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기회다 - 행복한 방구석 ⑤ 음악

권용선 수유너머104 연구원은 올해 베토벤 탄생 250주년을 맞아 어렴풋하게만 알았던 베토벤 음악의 세계에 빠져들 수 있는 길을 소개한다. 우리 시대의 기술은 이미 문화와 예술을 독점과 소비의 영역에만 가두는 것이 불가능하며, 여러 실황 공연들도 동영상 사이트를 통해 무료로 관람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코로나19는 우리의 ‘교양’을 더욱 다채롭게 할 기회인지도 모른다.

 

 

베토벤은 10대 후반에 이미 유럽에서 주목받는 음악가였지만, 그를 절망에 빠뜨린 불안한 사건도 끊이지 않았다.

‘잠시 멈춤’과 ‘사회적 거리두기’를 충실히 따르는 선량한 시민의 시간, 우연히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를 읽다가 베토벤의 ‘템페스트’를 들었고, 올해가 베토벤 탄생 250주년이라는 사실이 떠올랐다. 바이러스 소동만 아니었다면 훌륭한 공연들을 현장에서 들어볼 수도 있었을 텐데. 하지만 우리에겐 유튜브가 있다! 공연장을 잃은 연주자들이 자발적으로 업로드한 연주 영상과 그동안 시간에 쫓겨 제대로 즐길 수 없었던 훌륭한 음원들을 찾아 들으며 충만한 즐거움을 만끽했다. 그 시간 속에서 내가 보고 듣고 느꼈던 것들을 아래에 공유한다.

1. Prelude(전주곡):템페스트

“태양이, 웅덩이와 늪지와 낮은 땅에서 빨아올린 모든 독소가, 프로스페로 위로 쏟아져서, 속속들이 병투성이로 만들어다오!”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 2막 1장, 자신의 섬에 난파당한 이방인의 노예 신세로 전락한 칼리반의 저주. 그의 바람과는 달리, 태풍이 불러 모은 과거의 악연을 용서하고 그들과 화해했을 때, 프로스페로에게는 재산과 권력의 회복이라는 선물이 기다리고 있었다. 장대한 음악이 울려 퍼지고, 서로에 대한 따뜻한 사랑의 기운을 느끼며 연극은 막을 내린다. 저주는 무기력하다. 하지만 사랑과 화해는 배를 타고 온 문명인들의 사연일 뿐, 그 섬의 원주민인 칼리반과 요정들 그리고 본래 그곳에 있던 어떤 생명과도 무관한 일이었다. 어쩌면 칼리반의 저주가 긴 시간을 견딘 후 지금 비로소 우리 앞에 도착해버린 것은 아닐까? 교양과 매너를 가르친 대가로 당당하게 섬을 훔친 프로스페로가 칼리반을 노예로 부렸던 것처럼, 자연을 개발하고 야만을 문명화한다는 저 오래된 착취의 전통이 비문명의 세계 전체를 고통받게 했을 때, 칼리반의 저주는 조금씩 바이러스의 신체를 만들어가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op.31-2와 마주한 그 시대 연주자들은 당황했다. 작품을 어떻게 이해하고, 어떤 식으로 연주해야 할지 질문을 쏟아내는 사람들을 향해 그는 이렇게 말했다. “나의 특별한 유머는 셰익스피어의 〈템페스트〉에 이미 다 있다. 상황의 빠른 전환, 숭고함과 그로테스크함, 엄격한 형식과 아포리즘의 밀접한 병렬. 이 이상 더 알 것은 없다!” 동시대인들에게 ‘음악계의 셰익스피어’로 통한 베토벤은 자신의 피아노 소나타에도 ‘템페스트’라는 이름을 붙였다.

이 영상(www.youtube.com/watch?v=-Fnaejv4lQc)은 루돌프 부흐빈더의 연주다. 코로나19가 아니었다면, 올해 통영국제음악제에서 우리는 그의 연주를 직접 들어볼 수 있었을 것이다.

2. Symphony(교향곡):시민적 예술가의 희망과 혁명

베토벤은 우리에게 친근하다. 클래식 음악과 제법 거리감을 느끼는 사람들에게도 그의 이름과 몇몇 작품은 귀에 익숙하다. 교향곡 5번 ‘운명’과 바가텔 25번 A단조 ‘엘리제를 위하여’는 클래식 음악의 일반명사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1770년 독일 본에서 태어난 루트비히 판 베토벤은 자식을 모차르트처럼 만들고 싶었던 아버지의 욕망과 본인의 노력에 힘입어 10대 후반에 이미 유럽에서 주목받는 피아노 연주자가 되었고, 하이든을 사사하며 20대 초반부터 본격적인 작곡 활동을 시작했다. 하지만 하이든과 모차르트를 잇는 음악계의 유망주로서 받은 기대와 애정의 크기만큼 그를 절망에 빠뜨린 불운한 사건들도 끊이지 않았다. 작곡가로서 치명적인 청력 문제는 일생의 두통거리였고, 조카를 사이에 두고 제수와의 분쟁도 쉽게 해결되지 않았으며, 항상 실패하는 연애 때문에 의기소침했다. 하지만 그가 한순간도 음악을 떠난 적은 없었다.

1789년 프랑스에서 혁명이 일어났을 때, 그는 심장이 뜨거운 열아홉 살 젊은이였다. 공화국을 향한 열정과 앙시앵레짐에 대한 증오가 그의 가슴에 타올랐고, 정치적 격랑 끝에 등장한 나폴레옹에게 열광했다. 그는 교향곡 3번 ‘영웅’을 나폴레옹 보나파르트에게 헌정할 계획이었지만, 널리 알려진 바와 같이 그가 황제에 등극하자 곡의 표제가 쓰여 있는 악보의 첫 장을 찢어버리기도 했다. 하지만 이러한 일화는 베토벤의 영웅 숭배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단지 한 영웅적 인물을 통해 혁명의 이념과 공화주의적 가치가 구현되기를 절실히 바랐을 뿐이다. 그에게는 공화국의 시민으로 사는 것, 낡은 시대의 권력자들에게 머리를 조아리지 않아도 되는 자유로운 예술가가 되는 것이 중요했기 때문이다. 훗날 자신의 후원자인 루돌프 대공에게 보낸 편지에서도 그는 이렇게 말했다. “모든 위대한 창조와 마찬가지로 예술의 진정한 목적은 자유와 진보입니다.”

3월13일 서울시향은 코로나19로 힘겨워하는 이들을 응원하기 위해 온라인 연주회를 진행했다. 연주회 레퍼토리로 베토벤의 교향곡 3번 ‘영웅’을 선택하면서 시민 모두를 ‘영웅’으로 호명했다(www.youtube.com/watch?v=dgJ2xRuKQk0). 그리고 단원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성사된 온라인 라이브 공연이 스트리밍 서비스를 시작했을 때, 그것을 각자의 공간에서 감상했던 사람들은 음악이 주는 익숙한 감동 외에도 음악을 듣는 하나의 방식, 나아가 예술을 향유하는 익숙한 방식에 결정적인 균열이 생겼음을 느낄 수 있었다. 바이러스 소동이 없었더라면, 우리는 쾌적한 공연장에서 예정된 연주회를 감상하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것은 클래식 음악에 익숙한 애호가들, 적어도 영화 티켓보다는 비싼 공연 티켓을 갈등 없이 구매할 지불능력이 있는 소수 소비자만을 위한 일이었을 것이다.

우리 시대의 기술은 이미 문화와 예술을 독점과 소비의 영역에만 가두는 것이 불가능하다고 말한다. 세계 유명 박물관과 교육기관들은 자신들이 소유한 예술작품을 디지털 아카이빙해서 인터넷 사이트에 접속하는 누구에게나 무료로 개방한다. 저작권이 작동하지 않는 언어예술 작품들은 PDF나 텍스트 파일로 언제든지 다운로드해서 읽을 수 있고, 레코딩되지 않은 실황 공연들도 동영상 사이트를 통해 무료 관람하는 것이 가능해졌다. 기술과 지식과 예술은 이제 서로가 서로를 공유하고 향유하도록 촉발한다. 이제 문제는 어떻게 예술 의지를 촉발하고 예술작품과 감응할 수 있을까 하는 데에 있는 것처럼 보인다.

우리 모두 부동산 자산가가 되거나 비행기를 타고 유럽의 오페라극장을 순회할 수는 없지만, 그러한 욕망에 스스로 거리를 두면서도 자신의 영혼을 돌보는 일에 진지해질 수는 있다. 겨울 아침, 6411번 버스 첫차를 타고 일터로 출근하는 노동자가 FM 라디오 방송 앱으로 슈만의 피아노곡을 듣고, 편의점 알바생은 마야 안젤루가 생전에 자신의 시를 녹음한 육성 레코딩을 오픈컬처 사이트에서 무료로 접하고, 누군가는 망루 위의 고독을 암스테르담 박물관 사이트에 올라와 있는 렘브란트의 그림과 감응적 소통을 하면서 이겨내는 것이 더 이상 낯설지만은 않은 시대가 된 것이다. 예술과 문화를 소유하고 점유하는 모든 폐쇄적인 구태의연함을 지우는 것, 그것들을 공유하고 향유하여 예술과 관련된 의지의 용법을 바꾸는 것. 출발은 아주 작은 틈새를 상상하는 것으로도 충분하다.

3. Intermission(휴식 시간):마스크! 마스크! 마스크!

우리의 봄이 마스크와 함께 지나가고 있다. 겨울이 끝나갈 무렵부터 지금까지 마스크 없이는 누구도 집 밖을 나설 수 없었고, 누군가는 집 안에서도 마스크를 벗을 수 없었다. 사람들은 마스크를 구하기 위해 긴 줄을 서거나 전전긍긍해야 했다. 이제 그것은 생필품이 되어버렸다.

자신들의 의지에 반해 ‘공연장을 잃은’ 연주자들은 바이러스 시대의 정언명령인 ‘사회적 거리두기’에 동참하면서도 연주자로서의 활동을 포기하지 않았다. 무관중 온라인 스트리밍의 형태로, 때로는 마스크를 쓰고 연주했고 청중은 같은 방식으로 음악과 만났다.

이탈리아에서 가장 많은 감염자와 사망자가 나왔을 때, 사람들은 슬퍼했지만 절망하지는 않았다. 인적이 끊긴 베니스의 수로가 맑아지자 곤돌라 대신 백조가 자리 잡았고, 돌고래가 돌아왔다. 봉쇄된 도시의 아파트 발코니에는 노래로 서로에게 안부를 전하는 사람들로 잠깐씩 흥겨움이 돋아났다. 언제나 그래왔듯 그들에게는 음악이 위로이자 희망을 붙잡는 한 방식이었다. 이탈리아가 자랑하는 작곡가 중 한 명인 몬테베르디의 ‘님프의 애도(Lamento della ninfa).’ 가수들의 경건한 목소리가 마스크를 뚫고 오래된 성당의 천장에 가닿을 때, 우리도 함께 기도하는 마음이 된다(www.youtube.com/watch?v =d9bIV6Ls6JY).

코로나19가 한국에서 정점을 향해 달려가고 있을 무렵. 대부분의 연주회는 취소되고, 클래식 애호가들의 발길이 사라진 공연장 문은 굳게 닫혔다. 그 위험하고 불편한 시기에 멀리서 비행기를 타고 와 용감하게 공연장 문을 열어젖힌 연주자가 있었다. 미국의 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 그녀는 단지, 고통받는 사람들에게 위로의 말을 건네고 싶었을 뿐이라고 했다. 한 젊은 연주자의 용기가 사람들을 조심스럽게 공연장으로 불러 모았고, 마스크를 쓴 연주자가 열정적으로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op.57-23번 ‘열정’을 연주했을 때, 마스크를 쓴 청중은 감동의 전율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www.youtube.com/watch?v=91mMarUOSmo). 그날, 마스크를 사이에 두고 그들은 함께 눈물을 흘렸다.

ⓒ오푸스피아니스트 발렌티나 리시차는 3월22일 한국을방문해 마스크를 쓰고연주했다.

음악이란 무엇인가. 음악은 무엇을 할 수 있나. 음악은 하나의 시공간을 공유하는 방식으로만 존재한다는 우리의 편견을 깨준 사람들, 적어도 음악이 존재하기 위해 악보에 적힌 음악의 언어를 소리로 재현할 때, 장소는 중요한 것이 아님을 알게 해준 사람들이 있다. 그들은 각자 집에서 각자의 악기들로 하나의 곡을 동시에 연주하며 그것을 듣는 사람들에게 놀라운 감동을 선물했다.

3월29일 유튜브에 올라온 프랑스 국립오케스트라 단원들의 연주를 음미해보자(www.youtube.com/watch?v=Sj4pE_bgRQI). 코로나19에 지친 이들을 위로하기 위해 단원들은 각자 집에서 같은 시간에 라벨의 ‘볼레로’를 합주한다. 이 영상은 음악을 만드는 것이 감응의 공동체임을 잘 드러낸다. 각자의 방식으로 소리의 공명을 만들어내고 악기와 목소리의 특이성을 충분히 드러내면서도 하나의 리듬 안에서 그들은 감응을 주고받으며 미디어 바깥의 청중에게 그것을 전파한다.

마스크와 사회적 격리는 바이러스의 확산과 전파를 막아주지만, 음향과 선율 리듬이 만들어내는 감응의 전파는 막을 수 없다. 우리가 어디에 있든, 음악은 아득히 먼 곳으로부터 달려올 수 있다. 첨단 미디어기술을 선용한 사례다.

3월29일 프랑스 국립오케스트라 단원들은 각자 집에서 동시에 라벨의 ‘볼레로’를 연주했다.

4. Finale(마무리)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기를”

혁명 혹은 공화주의에 관한 베토벤의 시민적 열정은 교향곡 3번을 둘러싼 에피소드에만 머물지 않았다. 그에게는 자신이 투신한 예술의 한 영역에서 일관되게 유지했던 태도로서의 혁명이 자리 잡고 있다. 베토벤은 장르의 문법에 안주하며 음악의 세계에서 자신이 누리던 권력의 위치에 안주하지 않았다. 그는 끊임없이 자신을 몰아붙이고 안정된 위치를 불안해했으며, 무엇보다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바를 최대치로 표현하는 데에만 집중했다. 그래서 그의 곡들은 결국 장르의 문법과 자기 시대의 일반적 관념을 초과하고 흘러넘치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밖에 없었다. 특히 말년으로 갈수록 이런 경향은 더욱 강해졌다. 아도르노의 표현을 빌려 ‘말년의 양식’이라고 하는 것의 정체는 단지 기법과 스타일의 파격을 넘어서 그 자신이 마주치는 세계를 향한 비타협의 정신을 근거로 하지 않고서는 만들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이 때문에 그의 곡들은 자주 연주자와 청중을 곤란하거나 불편하게 했지만, 아무도 그것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말년의 베토벤은 교향곡 9번 ‘합창’과 ‘미사솔렘니스’를 제외하고 오로지 다섯 개의 현악 4중주곡을 작곡하는 데 몰두했다. 거칠게 말해서, 이전까지 그의 작품이 ‘있어야 할 세계’의 모습을 여백 없이 꽉 채워 보여주고자 했다면, 이 시기의 작품은 “화해할 수 없는 세계와의 화해를 종용하여 행복의 체험과 불만을 품는 인간 존재의 복잡한 진실”(마틴 게크)을 드러내고자 했다. 베토벤은 자신이 이전에 만든 작품들과 스스로 낯설어졌고, 청중은 그가 만들어낸 새로운 세계에 낯설어했다. 후기 현악 4중주를 들은 누군가 “당신이 듣기에도 이 작품들은 음악이 아니죠?”라고 질문하자, 베토벤은 “이 곡들은 당신을 위해 쓴 것이 아니오. 후대를 위해 쓴 것이오”라고 응수했다(www.youtube.com/watch?v=tSvPl0PBRvo).

베토벤 생애 최후의 작품인 현악 4중주 135번 F장조. 4개의 짧은 악장으로 구성된 이 작품에서 악기들은 빠르게 대화를 주고받거나 천천히 독백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기악적 ‘레치타티보(오페라에서 대사를 말하듯이 노래하는 것)’이다. 마지막 악장의 악보에 그는 ‘어려운 결정! 그래야 할까? 그래야 한다!’라는 말을 적어놓기도 했다. 심오한 내면의 풍경을 토로한 것일 수도, 번잡한 일상의 파편을 적어놓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지닌 무게와는 상관없이 삶이란 항상 무엇인가를 선택하는 결정의 연속이며 그 결정들이 모여서 한 생애가 완성되어 간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삶의 말년에 이르러 그것이 그려낸 궤적을 되돌아볼 수 있는 용기를 내는 것 자체가 ‘어려운 결정’인지도 모른다.

‘미사솔렘니스’의 악보.

그리고 장엄한 미사곡인 ‘미사솔렘니스’. 베토벤은 ‘미사솔렘니스’에 대한 편애를 숨기지 않았다. 그는 이 곡을 자신의 작품 중에서 가장 높은 성취도를 보여주는, 가장 성공적인 작품이라고 자평했다. 전통적인 미사곡의 진행 순서를 바르게 따르고 있는 이 곡은 얼핏 후기 작품 중에서는 예외적으로 어떤 형식의 파격도 시도하지 않았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작품 전체를 파고드는 압도적인 장엄함은 신에 대한 경배가 아니라 그가 만들었던 어떤 교향곡 이상으로 인간적인 것의 발산이다. 가수들의 입에서 흘러나오는 기도의 언어를 제외하고 순수하게 기악적 멜로디에만 집중할 때 그것은 더욱 확연해진다. 젊은 시절, 왕족들을 향해 모자를 벗어 절하는 괴테의 모습을 용서할 수 없었던 그의 시민적 예술가로서의 자긍심은 끝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그는 환하고 빛나는 것들을 향해 절하지 않았다. 그래서 ‘미사솔렘니스’가 완성되기까지 그는 작품의 서른 배 가까운 스케치를 남기며 갈등해야 했던 것인지도 모른다(www.youtube.com/watch?v=lI0jSQCGUrY).

미사곡 첫머리에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해지기를’이라는 문구를 적어넣으며 베토벤은 어떤 마음을 상상했을까. 상투스 악장의 베네딕투스, 독창과 중창 그리고 합창이 높은 음의 바이올린 솔로를 배경으로 지속되는 동안, 밝고 빛나는 곳에 속한 자들의 환한 미소에 가려 그림자로만 존재하는 사람들의 모습이 보인다. 때로는 가장 위험한 순간에 가장 먼저 죽음으로 내몰리는 사람들의 절망과 희망이 복잡하게 교차하는 마음에 응답하는 어떤 마음도 거기 있다. 베토벤의 음악을 혁명이라고 부를 수 있다면, 그것은 일차적으로 그가 만들어낸 음악의 세계에 속한 문법의 혁명 때문이지만, 더 깊은 곳에서 그의 음악이 자기 시대에는 아직 없었고 지금도 여전히 도착하지 않은 어떤 삶들에 관한 희망으로 존재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한순간, “마치 별처럼, 희망은 하늘에서 땅으로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라는 괴테의 저 아름다운 문장이 베토벤이 만들어내는 음악의 언어로 바뀌는 순간을 경험하게 된다.

기자명 권용선 (수유너머104 연구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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