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이 기회다 - 행복한 방구석 ⑯ 다시 듣는 음악  (디스토피아 음악)

 

 

핑크 플로이드는 ‘Money’를 통해 자본주의 디스토피아를 노래했다.

‘디스토피아’라고 한번 발설해보라. 아무래도 부정적인 뉘앙스가 먼저 풍김을 부인할 수 없다. “세계는 멸망했고, 희망은 사라졌다. 인류의 소수만이 살아남아….” 영화나 소설 등의 텍스트를 통해 만날 수 있는 이유는 다양하다. 소행성이 지구와 충돌했을 수도 있고, 환경 변화로 인해 지구의 절반이 물에 잠겼을 수도 있다. 어쨌거나, 희망은 사라졌다. 그 희망, 대체 어디에서 찾아야겠는가 말이다.

희망은 역대급으로 간절해진다. 당연하다. 희망이 가장 간절할 때, 그건 바로 희망이 전혀 보이지 않을 때일 테니까. 기실, 디스토피아는 이미 곳곳에서 번식 중에 있다. 아니, 번성 중이다. 코로나 사태 이전에도 디스토피아는 널려 있었다. “큰돈이 더 큰돈을 낳는” 자본주의의 어두운 측면이다. 지금도 누군가는 한 끼 식사조차 해결하지 못해 눈물을 흘리고, 거리를 조금만 둘러보면 노숙자가 여럿 보인다. 아프리카에서는 기아와 내전으로 인해 셀 수 없는 아이가 죽어나간다. 그들에게 디스토피아는 이미 강림한 현실이다.

나 역시 디스토피아를 매일같이 목격한다. 스마트폰으로든 컴퓨터로든 관심 있는 기사를 본 뒤에 반사적으로 스크롤을 맨 밑으로 내린다. 장소는 무관하다. 유튜브든, 포털 사이트든 분위기는 대개 엇비슷하다. 어느 쪽이 더 추악한가 올림픽이라도 연 건가 싶을 정도다. 혐오 표현이 경쟁하듯 빽빽하게 덮여 있는 댓글 창. 최소한의 윤리를 가로지르는 근본적인 경계를 넘어버렸다고 통보해주는 세포 따위 현미경으로 이 잡을 듯 찾아봐도 보이질 않는다. 여기가 디스토피아가 아니라면 대체 뭐겠나.

혐오는 마치 이 시대의 정언명령처럼 보인다. 조롱과 멸시가 구석구석까지 퍼져 있다. 이를테면 혐오는 디폴트값이나 마찬가지다. 혐오하지 않는 자, 댓글 창에서 기거하기가 어려울 정도다. 궁금했다. 이게 우리나라만의 현실인지 아닌지. 그래서 어느 날 작정하고 외국 유튜브와 이런저런 사이트를 쭉 둘러봤다. 언어만 달랐을 뿐 거기에는 동일한 풍경이 펼쳐져 있었다. 과연 그렇다. 우리는 혐오가 곧 시대정신인 현재를 통과하고 있다. 영화 제목 그대로 ‘아포칼립스 나우’다.

이런 이유에서 예술가라는 집단 중 대부분은 일찍부터 인류의 미래를 비관했다. 음악계를 한번 살펴볼까. 가장 먼저 떠오르는 작품은 핑크 플로이드의 1973년 음반 〈Dark Side of the Moon〉이다. 벌써 제목부터가 ‘다크 사이드’ 아닌가. 수록곡 중 ‘Money’ 정도만 들어봐도 핑크 플로이드가 묘사한 자본주의 디스토피아를 체감할 수 있다. 돈과 물질로 유토피아를 사려 했지만 결국 인류가 건설한 꼴은 정신과 영혼이 거세된 디스토피아다. 가사를 통해 한번 보라.

“돈이여 돌아와/ 나는 괜찮아 친구/ 그런데 내 돈에서 손 떼/ 돈은 마약과도 같지/ 달콤한 헛소리 따위 필요 없어/ 차라리 나는 하이파이 퍼스트 클래스로 여행을 하지.”

이 외에도 디스토피아를 다룬 음악은 여럿이다. 두 앨범 정도를 적어둔다.

앨런 파슨스 프로젝트 〈I Robot〉(1977)

SF의 거장 아이작 아시모프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삼아 기획된 앨범. 과학 만능주의가 빚어낸 인간성의 상실을 파헤친 작품으로 타이틀곡인 ‘I Robot’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하나의 콘셉트로 기획되었다. 앨범 커버 안쪽을 보면 기획 의도를 직접 적은 다음 문장을 볼 수 있다. “인간이 몰락하고, 기계가 주인이 된 이야기. 역설적이게도 인간이 기계에 숨결을 불어넣은 바로 그 순간 종말은 다가온 것에 다름 아니었다. 인간이 자신의 형상을 본떠서 로봇을 만들었기 때문이었다.” ‘I Robot’ 외에 로봇이 인간을 향해 “너처럼 되고 싶지는 않아”라고 노래하는 ‘I Wouldn’t Want To Be Like You’가 앨범의 주제를 압축해서 대변한다. 윌 스미스가 주연한 2004년의 동명 영화 역시 아이작 아시모프의 소설을 기반으로 제작된 것이다.

라디오헤드 〈OK Computer〉(1997)

“전율을 불러오는 아트 록 걸작이 도래했다. 라디오헤드는 이 앨범으로 전작인 〈The Bends〉(1995)를 성층권으로 날려버렸다.” 음악 매거진 〈롤링스톤〉의 평론가 마크 켐프의 이와 같은 격찬을 굳이 떠올리지 않더라도 1997년 이 음반이 발표될 당시의 광경을 음악 팬이라면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끊이지 않고 이어졌던 상찬의 퍼레이드. 1997년뿐 아니라 1990년대, 더 나아가 대중음악 역사를 통틀어서 거론되는 명반이 태어나는 순간이었다.

세기말에 가까워지고 있던 당시 〈OK Computer〉는 비단 제목만이 아니라 음악과 가사 측면 모두에서 디스토피아적 세계관의 어떤 정점이었다. 인간성이 빠져나간 일렉트로닉 사운드를 비틀어 착종한 ‘Subterranean Homesick Alien’, 내면으로 함몰되고 또 함몰되어 마침내는 텅 빈 얼굴의 블랙홀을 완성하는 ‘No Surprises’와 ‘Let Down’ 정도만 들어봐도 이 음반이 그려내는 미래가 긍정보다는 부정 쪽에 위치해 있음을 감지할 수 있다. 하긴, 유토피아를 꿈꾸다 어긋난 욕망으로 인해 디스토피아를 창조했다는 주제를 라디오헤드만큼 심도 깊게 다룰 수 있는 밴드는 없다고 봐야 한다. 대히트한 ‘Paranoid Android’에 그들이 표현하고자 했던 바가 다 들어 있다.


디스토피아는 지금도 인기다. 얼마 전 BBC는 ‘다크 팝’이라는 용어를 제시하면서 ‘팝은 왜 점점 더 우울해지는가’라는 타이틀로 분석 기사를 내놓았다. 대표적인 사례가 바로 그래미를 석권한 빌리 아일리시다. 그의 음악을 들어보라. 어둡고, 음울하다. 습기가 꽉 찬 검은 방에 홀려 덩그러니 남겨진 느낌을 준다. 이뿐만이 아니다. 요즘 인기 있는 많은 래퍼들이 과거 블랙 메탈 밴드가 노래한 디스토피아를 동경하면서 그들의 음악을 자신의 창작 풀로 이용한다. 이렇게 현 시대의 팝은 BBC의 정의처럼 “디스토피아를 향해 나아가고 있다”.

일종의 반작용이 아닐까 싶다. 틱톡과 인스타그램이 지배하는 세상을 보라. 온통 밝거나 화려하다. 부정이라고는 없다. 하지만 그게 세상의 전부가 아님을, 아니 오히려 가짜 세상인 걸 인간은 본능적으로 알고 있다. 다만, 차가운 진실을 회피하기 위해 오늘도 틱톡에 접속하고, 인스타그램 앱 버튼을 누른다. 환상을 갈구한다. 그 이면에 자리하고 있는 건 도무지 이겨낼 길 없는 우울이다. 황폐해진 정신적 디스토피아다.

인류는 헤어날 길 없는 우울과 슬픔을 달래주는 깜찍한 물건들을 지속적으로 개발해왔다. 누군가는 인형을 사고, 누군가는 피규어에서 위안을 찾는다. 틱톡과 인스타그램은 디스토피아가 서려 있는 현 세대를 위한 항우울제다. 그리고 여기, 역사적으로 가장 오래된 항우울제가 하나 있다. 바로 음악이다. 음악이야말로 디스토피아 시대의 우울증을 조금이라도 극복해줄 수 있는 묘약임에 분명하다. 뒤에서 읽을 수 있는 콜드플레이 관련 글 중 일부를 먼저 당겨서 써본다.

“다큐멘터리 ‘소리와 음악 사이’를 보면 음악은 인간으로 산다는 게 어떤 의미인지에 대해 중요한 것을 배우게 해준다고 한다. 그리하여 서로를 이해하고, 진정으로 함께한다는 느낌을 준다고 한다. 놀랍게도 음악을 들으면 서로에게 더 친절하게 대한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디스토피아의 시대에 콜드플레이는 “음악이야말로 미래의 무기야”라고 ‘Arabesque’에서 노래한다. 과연 그럴 수 있을까. 희망 없는 세상에서 자그마한 희망, 건져낼 수 있을까.

글쎄, 확언할 수는 없지만 아무래도 그렇다. 음악이 세계를 구원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 대신 다음 문장을 나는 믿는다. “음악은 온 세상을 구하려 할 때보다 상심한 한 가슴을 치유하려 할 때 더 의미심장해지는 법이다.”(밥 스탠리)
 

 

 

 

기자명 배순탁 (음악평론가∙<배철수의 음악캠프>작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