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이명익

코로나19는 한국에 ‘위대한 세대’를 탄생시킬까. 좀 낯선 질문이다. 맥락을 보려면 미국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미국에는 ‘가장 위대한 세대(Greatest Generation)’라는 영광스러운 이름으로 불리는 세대가 있다. 1901~1927년 태생이다. 이 세대는 청년기에 대공황과 2차 세계대전을 이겨냈고, 1950년대에는 미국 역사상 최전성기를 이끌었다.

사회학자 로버트 퍼트넘은 ‘사회적 자본’ 개념을 널리 알린 〈나 홀로 볼링〉을 썼다. 이 책은 미국 사회의 질이 왜 갈수록 나빠지는지, 사회적 자본이 왜 갈수록 쪼그라드는지 추적했다. 답은 의외였다. 사회적 자본을 유난히 풍부하게 가졌던 윗세대가 퇴장했기 때문이다. 그게 전쟁을 겪은 세대, 그러니까 위대한 세대였다(퍼트넘은 1910~1940년생까지로 좀 더 넓게 잡는다). 이 세대는 후속 세대보다 공적 토론에 더 관심이 많고, 더 많이 투표하고, 시민적 결사와 공공업무에 더 많이 참여하고, 다른 사람을 더 많이 돕고, 동료 시민들을 더 신뢰한다. 한마디로 더 나은 시민이다.

위대한 세대는 가장 가혹한 전쟁의 자식들이었다. 외부의 적은 내부의 응집력을 극적으로 높이므로, 때로 전쟁은 더 나은 시민을 만드는 용광로다. 퍼트넘은 방대한 데이터를 검토한 후, 결론으로 이렇게 쓴다. “1945년(2차 세계대전이 끝난 해다)에 절정에 달했던 국가 통합의 시대정신과 전시(戰時)에 불붙은 애국심이 시민정신을 강화했을 것이다.” 그 힘은 이 세대가 살아 있는 내내 사라지지 않을 만큼 오래갔다. 이들이 주도한 시대에 미국은 최전성기를 달렸다.

ⓒAP Photo1945년 8월14일 제2차 세계대전 종전을 축하하는 뉴욕의 인파 속에서 한 수병이 키스하고 있다

코로나19 방역전은 낮은 강도의 전시상태와 비슷한 경험을 모든 국민이 공유하도록 만든다. 이 경험은 한국에서도 더 나은 시민들의 세대, 그러니까 ‘위대한 세대’를 탄생시킬까. 〈시사IN〉과 KBS는 공동으로 코로나 시대 사회조사를 기획하면서 결국 이 문제를 다루고 싶었다. 그렇다면 물어봐야 할 주제는 정해져 있었다. ‘신뢰’다. 사회적 자본을 구성하는 핵심 중 하나가 신뢰다. 기획 단계이던 4월28일, 사회학자 장덕진 교수(서울대)와 통화했다. 우리가 신뢰를 다룰 생각이라고 하자, 그는 곧바로 이렇게 답했다. “아이템 잘 잡았네요. 그게 요즘 사회학계에서도 최대 화두예요. 코로나19 이후 한국 사회의 신뢰도가 어떻게, 왜 움직이나.” 5월1일, 서울대 사회학과에서 임동균 교수가 합류했다.

〈시사IN〉·KBS 공동기획 사회조사는 한국리서치의 웹조사 방식을 이용해 228개 문항을 사용하는 방대한 조사다. 크게 두 가지 질문이 떠올랐다. 첫째, 지금까지의 방역전을 성공으로 이끈 원동력은 무엇이었나. 그 결과를 지난주 〈시사IN〉 제663호에서 소개했다. 둘째, 그 경험은 우리를 어떻게 바꾸었나. 신뢰도의 폭발적인 상승은 여러 사회조사에서 되풀이해 확인되고 있다. 그런데 그게 정확히 어떤 의미인가. 우리가 바뀐 것은 무엇이고 그대로인 것은 무엇인가. 그 변화는 한국 사회를 어디로 끌고 갈까. 이번 호의 주제다.

장덕진 교수가 “신뢰”를 듣자마자 “요즘 사회학계의 최대 화두”라고 말한 이유는, 신뢰도 수치가 폭발적으로 움직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신뢰는 그 사회가 얼마나 건강하고 유능한지를 결정하는 핵심 요소다. 신뢰가 낮으면 같은 일을 할 때도 더 많은 계약과 보증서와 변호사와 치안 능력이 필요하다. 이게 다 비용이다. 그래서 한 사회의 신뢰수준은 그 사회의 보이지 않는 재산, 즉 사회적 자본을 구성하는 핵심 요소다. 한국은 대표적인 저신뢰 사회로 알려져 있다. 공적인 제도 신뢰는 대체로 낮다. 이번 기획과 별개로 〈시사IN〉이 창간 이후 매년 시행해온 신뢰도 조사에서, 각 정부기관 신뢰도는 10점 만점에서 대체로 4점대를 꾸준히 맴돈다. 2019년 조사에서 가장 높은 신뢰 점수를 받은 국세청이 4.7점이었다. 사적 사회 영역에서, 가족 신뢰는 강한 반면 낯선 사람에 대한 신뢰는 낮다. 저신뢰 사회의 전형적 특징이다.

좋은 사회는 많은 사람들이 참여해서 좋은 공공재를 만드는 일을 잘 해낸다. 그런데 신뢰수준이 낮으면 이게 안 된다. 특히 낯선 사람을 못 믿으면 문제가 된다. 저신뢰 사회는 공동의 프로젝트를 해내기에 더 무능한 사회다. 코로나19를 겪으며 한국의 신뢰수준이 높아지고 있다는 얘기는, 그러니까 ‘한국이 저신뢰 사회를 탈피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으로 이어진다. 만약 그렇다면 코로나19는 한국 사회를 질적으로 도약시키는 기회가 될 수 있다.

〈표 1〉은 대통령, 정부, 국회 등 공적 시스템에 대한 신뢰도를 10점 만점으로 물은 결과다. 대통령과 정부 신뢰도는 과거 데이터와 비교해 크게 올랐다. 대통령 신뢰도 6.2점과 정부 신뢰도 6.1점은 각종 신뢰도 조사에서 거의 등장한 적이 없을 만큼 높다. 과거 조사 대비 50% 가까운 폭등이다. 미묘하지만 의미심장한 변화는 국회 신뢰도다. 응답자들은 대체로 국회를 싫어하기 때문에, “국회를 신뢰하게 되었는지 불신하게 되었는지” 물어보면 불신한다는 답이 훨씬 높게 나온다. 지난 호에 소개한 ‘신뢰 변화 지수’에서 국회가 -33점이 나온 이유다. 하지만 10점 만점으로 물어본 뒤 과거의 같은 질문과 비교해보면 결과가 다르다. 국회 신뢰도 3.8점은 2016년 조사(3.0점) 대비 27% 상승한 결과다.

〈표 2〉는 더 놀라운 결과를 보여준다. 주요 복지제도 신뢰도가 일제히 높게 나온다. 건강보험 신뢰도는 무려 88%에 이른다. 건강보험제도의 위력을 코로나19 국면에서 실제로 경험해서 그럴 수도 있다. 그런데 코로나19와 직접 관련되지 않는 다른 복지제도들도 신뢰도가 매우 높다. 고용보험 신뢰도는 78%, 기초노령연금 신뢰도는 72%, 이번에 일시 도입된 재난지원금 신뢰도는 73%였다. 심지어는 급속한 노령화 때문에 젊은 가입자들이 가장 불안해하는 국민연금조차 67%가 신뢰한다고 답했다. 세대별로 보면, 가장 신뢰도가 낮은 20대에서 56%가 국민연금을 신뢰한다고 답했다. 과거 조사에서 찾아보기 어려운 수준이다.

‘U자 곡선’의 덫 빠져나오는 중일까

코로나19 국면은 특정한 제도가 아니라, 공적 시스템 전반의 신뢰도를 끌어올리는 것 같다. 이것은 중요한 변화다. 장덕진 교수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공적제도 신뢰가 ‘U’자 모양 곡선을 그리는 경향이 있다고 설명했다. 권위주의 시절에는 다른 정보가 없어서 정부를 신뢰하는 수밖에 도리가 없다. 그래서 국제 비교를 해보면 권위주의 저개발 독재국가의 정부 신뢰가 꽤 높게 나온다. 그러다가 민주화가 진전되고 투명성이 높아지면, 그때부터는 다른 정보와 의견에 노출되면서 공적제도 신뢰가 추락한다.

한국은 민주화가 진전된 1980년대 후반부터 이 고비를 겪었다. 장 교수의 설명이다. “이 U자 곡선의 가운데에 걸린 시기가 되게 힘들어요. 정부가 뭘 하려 해도 신뢰가 없어서 일이 안 굴러가니까. 그렇다고 권위주의로 돌아갈 수는 없으니, 이 시기를 견디면서 투명성과 민주주의 수준을 더 높여서 U자의 오른쪽 꼭대기로 가야 하거든요. 이런 반등 계기가 한국에서는 거의 안 보이고 신뢰가 지속적으로 낮은 구간에 걸려 있었는데, 코로나19 유행 이후 나오는 조사들에서 정부 신뢰가 전반적으로 높아지는 경향이 보입니다. 이건 굉장히 드문 일이고, 신뢰가 반등하는 계기가 될지 지켜봐야겠죠.”

공적제도 신뢰만 놓고 보면, 우리는 U자 곡선의 덫을 마침내 빠져나와 오른쪽 꼭대기를 오르는 중일지 모른다. 하지만 신뢰에는 또 다른 중요한 속성이 있다. 다른 사람들을 얼마나 믿을 수 있는가로 나타나는 사회적 신뢰다. 이건 왜 중요한가? 다른 사람들 없이 온전히 혼자 살아갈 수 있는 사람은 없다. 하지만 우리는 다른 사람들이 내 뒤통수를 치지 않을 것이라고 어떻게 안심할 수 있을까? 유력한 수단은 국가의 강제력이다. 법이 제대로 집행되면 타인에게 속을 걱정은 덜 해도 된다.

하지만 자녀의 학교 일일교사 당번이나 눈 오는 골목 쓸기와 같은 일상적이고 삶 내내 반복되는 약속마저 변호사와 경찰을 대동해야 한다면, 타인을 신뢰하기 위한 비용이 너무 높아져서 신뢰 자체가 의미 없는 지경에 이른다. 공적제도로 이 문제를 해결하는 데는 한계가 있다. 이탈리아의 사회학자 디에고 감베타는 “신뢰를 유지하는 데 무력에 의존하는 사회는 다른 수단으로 신뢰를 유지하는 사회보다 비효율적인 동시에 불쾌하다”라고 지적했다. 사회적 신뢰는, 변호사와 경찰 없이도 사회가 굴러가도록 만들어주므로 비용을 크게 낮춰준다.

그리고 이 논리에서 보듯, 사회적 신뢰와 공적제도는 어느 정도 서로를 대체해주는 경향도 있다. 사회적 신뢰가 높으면 사람들끼리 자율적으로 문제를 푸는 걸 더 좋아하고, 정부가 끼어들어서 제도와 규칙을 만들려 드는 걸 더 꺼린다. 사회적 신뢰가 부족할 때는, 정부가 규칙을 만들어서 집행하는 게 더 깔끔하고 억울할 일이 없게 느껴진다. 한국에서 사회문제가 발생할 때마다 정부 대책을 요구하는 목소리가 높은 데는 이런 이유도 있다. 낮은 사회 신뢰를 예측 가능한 공적제도로 바꿔 끼우는 시도다.

한국의 사회적 신뢰도 공적제도 신뢰처럼 증가했을까? 그런 것 같지는 않다. 여기서는 가족 신뢰는 강고하고, 낯선 사람 신뢰는 부족한 기존 경향이 그대로 이어진다. 10점 만점으로 물어본 낯선 사람 신뢰도는 3.9점이다. 가족(8.7점), 친척(7.3점), 이웃 사람(6.1점)은 물론이고 외국인 노동자(4.0점)보다도 낮다. “코로나19 이후 낯선 사람을 신뢰하게 되었나, 불신하게 되었나?”로 변화를 직접 물어본 문항도 있다. “신뢰하게 되었다”는 4%, “불신하게 되었다”는 40%이다.

감염병은 연대와 협력의 의지를 북돋는다는 점에서 전쟁과 닮았지만, 같은 국민이라도 낯선 사람을 의심하고 두려워하고 배척하게 만든다는 점에서 전쟁과 다르다. 임동균 교수는 감염병 특유의 상황을 이렇게 표현했다. “사람들이 목표를 기꺼이 공유하고 있다. 그런데 그걸 함께 추구하는 사람들이 서로에게 위협이다.” 각 집단에 대한 호감도를 물은 뒤, 2018년 한국종합사회조사(KGSS)와 비교해보았다. 2018년 대비 호감도가 떨어진 그룹은 넷이었다. 떨어진 폭이 큰 순서대로 보면 동성애자, 낯선 사람, 정치적 의견이 다른 사람, 이민자 순서였다. 감염병이 더 밀어낸 사람들이다.  

사회적 자본 연구자들은 긴밀하고 자주 보는 사이의 신뢰와, 낯설고 다시 만날 일 없는 타인과의 신뢰를 구분한다. 로버트 퍼트넘은 전자를 ‘두터운 신뢰’, 후자를 ‘얇은 신뢰’라고 불렀다. 그리고 후자가 사회적 자본에 더 결정적이다. “얇은 신뢰는 두터운 신뢰보다 훨씬 더 유용하다. 우리가 개인적으로 알 수 있는 사람들의 범위를 넘어 신뢰의 반경을 확장하기 때문이다.” ‘두터운 신뢰’는 일종의 접착제다. 내부 결속을 다지고 강한 동류의식을 끌어올린다. ‘얇은 신뢰’는 일종의 윤활유다. ‘우리’와 ‘저들’ 사이의 마찰을 줄이고 연결을 더 매끄럽게 만들어, 결국 ‘우리’ 자체를 확장한다. 코로나19는 한국 사회에서 접착제 노릇을 톡톡히 했다. 하지만 윤활유 구실은 사실상 하지 않았다. 동성애자나 낯선 사람에 대해서는 더 냉담해졌다. 이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우리는 위대한 세대를 만들어가는 동료 시민인가, 그저 방역 성공에 열광하는 관중인가.

방대한 문항들 사이에서 이리저리 헤매던 임동균 교수가 흥미로운 단서 하나를 포착했다. 복지 철학에 대한 사람들의 태도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우리는 이를 물어보는 질문 세 개를 던졌다.

1. 고소득자와 저소득자 간 소득 차이를 줄이는 것은 정부의 책임이다.

2. 정부는 실업자도 생활수준을 유지할 수 있게 해주어야 한다.

3. 정부는 가난한 사람에게 주는 혜택을 줄이면 안 된다.

각각의 문항은 ‘매우 반대’부터 ‘매우 찬성’까지 5점 척도로 답하도록 되어 있다. 응답 평균을 점수로 환산해보았다. 셋 다 엇비슷하게 3.4~3.5점 정도가 나왔다. 보통보다 약간 찬성에 기운 수준이다. 그런데 이게 과거와 비교해 어떻게 바뀐 것일까?  

우리는 앞에서 복지제도에 대한 신뢰가 하늘을 찌르는 것을 이미 확인했다. 따라서 직관적으로 떠오르는 설명은 이렇다. 코로나19 국면에서 복지제도가 좋은 것이라는 효능감을 사람들이 맛봤다. 따라서 복지 태도를 묻는 질문에는 복지를 지지하는 성향이 높아졌을 터이다. 정말일까. 2018년 한국중앙연구원 조사에서 같은 문항들을 뽑아 비교해봤다. 그 결과가 〈표 3〉이다. 예측은 완전히 빗나갔다. 복지를 찬성하는 취지의 세 문장에, 일관되게 동의 정도가 낮아졌다. 특히 1번 문항에 낙폭이 컸다. 2018년에 3.89점이었는데 이번 조사에서는 3.54점으로 떨어졌다.

대통령 지지층이 더 권위적

복지제도 신뢰는 대단히 높은데 복지에 찬성하는 태도는 떨어졌다. 이 모순되어 보이는 결과를 설명할 방법이 필요했다. 효능감을 느껴서 복지제도 신뢰가 올랐다는 설명 말고 어떤 대안이 가능할까. “어쩌면 ‘시스템 정당화 심리’일 수도 있겠네요.” 임 교수가 말했다. “그게 뭡니까?” “현재의 제도와 시스템이 문제가 없고, 제대로 작동하고 있다고 정당화하는 식으로 마음이 작동하는 겁니다. 시스템에 외부 위협이 닥쳐올 때 이 스위치가 켜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위기 국면에서는 정치 지도자의 지지율이 오른다. 내부의 모순과 갈등을 일단 제쳐두고, 똘똘 뭉쳐서 위기를 극복하는 게 먼저라는 식으로 우리 마음이 흘러가기 때문이다. 비슷한 논리로, 위기는 현재 시스템의 모순과 하자를 일단 제쳐놓도록 만든다. 일단은 지금 있는 시스템으로 위기를 뛰어넘어야 하니까 그렇다. ‘시스템 정당화 심리’가 켜지면, 공적제도가 잘 작동하고 있다는 믿음이 강화된다. 국가 자부심도 높아진다. 반면 시스템을 더 낫게 만들고자 하는 욕구는 줄어들고 현상 유지 성향이 강해진다. 정당화하는 것이다. 이런 마음 상태라면 복지제도는 신뢰하면서 복지 강화에는 시큰둥한 조합이 가능하다.

우리 조사에서는 시스템 정당화 성향을 측정한 문항이 없어서 이 가설을 직접 검증할 수는 없었다. 하지만 간접적으로 징후를 살펴볼 수는 있다. “권위주의 성향이 전반적으로 올라갔어요. 권위주의 측정 문항 7개에서 모두 상승세가 잡힙니다.” 임동균 교수가 말했다. 권위주의 성향을 측정할 때 쓴 문항은 아래와 같다. 7점 척도로 답을 받았다.

1. 우리나라를 망쳐놓고 있는 극단주의를 제압할 강력한 지도자가 필요하다.

2. 정부 권력에 비판적인 사람들은 국민들을 쓸데없이 혼란스럽게 만들 뿐이다.

3. 사회 혼란을 일으키는 사람들과 싸워 나라를 옳은 길로 되돌려놓기 위해서라면 무력 사용도 정당화될 수 있다.

4. 우리나라에 진정으로 필요한 것은 폭넓은 인권 보장이 아니라 좀 더 강력한 법질서이다.

5. 권위에 대한 순종과 존경은 우리 아이들이 배워야 할 가장 중요한 덕목이다.

6. 우리의 가치관과 법질서를 보존하기 위해서는 사회의 문제 집단들을 강력히 척결해야 한다.

7. 우리나라에 가장 필요한 것은 국가 지도층의 인도에 잘 따르는 질서정연한 국민들이다.

이 결과를 2016년 KGSS 조사와 비교했다. 권위주의 성향이 모든 문항에서 약간이라도 상승했다. 변화를 잘 보여주는 네 문항만 추려서 그린 결과가 〈표 4〉이다.

지난 호에서 우리는, 한국의 방역 성공이 권위주의 성향과 무관하다는 결론을 도출했다. 권위주의 성향은 방역 참여를 결정하지 않았다. 방역 참여를 결정한 변수는 민주적 시민성과 수평적 개인주의였다. 하지만 코로나19 방역전을 거친 후, 한국인들은 좀 더 권위주의적으로 이동하는 징후가 포착됐다. 이 둘은 다른 얘기다. 임 교수는 “‘다시 태어나도 한국에서 태어나고 싶다’ 문항이나 ‘나는 대한민국 국민임이 자랑스럽다’ 문항에 동의하는 사람들일수록 권위주의 성향이 높게 나타납니다”라고 분석했다. 국가 자부심의 상승이 권위주의 성향 상승과 연계되어 있을 가능성이 있다는 얘기다. 우리는 수평적이고 민주적인 시민들 덕에 방역에 성공했지만, 성공의 결과 우리는 더 수직적이고 권위 지향적인 사람들이 될지 모른다.

이제 우리는 드러난 현상을 설명하는 두 가지 경로를 손에 쥐었다. ‘효능감’으로 출발하는 길과 ‘시스템 정당화’로 출발하는 길이다. 먼저 효능감으로 출발해보자. 우리는 방역전에서 제대로 잘 작동하는 공적제도를 보았다. 세계 선진국들과의 비교로 이게 확인됐다. 따라서 국가 자부심과 공적제도 신뢰가 올랐고, 특히 코로나19 국면에서 위력을 발휘한 건강보험제도가 나머지 복지제도의 신뢰까지 끌어올렸다. 효능감을 느낀 시민들은 더 자신감을 갖고 공적제도를 업그레이드해 더 큰 효능감을 맛보려 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정치에 더 참여하려 할 것이고, 정치 효능감도 더 크게 느낄 것이다.

이 설명을 뒷받침할 만한 데이터로 정치 효능감 응답을 살펴보자. 정치 효능감을 묻는 질문은 모두 네 개인데, 모든 질문에서 정치 효능감이 올랐다. “나 같은 사람은 정부가 하는 일에 어떤 영향도 주기 어렵다”라는 문장에, 응답자들은 5점 만점에서 3.25점을 기록했다. 이건 2014년 KGSS 조사의 3.49점보다 낮아진 것이다. 즉, 정부가 하는 일에 내가 영향을 끼칠 수 있다고 더 많이 생각한다. 나머지 세 문항도 추세는 일관된다.

이제 반대쪽 경로, ‘시스템 정당화’로 설명하는 길을 따라가보자. 위기 국면에서 사람들은 갖고 있던 불만을 접어두고 현재 시스템을 지지하도록 결집했다. 그 결과로 국가 자부심과 공적제도 신뢰가 올랐고 복지제도 신뢰도 따라서 올랐다. 하지만 현재 시스템이 정당하다고 믿기 때문에 복지를 요구하는 강도는 줄어들었다. 수직적 성향, 권위주의적 성향도 함께 올랐다. 이건 위기 국면에서 지도자를 중심으로 결집할 때 드러나는 전형적인 반응으로 볼 수 있다.

‘시스템 정당화’ 설명이 타당하다면 흥미로운 예측이 하나 나온다. 문재인 대통령을 높이 평가하는 사람일수록 권위주의 성향이 강해졌으리라 예측할 수 있는 것이다. 평소라면 말이 안 된다. 문 대통령 지지층은 진보 성향이 강하고, 진보주의자들은 권위주의 성향이 상대적으로 덜하다. 하지만 ‘시스템 정당화’ 가설은 이런 결과를 예측하도록 만든다. 임동균 교수는 ‘대통령 신뢰도 점수’를 기준으로 응답자들을 상중하 세 그룹으로 나눴다. 그리고 권위주의 7문항 응답을 기준으로 권위주의 성향 지수를 뽑았다. 그 결과가 〈표 5〉이다. 대통령 신뢰도가 높을수록 권위주의 성향이 높아졌다. 이 둘의 관계는 통계적으로 유의했다.

감염병 재난은 간명한 현상을 만들어내는 법이 없다. 거의 언제나 복잡하고 모순적이고 상충하는 설명을 동시에 요구한다. 감염병은 우리가 더 큰 공적제도 효능감을 느껴서 더 적극적인 시민이 되도록 만드는 동시에, 시스템을 정당화하는 더 보수적이고 내부 지향적인 시민으로도 만드는 것 같다. 효능감 경로와 시스템 정당화 경로는 둘 다 뒤엉켜 작동하는 것처럼 보인다. 감염병은 평등한 동시에 불평등하다. 모두를 동시에 위험에 빠트려서 평등하고, 똑같이 때려도 약한 곳부터 부러지니까 불평등하다. 감염병은 유대감과 거리감을 동시에 만들어낸다. 공동의 싸움을 함께 겪고 있다는 유대감과 국가 자부심 위로 낯선 사람이 나를 감염시킬지 모른다는 거리감이 뒤섞인다. 감염병은 정말이지 독특한 재난처럼 보인다.

하지만 어쩌면, 재난의 원래 속성이 그럴 수도 있다. 재난은 각자도생의 욕망과 서로 돕고자 하는 연대의식을 동시에 만들어내는 것 같다. 미국의 위대한 세대는 2차 세계대전의 산물이지만, 모든 전쟁이 더 나은 시민을 만들어낸 것은 아니다. 로버트 퍼트넘은 〈나 홀로 볼링〉에서, 왜 베트남전쟁은 2차 세계대전처럼 시민성 높은 사람들을 만들어내지 못했나를 묻는다. 답은 이렇다. “2차 세계대전은 미국 경제사에서 평등 효과를 가장 크게 발휘한 사건이었다. 전쟁을 거치는 동안 소득 상위 5%가 차지하는 몫은 28%에서 19%로 떨어졌다.” 이 시기 미국에서는 노동조합이 대규모로 조직되고, 군수산업이 대규모 고용을 창출하고, 고소득자 세금이 크게 올랐다. 이 모든 변화가 평등화에 기여했다. 그렇다면 베트남전쟁은? “저학력자, 빈곤층, 흑인이 주로 참전했던 악명 높은 불평등은 냉소주의가 널리 퍼지는 데 크게 공헌했다.” 베트남전쟁은 미국인들을 더 나은 시민으로 만들기는커녕 원자로 해체해버리는 전쟁이었다.

ⓒAP Photo1965년 베트남전쟁 때 어린이와 여성을 미군이 경비하고 있다.

우리가 어디로 가기를 원하는가

우리는 감염병 재난이 ‘위대한 세대’ 한국판을 만들어낼지, 외환위기 이후의 각자도생 시대를 되풀이할지가 대단히 중요한 문제라고 생각했다. 이 갈림길이 외환위기 이후 사반세기 만에 맞이한 한국 사회의 대전환기가 될 수 있다고 보고, 데이터로 답을 내보고 싶었다. 그러나 데이터는 답 대신 꽤 평범한 진리를 알려주었는데, 우리가 사는 세계는 정해진 법칙대로 굴러가는 예정된 답 같은 건 없다는 사실이다. 위대한 세대가 만들어질 토양도 있고, 그에 반하는 징후도 있다. 갈림길 그 자체가 현재 상황의 본질이다.

공적제도 신뢰와 국가 자부심이 높아졌다. 이건 굉장한 자산이다. U자형 곡선의 함정을 빠져나갈 기회가 열렸다. 하지만 재난이 곧바로 신뢰와 호혜성이 넘치고 연대의 폭을 확장하는 좋은 시민을 만들어내지는 않았다. ‘얇은 신뢰’는 사실상 움직이지 않거나 심지어 나빠지는 징후가 있다. 재난은 약간이라도 사람들을 권위적이고 수직적인 방향으로 이끄는 것 같다. 그러나 사람들이 지금 국면에서 권위주의 성향이 올라간다는 사실이, 우리 미래가 나빠질 것이라고 결정되었다는 뜻은 또 아니다. 사회적 자본이, 특히 접착제와 같은 ‘두터운 신뢰’가 강화될 때는 내집단 충성심이 강화되면서 외집단을 밀어내는 부작용을 낸다. 사회적 자본과 편협한 태도는, 어느 정도는 함께 간다. 자산에 묻어 있는 부채와 비슷하다.

ⓒ연합뉴스5월28일 밤 서울 서소문역사공원에 마련된 임시 선별진료소에서 주민들이 코로나19 검사를 받기 위해 줄을 서고 있다.

갈림길 자체가 본질이라면 핵심 질문이 바뀐다. ‘우리는 어디로 가고 있는가’가 아니라, ‘우리가 어디로 가기를 원하는가’가 훨씬 더 중요하다. 우리는 일단 첫 판을 크게 이겼고 공적제도 신뢰를 판돈에 추가했다. 하지만 재난은 그냥 두면 불평등을 가속시키는 힘이 있다. 그리고 불평등은 위대한 세대의 출현을 가로막을 최대의 적이다. 퍼트넘은 간명하고 단호하게 이렇게 쓴다. “불평등과 사회적 연대는 절대로 양립할 수 없다.”

외환위기 이후에 한국 사회는 재난의 갈림길에서 각자도생의 길을 갔다. 이 실패를 반복해서는 안 된다는 합의는 한국 사회에 폭넓다. 갈림길의 반대편에는 연대의 길이 있다. 여기까지도 이견이 크지 않다. 그러나 연대는 신뢰만큼이나, 어쩌면 신뢰보다 더 복잡하고 의미심장하고 풍성한 키워드다. 지금까지는 데이터가 길잡이가 되어줄 수 있었지만, 연대란 무엇이고 어떻게 만들어낼지 숫자가 알려줄 수는 없다. 여기서부터는 미래를 스스로 만들어나가는 사람들의 영역이다. 19세기 사상가 마르크스는 〈포이에르바흐에 관한 테제〉에서 이런 문장을 썼다. “철학자들은 세계를 단지 이리저리 해석해왔지만, 중요한 것은 그것을 변혁시키는 일이다.” 이 문장은 재난이라는 특별한 공간에서 살아가는 사람들 모두에게 적용되지만, 정치 지도자와 지식인들에게 특히 진실이다. 이걸 다루려면 또 하나의 이야기가 필요하다.

기자명 천관율 기자 다른기사 보기 yul@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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