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Wikimedia튈덴의 그림 ‘정의와 단결’에 등장하는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왼쪽)와 화합의 여신 콩코르디아.

네덜란드의 화가 테오도르 반 튈덴은 ‘정의와 단결’(1646)이라는 제목의 그림을 남겼다. 그림에는 두 여신이 등장하는데 그중 저울과 칼을 든 여인은 정의의 여신인 유스티티아(Justitia)야. 그리고 그 옆의 여신은 화합을 상징하는 콩코르디아(Concordia)란다. 그림 속 콩코르디아는 사자 가죽을 두른 채 화살을 묶고 있어. 화살을 묶는다는 건 이솝 우화에도 나오고 동양의 고사에도 등장하는 단결의 모티브다. 아버지가 아들들에게 화살 하나를 주고서 부러뜨려보라고 하니 쉽게 부러뜨리지만, 화살을 묶어주자 부러뜨리지 못했고, 이에 아버지는 “너희가 단결하지 않으면 각각 쉽게 부러질 수 있다”라며 교훈을 주었다고 전해져. 사자 가죽은 고대 신화에서 헤라클레스의 옷으로, 힘을 상징한다고 나온다(〈라이프인〉, 조양익 ‘테오도르 반 튈덴의 정의와 단결 이야기’).

튈덴이 유스티티아와 콩코르디아를 한자리에 둔 이유는 무엇일까. 아빠는 이렇게 해석해본다. 정의는 분명 소중한 개념이지만 절대적인 정의는 존재하지 않을 거야. 즉 상황에 따라, 처지에 따라 지켜야 할 정의는 달라질 수 있다는 뜻이야. 저마다 자기의 정의를 내세워 이를 고집하는 세상이란 결코 평화롭지도 못하고 심지어 정의롭지도 못하겠지. 이때 콩코르디아, 즉 조화와 단결을 주관하는 여신의 역할이 필요했다고 생각해. 저마다 다른 정의의 날과 끝을 조율하고, 줄 것을 주고 받을 것을 받아 새로운 가치를 창출하는 조화의 힘. 튈덴은 그걸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어. 이 때문인지, 지금은 남아 있지 않으나 콩코르디아 여신의 신전은 고대 로마의 중심인 ‘포로 로마노’에 세워져 있었어. 이 콩코르디아 신전은 ‘제2의 건국자’라는 칭호까지 듣는 위인의 생애와 맞물려 있었다. 마르쿠스 푸리우스 카밀루스(기원전 446~기원전 365년)라는 인물이야.

황제가 출현하기 전인 공화정 시절, 로마인들은 집정관(Consul) 두 명을 선출해 통치를 맡겼어. 그러다 전쟁 같은 위기 상황이 되면 한 명의 독재관(Dictator)에게 전권을 부여함으로써 효율적인 대처를 하도록 했지. 카밀루스는 이 독재관을 무려 다섯 번이나 지냈단다. 그때마다 그는 독재관으로서 충분한 역량을 보여주었지만 눈앞의 어려움이 사라진 뒤에는 고초가 뒤따르곤 했지. 처음으로 독재관을 맡았던 기원전 401년, 그는 당시 로마의 숙적이던 ‘베이이’와 벌이던 오랜 전쟁을 승리로 이끌었어. 카밀루스는 너무 우쭐했던지 백마 네 마리가 끄는 마차를 타고 개선식을 올렸는데 이로 인해 교만한 통치자를 싫어하는 로마 시민들로부터 엄청난 비난을 받게 돼. 당시 로마 공화국 내에 뿌리 깊게 자리 잡고 있던 귀족과 평민 사이의 갈등이 영향을 미친 결과이기도 했지.

몇 년 뒤 또다시 독재관으로 임명돼 팔리스키족과의 전쟁에 나선 카밀루스는 팔리스키족이 순순히 항복하자 병사들의 약탈을 금지했어. 그런데 이 명령은 평민 병사들에게 목숨을 걸고 싸운 대가가 박탈된다는 의미였어. 그들은 카밀루스를 법정에 고발해버렸지. “카밀루스 집에 엄청나게 비싼 황동 문짝이 있었소! 전리품 갖지 말라더니 자기는!” 사실과 다르다고 항변해봤지만 결국 망명길에 올라야 했다.

그 직후 로마에는 미증유의 국난이 덮친다. 알프스 이북에 살던 갈리아인들이 쳐들어온 거야. 기원전 390년 갈리아인들은 로마를 점령하고 불태우기까지 하지. 살아남은 로마인들은 결국 적이 원하는 만큼의 황금을 주고 갈리아인들을 달래게 되는데, 여기서 갈리아 왕 브렌누스는 저울을 속이는 만행을 저질렀어. 이에 항의하는 로마인들에게 브렌누스가 한 말은 유명해. “패자에겐 고통뿐이다(Vae Victis).”

잿더미가 된 수도의 참상 앞에서 넋을 잃은 로마인들을 일으켜 세운 이가 카밀루스였어. 다시 독재관 자리에 오른 그는 “조국을 구할 것은 황금이 아니라 강철이다”라며 갈리아인에게 참패한 로마를 얕보고 달려들던 이웃 국가들을 잇달아 격파한다. 그러나 귀족과 평민의 뿌리 깊은 대립 구도는 또다시 고개를 들었어. 호민관(평민을 대변하는 관직) 리키니우스 스톨로가 집정관 두 명 가운데 한 명은 반드시 평민 중에서 뽑아야 한다고 주장한 거야.

당연히 평민들은 이를 지지했지만 귀족 중심의 원로원은 강력히 거부했다. 국정 혼란 상태가 전쟁 영웅 카밀루스를 다시 한번 독재관으로 만들었지. 카밀루스 역시 귀족이었기에 평민들의 주장을 강제로 꺾으려 했어. 갈리아 전쟁 당시 영웅이었던 만리우스라는 이가 평민 중심의 쿠데타를 꾀하자 그를 잡아 처형한 것은 대표적인 사례지. 또 ‘리키니우스법’ 통과를 저지하기 위해 호민관들이 법안을 제출하는 날 별안간 시민들을 소집하거나 무거운 벌금으로 협박하는 꼼수도 부렸어. 그러나 그럴수록 평민들의 반발은 커져갔고 카밀루스는 “로마 민중의 불가항력적인 힘을 이길 수 없다(김상근, 〈군주의 거울-영웅전〉)”라는 사실을 깨닫게 돼. 카밀루스는 독재관 자리를 내놓고 스스로 물러섰어.

ⓒ나무위키카밀루스는 귀족과 평민의 갈등 해소를 위해 타협안을 제시했다.

카밀루스가 매달린 여신 콩코르디아

기원전 367년 갈리아인들이 또 로마에 쳐들어오자 나이 여든의 그는 독재관으로 복귀해서 지난 패배를 설욕해. 다섯 번째로 독재관 자리를 맡은 것이지. 그러나 승리의 감격도 잠시, 곧 치열한 내부 투쟁이 벌어졌단다. “집정관 중 한 명은 평민에게!”는 평민 전체의 슬로건이 되었고 민심은 뜨겁게 달아올랐지만 귀족들 역시 양보할 의사가 없었어. 독재관 카밀루스는 집무 도중 별안간 나타난 평민 대표들에 의해 강제로 민회에 끌려갈 뻔한 위기까지 겪는다. 다음 순서는 유혈 충돌이었지.

카밀루스는 이 치열한 갈등을 하루바삐 끝내야 한다는 사실을 절감했어. “로마의 정치사는 근본적으로 국가의 통치권을 공유하는 문제를 둘러싸고 귀족과 평민 사이에서 벌어진 팽팽하면서도 때로는 폭력적인 역사(토머스 R. 마틴, 〈고대 로마사〉)”였음을 그 또한 알았던 거야. 한때 평민들을 억눌렀던 카밀루스는 귀족들을 설득하기로 결심해. 이때 원로원 회의장에 들어가기 전 카밀루스가 매달린 신은 전쟁의 신 마르스도, 신들의 왕 유피테르도 아니었어. 바로 조화와 단결의 신 콩코르디아였지. “합의가 이뤄진다면 콩코르디아 여신께 신전을 바치겠습니다.”

전쟁터에서 용맹한 사람은 흔하고 외적과의 싸움에 떨쳐 일어나기란 오히려 쉽다. 로마의 지배자들은 내부 갈등을 전쟁으로 돌려막는 데 명수이기도 했어. 하지만 내 나라와 가족을 지킨다는 명분이 식고 난 뒤, 한 공동체 안에서 이익과 권리를 어떻게 배분할 것인가는 전혀 다른 문제가 되기 마련이야. 나이 여든의 귀족 카밀루스는 그 지점에서 그가 속했던 계급을 배신(?)하고 타협안을 제시했어. “귀족들은 평민 집정관을 양보하시오. 대신 귀족들 가운데 법률을 관장하는 법무관을 두도록 합시다.”

타협안이 받아들여지자 로마는 거대한 축제 분위기에 휩싸였단다. 원로원은 영원불멸한 신들에게 영광을 돌릴 좋은 기회를 맞아 루디 로마니(Ludi Romani:9월에 열던 축제 겸 운동경기)를 사흘에서 나흘로 연장한다고 선언했고, 귀족들은 그 경비를 대겠다고 나섰어(〈리비우스의 로마사 2〉). 그리고 로마의 중심부인 포로 로마노에는 카밀루스의 맹세대로 콩코르디아 여신을 위한 신전이 건설되었지.

〈군주론〉을 쓴 이탈리아의 마키아벨리는 카밀루스를 두고 이렇게 평한 바 있어. “어떠한 상황에서도 뛰어난 용기를 발휘했다. 변덕스러운 운명도 그의 고결한 인격을 해칠 수 없었다.” 다른 사람은 한 번도 하기 힘든 독재관을 다섯 번 역임하고, 역시 평생에 한 번 누리기 힘든 개선식을 네 차례나 한 카밀루스였으나 그가 가장 큰 용기를 발휘한 순간은 따로 있지 않았을까. 마주 보고 달리는 전차처럼 대립하던 귀족과 평민 사이에서 타협과 단합을 외치고 특히 자신의 계급을 향하여 양보를 요구하던 그때 말이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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