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 강남역 살인사건 이후 많은 여성들이 이전과 같을 수 없었다. 대학원에서 통·번역을 공부하는 이민경씨 역시 마찬가지였다. 사건 자체가 준 충격도 컸지만, 이씨를 가장 슬프게 한 건 자신을 비롯해 많은 여성들이 각자의 자리에서 벌이고 있는 ‘각개전투’였다. “과 후배가 ‘남자친구에게 혼났다’고 말했다. 왜 그러느냐고 물었더니 남자친구가 강남역 살인사건을 놓고 ‘여성혐오라고 과도한 일반화를 하면 안 된다’ ‘극단적이고 감정적이다’라며 훈계를 했다더라.” 이씨 역시 친구로부터 “남자도 남자한테 살해당한다. 남자도 부당한 일을 겪는다는 걸 알아달라”는 말을 들은 후 하루 동안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나였을 수도 있는’ 사건으로 인해 두려움과 우울을 견디고 있는 동료 시민에 대한 반응이 겨우 이거라면 정말 최악이라고 생각했다.

끝내 남성을 감싸려는 여성들을 보면서 안쓰러운 마음도 들었다. “남자라서 잘 모르겠지” 같은 말들이 대표적이었다. “그래도 내 남자친구는 내 말을 이해해줬어” 하고 안도하는 친구를 보면서도 답답했다. “나도 예전 같았으면 ‘그 남자 훌륭하다, 꼭 잡아라’고 했을 거다. 그런데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왜 여성들에게는 친절하게 설명하는 것밖에 선택지가 없을까? 이 사건만으로도 충분히 힘든데 남성을 설득하고 설명하고 배려하고 이해해줘야 하더라. 왜 남자들은 알려고 노력하지 않지?”

ⓒ시사IN 조남진여성주의 정보생산자조합 페미디아 안에 출판팀이 꾸려졌다. 왼쪽부터 가람, 정혜윤, 이민경, 이두루, 마이크, 우유니게씨. 이들은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을 펴냈다.

전단이라도 만들어 뿌리고 싶었다. 원치 않는 대화는 애초에 끊어내자고, 논쟁할 때는 기존 흐름을 바꾸는 말로 유리한 위치를 선점할 수 있다고, 기꺼이 대답해주고 싶은 사람을 만나면 적절하고 멋진 대답으로 같이 성장하는 기회를 만들자고 말하고 싶었다. “엉성한 매뉴얼이나마 절실한 시점이라고 생각했다.”

출판은 이씨 혼자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하지만 이씨에게는 ‘여성주의 정보생산자조합 페미디아’라는 비빌 언덕이 있었다. 그 안에는 출판편집자도 있고, 디자이너·마케터도 있었다. ‘책을 만들고 싶다’는 이씨의 제안이 나오자 페미디아 안에 출판팀이 금세 꾸려졌다. ‘페미니즘 기초 회화 입문서’라는 콘셉트를 잡고 〈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입이 트이는 페미니즘〉이라는 제목도 붙였다. 디자인을 맡은 우유니게씨가 책 제목을 따 ‘입트페몬’이라는 캐릭터를 만들었다. 관련 굿즈(상품)도 기획했다.

책의 편집과 교열을 담당한 이두루씨는 “대화를 거부할 수 있다는 내용이 중요하게 다뤄진다”라고 말했다. 모든 대화가 평화로울 수는 없다. ‘잘 몰라서’ ‘시간 없어서’ 같은 말로 대화를 피하는 게 아니라 단호하게 ‘시비를 걸려는 너와는 이야기하고 싶지 않다’고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의미다. 여성을 위한 실용서로 쓰였지만, 마케팅을 담당한 정혜윤씨는 이 책이 남성에게도 도움이 된다고 말했다. “남자들이 할 수 있는 ‘뻘소리’가 거의 다 들어 있다. 남자들도 꼭 읽었으면 좋겠다. ‘이런 말은 하면 안 되는 구나’ 하는 걸 알 수 있는 좋은 기회다(웃음).”

몇 명이나 이 책을 원할지 가늠할 수 없었다. 500부가량 찍을 생각으로 제작비를 알아봤더니 200만원 정도였다. 시장조사 겸 크라우드 펀딩 플랫폼 텀블벅에 올려봤다. 3주라는 짧은 기간에 2500여 명이 펀딩에 참여해 4000만원가량을 모아줬다. “이제 저도 뒷목 잡지 않고 말 잘하는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는 건가요” 같은 반응이 뒤따랐다. 그만큼 많은 여성들이 오랜 세월 비슷한 상황을 ‘견디고’ 있었던 셈이다.

여성의, 여성에 의한, 여성을 위한 게임 개발

페미디아도 그런 ‘답답한’ 토양 속에서 싹을 틔웠다. 여성 각자가 자신의 자리에서 느낀 좌절과 절박함이 모여 페미디아가 되었다. 지난 4월에 시작할 때만 해도 팀블로그 정도로 가볍게 생각했다. 20대 총선 전날인 4월12일 진달래씨가 페이스북에 올린 글이 발단이었다. “여성에 관한 외신을 번역하고, 여성주의 연구를 소개하는 웹서비스를 만드는 데 관심이 있으신 분 있나요?” 예상과 달리 빠른 속도로 댓글이 달렸다. 30명 정도의 자발적 지원자를 모아보니 하는 일과 각자 가진 재능의 면면이 다양했다. 페미니즘 전반을 다루는 무언가를 만들 수도 있겠다 싶었다. 진씨와 가람씨, 마이크씨까지 세 사람이 공동 설립자로 나서며 본격적으로 추진하기 시작했다.

페미디아 출판팀이 펴낸 150쪽 분량의 소책자(위)는 3주 만에 4000만원가량 펀딩을 받았다. 정식 출판도 논의 중이다.

약 한 달 만인 5월9일 ‘페미디아(femidea)’라는 이름으로 여성주의 온라인 매체를 창간했다. 이들은 창간사에 “모든 준비를 마치고 시작하지 않은 것은 미약하나마 벌써 할 수 있는 일과 해야 하는 일들이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라고 적었다. 페미디아는 여성주의적 사고(Feminist Idea)의 줄임말이다. 이름을 정하기까지 여러 아이디어가 오갔다. “꼴페미, 페미스북, 오늘만 사는 페미, 페권연대, 페경련(페미니스트 경제인연합회의 줄임말로 전경련의 패러디) 등 각종 ‘드립’ 끝에 굉장히 다행스러운 이름이 나왔다(가람).”

8월에는 정식으로 창립총회를 열고 협동조합의 꼴을 갖출 계획이다. 이미 예비 조합원 100여 명이 모였다. ‘페미니즘 재벌이 되자’고 우스갯소리를 하지만, 각자 직업을 갖고 있는 탓에 페미디아만 전담할 수 있는 인력이 없다는 게 가장 큰 어려움이다. 일단 페미디아 도메인 계약 기간인 3년은 어떻게든 버텨보고 싶다. 운영비를 제외한 나머지 수익을 조합원에게 최대한 분배하려 한다. 통신판매업 신고를 하고 시범 삼아 페미디아 조합원들이 디자인한 스티커와 엽서를 온라인과 서울국제여성영화제 기간에 판매했다. 반응이 좋았다. 이들이 미는 문구가 있다. ‘페미니즘은 돈이 된다.’ 장기적으로는 발생하는 수익금을 다른 단체에도 기부하려고 한다. 현재도 수익금의 일부를 한국여성민우회 등에 보내고 있다.

조합 출범과 함께 현재 개발 중인 게임도 공개할 예정이다. 게임 개발은 기존의 게임에 대한 불만에서 시작됐다. “즐기는 게임 중에 〈위쳐 3:와일드 헌트〉가 있는데, 남자 캐릭터가 여자를 후리고 다니는 스토리가 나온다(웃음). 재밌게 하면서도 짜증이 나는 거다(마이크).” 지난해 2월 미국의 10대 소녀 두 명이 만든 ‘탐폰런’을 모델 삼았다. 탐폰런은 생리를 불결하고 나쁘다고 생각하는 ‘생리 혐오자’들을 향해 총알 대신 ‘탐폰’을 쏘는 게임이다.

페미디아 조합원들은 페미디아에 합류하면서 비로소 ‘페밍아웃(자신이 페미니스트임을 알리는 것)’을 하게 됐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총여학생회장을 하면서도 페미니스트라고 말하기 어려워했던 정혜윤씨가 그랬고, 강남역 사건을 보며 블랙홀 같은 우울에 빠져 허우적대던 우유니게씨가 그랬다.

“말씨를 예쁘게 쓰면 ‘내 편’이 되어주겠다는 것, 이상하지 않습니까. 나와 입장을 같이할 생각이 없으면서 내 말씨 때문에 동의해주지 않는 거라고 말하는 것은 비겁한 짓입니다. 옳음에 대한 자신의 입장을 정하는 일마저 남의 탓으로 돌리는 것이니까요. 싫다는 사람을 굳이 데리고 가려고 힘쓰지 않아도, 원해서 함께 선 사람들만으로도 세상은 조금씩 변해갈 겁니다(〈우리에겐 언어가 필요하다〉).” 이 책은 정식 출판도 논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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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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