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 5월. 학생이던 나는 자율수업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던 저녁, 지름길로 접어든 시장 안 가게의 텔레비전으로 ‘광주’를 처음 접했다. 그때의 충격과 공포를 잊을 수 없다. 그리고 오랜 세월 현장에서 접한 증언과 보도의 괴리, 진실과 거짓의 시소 사이에서 갈팡질팡했다. 그러다 대학에 진학했다. 그 시절 만난 한 남자 친구는 어느 술자리에서 포효하듯 눈물을 흘렸다. 바로 그날 광주의 현장에 있던 그는 형을 잃고서 담벼락을 뛰어넘어 살아남은 자신을 원망하며 분노와 죄책감으로 오래도록 괴로워했다.

2020년 5월, 5·18 민주화운동 40주년을 맞는 날, 이 글을 쓴다. 그리고 지금으로부터 100년도 더 이전에 살았던 한 조선 여성의 이야기 〈시베리아의 딸, 김알렉산드라〉를 읽고 있다. 조선인 최초의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노동인권과 조선 독립을 위해 저 먼 땅에서 투쟁하다 짧은 생을 마감한 여인의 일대기이다. 넓디넓은 시베리아 땅을 떠돌며 인권의 불모지와도 같던 현장에서 페미니스트이자 노동인권 운동가, 혁명가로서 그녀의 삶과 역사를 톺아보기에, 이 한 권은 너무도 짧다. 책을 덮은 뒤에도 행간 사이의 의미는 계속 확장된다.

책을 덮고서 한동안 생각했다. 어느 시대든, 어떤 사회에서든 불평등은 늘 존재했고, 조금이라도, 한 뼘이라도 더 그 간극을 좁히기 위해 노력한 사람이 있었구나. 그래서 오늘 여기, 이만큼의 자유, 평등이 (아직은 멀다 하더라도) 그들의 희생과 눈물, 피의 결과구나.

이 책은 여성 혁명가 ‘김알렉산드라’의 삶뿐만 아니라 페미니스트 선구자로서 그녀를 기억한다. 1885년 러시아에서 태어나 역사의 질곡을 온몸으로 견디며 투쟁하다 1918년 일본군과 백위군에게 총살되기까지 33년의 삶. 두 번의 결혼과 파경을 거치며 아이들을 키우는 여성이자 어머니로서, 또한 식민지 조선의 여성으로서 사회주의 혁명가로 살았던 시간. 그녀는 그때 어떤 꿈을 꾸었을까? 그녀에게 삶은 무엇이고, 무엇이 죽음조차 두렵지 않게 했을까? 남성과 여성, 계급과 지위, 민족과 인종의 차별 없이 모두가 평등한 세상을 위해, 그녀는 어떻게 그토록 비범한 의지와 인내심으로 고통을 이겨냈을까?

“무산자는 모두 형제다”

일찍이 엄마를 잃고 아버지 손에서 자란 그녀의 삶에 아버지 표도르 김(김두서)의 영향은 클 수밖에 없었다. 철도 노동자를 위해 일했던 그녀의 아버지는 늘 이렇게 말했다. “노동자에게 국적 따위는 중요하지 않다. 무산자(無産者)는 모두 형제다.” 그리고 그녀에게 유언으로 노동자와 혼인하라는 말을 남겼다. “성실하고 착한 노동자와 결혼해서 너의 손으로 노동해서 먹고 살아라….”

책의 원작은 시인·소설가·전기작가인 정철훈의 동명 평전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이 그래픽노블은 김금숙 작가의 손에서 재탄생하여 또 다른 생명력을 얻었다. 김 작가의 수묵화나 판화 같은 그래픽 스타일은 굵직한 역사물에 걸맞아 해외에서도 주목받는다. 제주 4·3항쟁을 그래픽노블로 재탄생시킨 〈지슬〉(2014)이라든가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을 그린 작품 〈풀〉(2017)도 주목할 만하다. 특히 이 작품은 해외 여러 나라에서 출판되면서 국제적 위상이 높아져, 미국 〈뉴욕타임스〉 ‘2019 최고의 만화’, 영국 〈가디언〉 ‘2019 최고의 그래픽노블’, 프랑스 진보 일간지 〈뤼마니테〉 특별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우리 역사에서 잊지 말아야 할, 잊어서는 안 될 기억이 있다. 이런 책 덕분에 그 기억들을 되살려본다.

기자명 김문영 (이숲 편집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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