A가 B에게 약 1만6000스위스프랑(약 2000만원)과 이에 대한 이자를 지급하라’고 판결했다.

여기까지는 흔히 볼 수 있는 체불임금 소송이다. 이 판결의 특이점은 A가 B에게 지급해야 할 밀린 임금의 액수에 ‘개인 주거지를 업무용으로 사용한 데 대한 보상’이 포함됐다는 점이다. 재판부는 그 금액을 매달 1425스위스프랑(약 180만원)으로 산정했다. 판결은 고등법원을 거쳐 스위스 연방대법원에서 지난해 4월23일 확정됐다. 재택근무자의 집세 일부를 업무 관련 비용으로 보고 고용주가 이를 지급해야 한다는 판결이 나온 건 이번이 처음이다.

판결의 근거가 된 법 조항은 스위스 채권법 327a조로, 내용은 비교적 간단하다. 1항, 고용주는 직원이 업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비용을 지급해야 한다. 2항, 급여에 업무 관련 비용을 포함할 수 있지만, 모든 비용을 댈 수 있게 충분히 지급돼야 한다. 3항, 직원이 업무 관련 비용의 전체나 일부를 내도록 하는 합의는 무효다. 이 법 조항이 제정된 것은 1911년인데, 한 세기가 지나 ‘업무수행 비용’에 재택근무자의 집세가 포함된 것이다.

직원 B가 집을 업무용으로 빌린 건 아니었다. 하지만 재판부는, 이 점은 고려 사항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B가 100% 집에서만 일했으므로 이 장소가 업무와 직접 관련이 있다고 봤다. B의 집이 업무 자료를 보관하는 용도로도 쓰였다는 점이 유리하게 작용했다. 물론 B의 집은 거주 목적의 사적 공간이기도 했지만, 집에서 업무용으로 쓰인 부분과 사적으로 쓰인 부분이 각각 얼마인지 증명할 책임은 B에게 없으며 재판부가 판단할 일이라고 명시했다.

장크트갈렌 대학 토마스 가이저 교수(노동법 전공)는 스위스 일간지 〈타게스안차이거〉와의 인터뷰에서 “노동법상 고용주는 직원이 직무를 수행하는 데 필요한 모든 비용을 지급할 의무가 있기 때문에 놀라운 판결이 아니다. 앞으로 집세 지원은 교통비 지원처럼 필수가 될 것이다”라고 말했다. 개인 차량으로 출장을 다녀올 때 연료비를 회사가 지급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설명이다. 취리히 우르슈프룽바르멧 로펌의 대표 변호사인 코리나 우르슈프룽은 블로그를 통해 “이 결정은 재택근무자의 집세뿐 아니라 인터넷 요금이나 전기 요금도 업무 관련 비용으로 간주될 여지를 줬다”라고 말했다. 그는 “이 사례는 사무실에 전혀 출근하지 않고 100% 재택근무한 흔치 않은 경우로, 전체 근무시간 중 일부만 집에서 일할 경우 집세의 어느 정도를 업무 관련 비용으로 볼지에 대해선 논의가 더 필요하다”라고 덧붙였다.

ⓒReuter3월19일 독일 베를린의 한 직장인이 코로나19로 재택근무를 하면서 자녀의 공부를 돕고 있다.

전기, 인터넷 요금도 포함될 수 있어

노동계는 판결을 환영했다. 스위스 노동조합 총연맹 사무총장 루카 치리글리아노는 〈타게스안차이거〉와 인터뷰하면서 “사무실 임대 비용을 줄이기 위해 ‘탄력 근무지’ 정책을 쓰는 기업들이 있다. 아주 불공정하게 직원들에게 비용을 전가하는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위 판결에서 주목할 점은, 재판부가 직원 B의 재택근무를 선택의 여지가 없는 필수적 상황으로 봤다는 것이다. 고용주 A가 처음부터 사무실을 제공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점이 B의 집세를 업무 관련 비용으로 판단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다. 코로나19 팬데믹 이후 현재 재택근무 중인 대다수 직장인들이 자신의 뜻과 관계없이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5월11일 두 달간 닫혔던 스위스 학교의 문이 다시 열렸지만, 취리히 교육청 소속 음악 교사인 샤론 솔다티 씨는 학교로 출근하지 않고 전처럼 집에서 줌(Zoom) 앱을 이용해 학생들을 가르친다. 스위스 연방 의회가 5월17일 발표한 ‘코로나19 조치 2단계(COVID19 Verordnung 2)’에 따른 것이다. 이 조치는 ‘65세 이상, 암·고혈압·당뇨·심혈관계 질환·만성 호흡기 질환이 있는 사람, 기타 질병으로 면역력이 떨어진 사람’을 ‘취약 그룹’으로 지정하고 출근 대신 계속 집에 머무르도록 했다. 솔다티 씨는 만성 기관지염을 앓고 있어 취약 그룹에 속하기 때문에 이를 직장에 보고하고 재택근무를 하게 됐다. 취약 그룹이 아니더라도 ‘집에서 일하는 게 가능한 사람은 누구든지 계속 재택근무를 할 것’이 연방 보건청의 권고 사항이다.

취리히에 있는 법률 컨설팅 사무소 MME의 미셸 슈투츠 변호사(고용법 전문)는 “현재 상황에서 중요한 건 재택근무가 선택이 아니라 필수라는 점이다. 선택의 여지 없이 집에서 일하게 된 직원이 업무에 필요한 물품과 서비스를 요청할 경우 고용주는 이를 반드시 지원해야 한다. 여기에는 전화, 전기, 인터넷 요금도 포함된다”라고 말했다.

순다르 피차이 구글 CEO는 5월26일 직원 전체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재택근무에 필요한 물품을 구입하도록 1000달러씩 지원하겠다”라고 말했다. 피차이 CEO는 코로나19의 상황에 따라 사무실로 출근하는 직원의 비중을 단계적으로 늘린다는 방침을 밝히면서도, “할 수 있다면 연말까지 계속 집에서 일할 것을 권장한다”라고 말했다. 구글은 팬데믹 이전에도 부분적으로 재택근무를 하는 직원들에게 인터넷 요금을 지원해왔다. 하지만 재택근무자가 비교적 많은 구글 같은 IT 기업도, 직원 대다수가 집에서 근무하게 된 현재 상황에서는 새로운 결정을 내려야 한다. 구글의 주요 복지정책 중 하나인 ‘공짜 식사’도 논란거리가 됐다. 최근 한 직원이 “출근을 못하니 무료 식사 혜택이 사라졌다. 그 혜택을 돈으로 돌려받고 싶다”라고 요청했는데, 구글 측은 “아직 그에 대해 정해진 방침이 없다”라고 답했다.

고용주만 재택근무 비용을 책임지는 건 아니다. 한국은 정부가 나섰다. 고용노동부는 지난 3월 중순 코로나19에 대응하기 위해 업무를 재택근무로 전환하는 기업에 인프라 구축 비용을 지원하겠다고 밝혔다. 중소·중견기업을 대상으로, 사업주가 투자한 인프라 구축비의 50% 범위 내에서 최대 2000만원까지 지원하는 제도다. 가상 사설망(VPN) 구입, 업무용 소프트웨어나 보안 시스템을 구입 및 임차하는 비용, 클라우드 사용료, 인터넷 통신료 등이 여기에 해당한다. 재택근무제를 도입하는 중소기업은 노동자 1인당 최대 매주 10만원까지 간접노무비도 지원받을 수 있다.

이번에 처음으로 재택근무를 경험한 사람들이 긍정적인 반응을 보이는 경우도 많다. 코로나19 팬데믹이 잦아든다 해도 기업의 근무 방식이 이전으로 쉽게 돌아가지 않으리라는 예상이 나온다. 스위스 연방 통계청에 따르면 2019년에 스위스 전체 노동자 중 완전 재택근무를 한 사람은 5%에 그쳤다. 현재는 전체의 3분의 1이 완전 재택근무를, 20%는 부분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콜럼버스 컨설팅그룹이 지난 4월 초 스위스 거주자 1000명을 대상으로 한 설문조사에 따르면, 응답자의 70%가 재택근무에 대해 ‘효과적인 옵션’이라고 답했다. 스위스 방송국 SRF의 또 다른 설문조사에 따르면 ‘코로나19 팬데믹 이후에도 (완전 또는 부분) 재택근무를 하고 싶다’는 사람이 전체 858명 응답자 중 91%를 차지했다. 북서스위스 응용과학대학(FHNW) 디지털변환센터장 마르크 페터 교수는 “재택근무를 경험해본 직원들이 계속 집에서 근무하고 싶다고 요청할 것이다. 기업 입장에선 이걸 기회로 봐야 한다. 사무실 공간이 꼭 필요한지, ‘모든 사람이 오늘 다 참석해야 하는’ 비효율적인 팀 미팅이 과연 필수적인지 되돌아봐야 한다”라고 말했다.

특별한 이유 없이 재택근무 거부 못해

유럽에서 재택근무가 가장 잘 자리 잡은 나라는 네덜란드다. 2019년 기준 약 343만명이 재택근무를 하고 있다. 네덜란드에서는 2015년 7월1일 이후 노동자가 집에서 일할 권리가 법적으로 보장됐다. 6개월 이상 고용된 노동자는 고용주에게 재택근무를 요청할 수 있으며, 고용주는 이를 ‘고려할 의무’가 있다. 물론 고용주가 거절하는 것도 가능하지만 그 경우엔 이유를 문서로 남겨야 한다. 독일은 코로나19 팬데믹을 계기로 ‘집에서 일할 권리’를 노동법에 명시하는 방안을 추진하고 있다. 독일의 재택근무 비율은 코로나19 이전에 12%였다가 현재 25%까지 늘어났다. 올라프 숄츠 재무장관은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우리는 지난 몇 주 동안 집에서 일하는 게 가능하다는 걸 알게 됐다. 이는 우리가 버려선 안 될 중요한 업적이다”라고 말했다.

재택근무가 대세라고 해서 모두가 할 수 있는 건 아니다. 바젤 대학이 스위스에서 코로나19로 인한 봉쇄조치 이후 직군별 재택근무 적합도(home office fitness)를 조사했다. 적합성은 금융, IT, 미디어 순서로 높았고, 부적합한 업종은 요식업, 숙박업, 건설업 등이었다. 도심과 지방의 차이도 나타났다. 시골 지역인 아로사에서는 재택근무를 하기가 아주 어려웠고, 취리히에선 쉬웠다. 재택근무에 더 적합한 부류는 일반적으로 교육 및 소득수준이 높고 도심에 거주하는 사람들이다. 이 같은 결론은 코로나19로 인한 복합적인 경제 여파가 사례별로 차이가 클 것을 의미한다. 정부가 경제적 지원 방침을 정할 때 고려해야 할 부분이다.

기자명 취리히·김진경 (자유기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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