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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여 년간 미국 중앙정보부(CIA) 공작관으로 일했던 도널드 그레그는 조지 부시 시니어(아버지 부시)의 부통령 시절 안보보좌관과 주한 미국 대사를 역임한 한반도 문제의 베테랑이다. 그는 미국 정부의 만성적인 대북정책 실패의 가장 큰 이유로 ‘정보 실패’를 꼽았다. 북한을 악마화하고 붕괴론에 집착하는 CIA 분석관들의 고정관념과 집단사고(group thinking)가 정보 실패를 반복하는 배경이라는 개탄이다.

최근 워싱턴의 한반도 문제 전문가 가운데는 CIA 분석관 출신들이 두각을 보인다. 헤리티지재단의 브루스 클링너, 전략국제문제연구소(CSIS)의 수미 테리, 브루킹스연구소의 정 박, 랜드연구소의 수 킴 등이 대표적이다. 그 가운데 정 박은 최근 〈김정은 되기-불가사의한 북한 젊은 독재자에 대한 CIA 분석관의 성찰〉이라는 책을 내어 주목을 받고 있다.

북한 배제한 5자 협의체에 중국·러시아 동참 안 해

그의 북한 분석은 두 가지 가정에 기초한다. 하나는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체제 생존이라는 국내 정치적 이유 때문에 “평화보다는 갈등, 통합보다는 자급자족, 비핵화보다는 핵무기 보유에 더 큰 관심을 두고 있다”라는 가정이다. 다른 하나는 김정은 위원장의 핵무기 야망이 미국에 대한 핵억지력 구축이 아니라, 핵무기와 ICBM 보유를 통해 미국을 한반도로부터 떠나게(decoupling) 하고 한국 내에서 남남 갈등을 조장해 ‘남조선 적화통일’ 달성을 목적으로 하고 있다는 가정이다. 북한의 핵무기 보유는 방어적이 아니라 공세적인 결정이고, 김 위원장이 자발적으로 핵을 포기할 가능성은 극히 낮다는 결론으로 이어진다.

이러한 가정에 기초해 정 박은 정책 대안 다섯 가지를 제시한다. 첫째, 한·미·일 3국 동맹 체제를 강화하고 북한에 대한 비밀공작과 한·미 연합 군사훈련을 확대하는 공세적 외교안보 정책을 전개하는 동시에 중국의 훼방을 최소화한다. 둘째, ‘최대한의 압박’ 전략을 통해 대북 제재를 고도화함으로써 김정은 위원장 통치의 경제적 기반을 약화시킨다. 셋째, 미·중·러·한·일 5개국 협의체를 구축함으로써 평양이 선(先)비핵화 조치를 단행할 경우의 유인책을 공동 제안하는 한편 불응할 경우 국제적 고립을 입체화한다. 넷째, 미국의 대북 인권대사를 재임명하고 탈북자는 물론 북한 내부의 군부 인사, 과학자, 기술자 등과 연대를 구축해 김정은 위원장의 국내 정치 비용을 높인다. 마지막으로 국제사회의 정보를 북한 내부에 확산시킨다.

이러한 접근법은 가정의 설정에서부터 한계가 있다. 조선노동당의 규약 서문이 통일전선전술을 당의 기본노선으로 유지하고 있음은 사실이지만, 냉전 붕괴 이후 북한 지도층은 적화통일의 야망보다는 흡수통일 가능성에 더 큰 우려를 보여왔다. 표피적인 선전선동 수사를 넘어 북한 지도부의 의도를 들여다보지 못한다면 정보분석은 실패할 수밖에 없다. 2018년 판문점과 평양에서 전쟁보다 평화를, 경제적 고립보다는 발전을, 조건만 맞는다면 비핵화를 단행할 용의가 있다는 김정은 위원장의 언술이 선전용 수사보다 중요하게 다루어져야 하는 이유다. 북한은 수령 체제 아닌가.

정 박의 정책 제안 역시 다분히 비현실적이다. 한국은 물론 중국·러시아 정부가 북한 체제의 안정성을 해치는 정치공작이나 압박정책에 동조할 가능성은 극히 저조하다. 특히 5자 협의체는 10여 년 전 이명박 정부가 공격적으로 추진했지만 처참하게 실패로 끝나지 않았는가. 북한을 배제한 5자 협의체에 중국·러시아가 참여할 리 만무하다. 그의 제안에 현실성이 없다는 사실은 북한 내부 주요 인사들을 공작적 목적으로 접근해야 한다는 대목에서 극명하게 드러난다. 북한과 외부 세계의 접촉이 지금처럼 극도로 제한적인 상황에서 그러한 공작적 접근이 가능할까.

가벼운 비평과 고정관념에 충실한 글들이 미국의 독자들에게는 더 쉽게 읽힐지도 모른다. 이렇게 만들어진 담론이 ‘CIA 출신’과 ‘정보분석’이라는 이름을 달고 상당한 정책적 영향력을 행사하는 일이 반복된다면 미국의 대북정책은 앞으로도 계속 혼돈 속을 헤맬 수밖에 없을 것이다.

기자명 문정인 (연세대 명예특임교수)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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