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광준 교수가 아버지를 기억하는 방법
  • 정희상 기자
  • 호수 654
  • 승인 2020.04.03 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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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정보부의 고문으로 숨진 최종길 교수의 아들 최광준 교수는 ‘81+’를 제안한다. 권위주의 시절 희생자 80여 명을 기억하자는 의미다. 그 아픔을 기억하는 게 자신의 사명이라고 여긴다.
ⓒ시사IN 윤무영최광준 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 교수(위)는 최종길 교수가 사망할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1973년 10월25일 중앙정보부(중정) 김치열 차장이 ‘유럽 간첩단 사건’을 발표했다. 서울대 법대 최종길 교수가 중정 남산 청사에서 조사받던 중 간첩 혐의를 시인한 뒤 투신자살했다는 내용이었다. 중정은 최 교수가 투신했다는 현장을 공개하지 않았다. 고문에 의한 타살 의혹이 일었다. 두 달 전인 그해 8월, 도쿄에서 김대중 납치 사건을 일으킨 중정은 궁지에 몰려 있었다. 중정이 간첩단 사건을 조작할 것이라는 예상이 많았다.

최 교수는 그 무렵 미국 하버드 대학 옌칭 연구소에서 1년, 독일 훔볼트 재단에서 6개월 동안 교환교수를 끝내고 서울대 법대 교수로 돌아왔다. 중정은 ‘유럽 간첩단 사건’에 최 교수를 포함해 유럽 유학이나 출장을 다녀온 학자와 공무원들을 엮었다. 중정은 이들이 북한 공작원과 접촉해 간첩 활동을 벌였다고 발표했다.

충남 공주에서 태어난 최종길 교수는 서울대 법대, 스위스 취리히 대학, 독일 쾰른 대학에서 공부한 뒤 1962년 서울대 법대 강의를 시작했다. 사망 당시 42세이던 최 교수는 부인과 아들, 딸을 두고 있었다. 아들 최광준 교수(경희대 법학전문대학원)는 당시 초등학교 3학년이었다. “아버지께 5·16 쿠데타 뒤 박정희 측에서 ‘혁명정부에서 같이 일해보자’는 제의가 들어왔다. 아버지는 군사정부에 협력하기를 극구 거부하셨다. 그때부터 미움을 샀다는 말도 나돌았다. 그렇다고 아버지가 유신체제 반대 투사는 아니었다. 제자를 사랑하는 학자였을 뿐이다.”

최종길 교수는 1967년부터 서울대 도서관장과 학생과장 등의 보직을 맡으면서 바쁜 나날을 보냈다. “어머니랑 도시락을 들고 서울대 법대 교정으로 찾아가야 아버지 얼굴을 볼 수 있을 만큼 바쁘셨다. 아버지가 가족과 함께 미국·독일에 초빙교수로 가서 연구 활동을 하던 1970년대 초반이 가장 행복했다. 그 시절 아버지는 사진을 취미로 하셔서 여동생과 나를 위한 앨범을 따로 만들어주었다. 마치 돌아가실 걸 아셨던 것처럼 사진을 섬세하게 잘 정리해두셨다.”

최 교수가 중정에서 조사를 받기 직전인 10월4일 서울대 문리대 학생들이 학내에서 경찰에게 집단 구타를 당하며 끌려가는 일이 발생했다. 최 교수는 이날 교수회의에서 “학생들의 수난을 모른 체해서는 안 되니 부당한 공권력의 최고 수장인 박정희 대통령에게 총장을 보내 항의하고 사과를 받아야 한다”라고 주장했다.

이런 최 교수를 상대로 중정은 간첩 조작 사건을 준비하고 있었다. 당시 중정에는 최종길 교수의 동생 최종선씨가 근무하고 있었다. 최종선은 동료한테서 “유럽 간첩단 사건 수사를 벌이고 있는데 수사팀이 북한 공작원 이재원과 중학교 동창생인 최 교수에 대해 관심을 갖고 있는 것 같다”라는 얘기를 들었다. 최종선은 형에게 중정에서 수사 협조 요청이 있을 것이라고 알려주었다. 10월16일 중정은 동생 최종선을 통해 최종길 교수를 남산 조사실로 불러들였다. 사흘 뒤인 10월19일 새벽 1시30분께 최 교수는 중정 조사실 건물 밖에서 양복 차림으로 머리에 피를 흘린 채 시신으로 발견되었다. 중정은 동생 최종선에게도 비보를 알리지 않았다.

장례 치르자 약속 어긴 중앙정보부

중정은 유족을 회유 협박했다. 최종길 교수가 간첩 사건에 연루됐다는 사실을 공개하지 않을 테니 잠자코 있어달라고 했다. 보상금도 제시했다. 유족은 중정의 보상금 제의를 거절하고, 대신 최종길 교수를 억울하게 간첩으로 만들지 말 것, 자녀들의 교육에 지장이 없도록 할 것, 동생 최종선을 계속 근무하도록 할 것 등 3가지를 요구했다. 중정은 이 3가지 요구를 들어주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유족이 장례를 치르자 중정은 약속을 어겼다.

중정의 유럽 간첩단 사건 발표 뒤 동생 최종선은 연세대학교 세브란스병원 정신병동에 위장 입원했다. 그는 중정 감시를 피해 형의 죽음과 관련한 수기를 썼다. 이 기록을 그는 함세웅 신부에게 넘기고 훗날 때가 오면 공개해달라고 부탁했다.

최종길 교수의 집은 중정 직원이 상주하며 감시했다. 국내 언론은 침묵했지만 외신기자들이 찾아왔다. “〈워싱턴포스트〉 돈 오버도퍼 기자가 아버지의 사인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직접 우리 집까지 찾아왔지만 중정이 만나지 못하게 했다. 어머니는 그걸 평생 한으로 생각하셨다.”

ⓒ시사IN 포토2003년 10월17일 서울대 최종길교수기념홀에서 30주기 추모식이 열렸다.함세웅 신부, 최광준 교수, 백경자씨(왼쪽부터).

최 교수가 사망한 지 1년이 되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주도로 명동성당에서 추모 미사가 예정되어 있었다. 중정은 유족을 찾아와 참석하지 말라고 했다. “어머니는 중정의 눈을 피하기 위해 우리 남매 손을 붙잡고 명동 근처 미도파·신세계 등 백화점을 종일 배회하셨다. 쇼핑하는 척하다가 간신히 미행을 따돌리고 명동성당으로 달려갔다. 그날 추모 미사가 아버지 사건에 대해 우리 가족이 공식적으로 진상규명에 나선 시작점이었다.”

부인 백경자씨는 아들 최광준을 해외로 내보내 남편의 억울한 죽음을 알려야겠다고 마음먹었다. 최종길 교수와 함께 수학한 독일과 미국의 법학자들이 보인 관심과 위로가 계기였다. 최 교수의 박사학위 지도교수였던 독일 게르하르트 케겔 교수와 동료 법학자들은 가족에게 독일로 건너와서 진상규명에 나서라고 제안했다. 중정 감시 체제 아래서는 도저히 불가능한 일이었다. “아버지의 독일 친구 분들이 아들만이라도 보내면 돌봐주면서 진상규명을 돕겠다고 했다. 어머니는 어떻게든 나를 조기유학 형식으로 독일로 내보내려 했지만 그것도 가로막혔다.”

또 최종길 교수가 옌칭 연구소 교환교수 시절 그를 지도했던 미국 하버드 대학 제롬 코언 교수와 에드윈 라이샤워 교수(훗날 주일 미국 대사 역임)도 최 교수의 억울한 죽음을 애통해했다. “코언 교수와 라이샤워 교수는 아버지의 연구 능력과 성실성을 높이 샀다. 그들이 우리 가족에게 관심을 기울이며 돕겠다는 편지를 보냈지만 중정이 방해해서 뜻을 이루지 못했다.”

1979년 10·26 사건으로 박정희 체제가 무너지자, 최종길 교수의 지인들한테 억울함을 풀 기회가 왔다는 전화가 쇄도했다. “1980년 서울의 봄을 맞아 서울대생들은 우리 집으로 찾아와 진상규명에 힘을 보태겠다고 약속했다. 당시 대부분의 서울대생들이 아버지 사건에 대해 잘 몰랐다고 해서 놀랐다.” 하지만 전두환 신군부의 쿠데타로 이런 바람도 물거품이 되었다. 이때 유족은 해외 망명도 생각했다. 백경자씨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최광준과 함께 주한 독일 대사를 만났다. “독일 대사는 망명을 하면 전두환 당국의 주목과 견제를 받게 돼 가족이 더욱 힘든 생활을 하게 될 가능성이 크다며 만류했다. 대신 내 유학을 권유했다.”

고문으로 숨지자 투신자살로 위장

우여곡절 끝에 1984년 최광준은 20년 전 아버지가 걸었던 길을 뒤따라 독일로 유학을 떠났다. 최광준은 독일에서 아버지의 은사와 동료 학자들 도움으로 법학박사 학위 과정을 밟았다. 1987년 6월 항쟁 뒤 최종길 교수 사건도 수면 위로 떠올랐다.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 소속 함세웅 신부는 1988년 최종길 교수 사건의 공소시효 만료를 앞두고 최종선의 수기를 공개했다. 함 신부 등은 “최종길 교수의 죽음은 고문 수사 과정에서 빚어진 폭압적 권력에 의한 살인이라는 확신을 갖게 되었다”라며 검찰에 고발장을 냈다. 노태우 정부의 검찰은 무성의하게 수사를 진행했다. 당시 검찰은 “최종길 교수가 간첩이라는 증거도, 투신자살했다는 증거도 찾지 못했다”라는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최광준은 독일에서 법학박사 학위를 받고 귀국해 1994년 경희대학교 법대 교수로 부임했다. 최 교수는 아버지의 억울한 죽음을 쫓으면서 인권법 전문가가 되었다. 우선 아버지 사건을 포함해 권위주의 시대 의문사를 조사하는 일에 관심을 기울였다. 2002년 대통령 소속 의문사진상규명위원회(의문사위)가 최종길 교수 사건 조사에 착수했다. 의문사위 조사 결과 중정 수사관들은 최 교수에게 잠 안 재우기, 구타, 각목을 무릎에 끼워 발로 밟기 등 고문을 가한 것으로 드러났다. 최 교수를 직접 조사했던 당시 중정 수사관은 차철권씨였다. 의문사위는 중정 수사관들을 조사해 고문 수법과 간첩 조작 사실을 밝혀냈다. 의문사위는 고문 과정에서 최 교수가 숨졌고, 이후 투신자살로 위장했다고 발표했다. 의문사위 조사로 유럽 간첩단 사건 자체도 조작임이 드러났다. 당시 중정의 최종길 교수 수사 책임자는 의문사위 조사에서 “최 교수를 간첩으로 만들면 그 시절에는 아무도 의심하거나 항의할 수 없었기에 고문치사를 은폐하기 위한 방법으로 이를 선택했다”라고 실토했다.

의문사위 조사 과정을 도운 최광준 교수는 사건 당시 서울에 파견돼 있었던 도널드 그레그 CIA 국장과 안흥용 중정 공작과장의 진술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말했다. “내가 도널드 그레그 CIA 국장에게 편지를 보냈다. 그는 당시 미국은 간첩 사건과 무관한 서울대 최종길 교수가 고문 과정에서 죽었다는 사실을 알고 중정에 강력히 경고했지만, 이미 엎질러진 물이라서 막을 수 없었다는 요지로 서면 답변서를 보내주었다. 안흥용 중정 공작과장은 의문사위 조사에서 부하들이 고문하다 아버지를 죽인 뒤 창밖으로 던져버렸다는 사실을 털어놓았다.”

의문사위 조사로 최종길 교수의 죽음은 타살이라고 국가기관에서 공식 인정했다. 아버지를 따라 법학자의 길을 걷는 최광준 교수는 새로운 사명감을 얻었다고 말한다. “법학 분야가 일본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선진 학문으로 거듭나야 한다는 사명으로 사셨던 아버지가 40대 초반에 반인륜적 국가폭력으로 잔인하게 비명횡사하셨다. 아버지를 그렇게 만든 유산은 지금도 우리나라 곳곳에 아픔으로 남아 있다. 그 아픔을 기억하고 치유하라는 게 아버지가 내게 남겨주신 사명이라고 생각한다.”

최 교수는 독일이 나치 만행을 반성하고 기억하는 ‘기억의 문화’라는 키워드에서 착안해 ‘81+’를 제안했다. 81+는 국가폭력에 희생되고도 진상을 밝혀내지 못한 이름 없는 수많은 이들을 상징하는 기호다. “의문사위 조사 과정에서 1970~80년대 권위주의 정권 시절 아버지와 같은 희생자가 80여 명이었다. 여기에 1을 붙여 그보다 플러스가 되는, 그것이 우리나라 국가폭력 비극의 역사라는 의미다. 이런 비극으로 사망한 분들이 있다는 걸 기억하는 게 중요하다는 거다.” 그 희생자 한 사람 한 사람을 다 기억해야 한다는 게 최 교수의 생각이다. 코로나19가 기승을 부리는 와중에도 최 교수는 최근 독일 통일의 주역 헬무트 콜 전 수상의 아들 발트 콜을 만났다. 발트 콜은 최광준 교수의 뜻을 숭고하게 여겨 그가 베를린에서 운영하는 전시관 이름을 ‘RAUM 81+’로 명명해주었다. 이 전시관에서는 지난 2월 한 달 동안 ‘1980 광주 5·18’ 사진전이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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