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작은책〉 발행인 안건모씨가 인터뷰를 하고 있다. 옆에는 고양이 퉁이와 점복이.

글이라곤 소송을 할 때 소장을 베껴 써본 게 전부였다. 버스 기사로 일할 때였다. 회사가 기본급이 통상임금이라면서 야간·연장근로 수당을 떼먹었다. 소송을 걸었더니 사용자 측에 기울어져 있던 노조가 그를 조합원에서 제명했다. 1996년, 한겨레신문에서 작은 광고를 발견했다. 월간지 〈작은책〉이었다.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한다’는 문구가 눈에 띄었다. 과월호를 읽고 잡지사에 연락해 창간호부터 사겠다고 했다. 투박한 글을 보고 자신감이 붙었다. ‘나도 쓸 수 있겠다.’ 1996년 4월 투고한 글이 처음으로 잡지에 실렸다. 제목은 ‘요즘 시내버스 어떻습니까’. 안건모 〈작은책〉 발행인 겸 편집인(63)의 글쓰기가 시작됐다. 마흔 가까운 나이였다.

1995년 5월. ‘일하는 사람들의 글모음’ 월간 〈작은책〉이 탄생했다. 창간호 소개글 일부다. ‘작은책은 노동하는 사람들이 쓴 글이나 사진이나 그림으로 만듭니다. 노동하는 사람들이 쓴 솔직한 글이면 철자법이나 띄어쓰기가 틀려도 정성스럽게 읽고 살펴서 담습니다.’ ‘지겨운 정치놀음 기사’를 담지 않고 노동하는 사람들이 살아오며 겪은 이야기를 담는다고 했다. 최근 〈작은책〉이 창간 25주년을 맞았다. 6월에 발행될 잡지가 제300호다. 5월호 ‘발행인의 글’을 펼쳤다. 25년 전과 마찬가지로 ‘노동자들의 생활글쓰기’를 강조하고 있었다.

5월13일, 서울 서교동 〈작은책〉 사무실을 찾았다. 안건모 발행인과 정인열 독자사업부 부장(43), 그리고 둔촌동 주공아파트 출신의 고양이 퉁이와 점복이가 점심식사를 마친 직후였다. 전날 디자인 시안을 넘겨 비로소 여유가 있다고 했다. 보통 160쪽을 제작하는데 6월에 나올 제300호는 받은 글이 넘쳐 16쪽 늘렸다. 보통 매달 10일에 글을 마감한다. 기사 쓰고 청탁하고 투고를 정리하는 일까지 두 사람 몫이다. 휴직 중인 유이분 편집장의 자리에는 ‘I’ll be back’이라고 쓰인 커다란 종이가 있었다. 300호에 특별한 의미가 있는 것 같진 않고 다만 오래 버텼다는 마음이 든다. 얼마 전 인근 망원동의 서점 한강문고도 13년 만에 문을 닫았다. 책을 거의 읽지 않는 시대다.

‘아마추어가 대표를 맡아 좌충우돌이었지.’ 안건모 발행인의 소회다. 15년 전 〈작은책〉이 망할 것 같으니 와달라는 제안을 받았다. 버스 기사로 일하면서 겪은 이야기를 오래 연재한 인연이 있었다. 열두 살부터 공장에서 일하고 고등학교를 중퇴한 뒤 버스 운전만 20년을 했다. 잡지를 만든다는 게 잘 상상이 되지 않았다. 평소 노동자가 만들어야 한다는 생각은 있었다. 월급은 반토막이 예고됐다. 반대하는 아내에게 술과 담배를 끊겠다고 선언했다. 노동운동을 하는 김에 큰 판에서 하자는 생각이 들었다. 2005년 12월 사표를 내러 갔는데 버스회사 경영진이 무척 좋아하며 뛰어나왔던 기억이 있다. 사직서 양식까지 갖다 주었다. 11년 일한 곳이었다. 이튿날 〈작은책〉 사무실로 출근했다. 독자 관리를 하고 글도 쓰고 인터뷰하는 법도 배웠다. 지하철 가판과 서점마다 잡지를 진열하던 시절이다. 제작비 감당이 안 되어 적자폭이 클 때였다. 2년 만에 독자를 많이 늘렸다. 각종 집회를 찾아다니며 선전하고 정기구독자를 모았다. 전교조 행사에서 한 번에 80명을 유치하기도 했다.  

에세이와는 다른 〈작은책〉의 ‘생활글’

ⓒ시사IN 신선영정인열 독자사업부 부장 겸 기자는 비정규직 노조에서 활동하다 〈작은책〉에 합류했다.

〈작은책〉이 길잡이 삼는 정신이 있다. 창간호에 실린 이오덕 아동문학가의 말이다. ‘일하는 사람들이 글을 써야 세상이 바뀐다.’ 노동자들이 겪고 있는 삶의 세계, 마음의 세계를 짧은 글에 녹이면 뒷날 역사로 남을 거라고 했다. 윤구병 전 보리출판사 대표도 〈작은책〉의 글이 민중사의 기록이 될 거라고 말했다. 안건모 발행인 스스로 글쓰기가 바꾼 세상을 목격한 증인이다. 노조 민주화 운동을 할 때 소식지를 만들어 몰래 뿌렸다. 말랑말랑한 글도 싣고 근로기준법을 언급하기도 했다. 말로 하면 싸움만 나는데 글로 보여주니 신뢰가 생겼다. 사람들이 그를 믿고 따라주었다. 회사에선 그를 왕따시키려고 애썼지만 그는 주눅 들지 않았고 따돌림당하지도 않았다. 그를 못 건드렸다. 글의 힘을 실감했다. ‘팔뚝질’도 중요하지만 글로 폭로해야 여론을 바꿀 수 있다는 걸 알았다.

〈작은책〉이 추구하는 글은 생활글이다. 에세이하고도 다르다. 언젠가 이런 식으로 설명하기도 했다. ‘아버지가 택시 기사인데 어렵고 힘들지만 잘될 거다’라는 내용의 에세이가 있다고 치면 〈작은책〉의 글쓰기는 그와 결이 다르다. 왜 열심히 일해도 어려운가, 사납금을 채우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그런 게 ‘다른’ 글쓰기다. 잡지 위에 적힌 ‘세상을 바꾸는 따뜻한 이야기’라는 슬로건과 완전히 맞아떨어지진 않는다.

〈작은책〉은 25년째 글쓰기 모임을 운영 중이다. 한 달에 한 번, 15명 정도가 모인다. 안 발행인이 모임의 회장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광주시가 고향이고 고등학교 때 광주민주화운동을 경험했던 그가 시민군 출신 남편과 결혼한 이야기를 글로 쓴다고 했다. 노동조합, 마을 공동체 등을 대상으로 외부 글쓰기 강의도 나간다. 그런 현장에서 잡지에 실을 만한 좋은 글을 길어 올리기도 하는데 요즘은 코로나19로 여의치 않다.

25주년 특집인 제299호의 주제는 ‘요즘 뭐 해 먹고 삽니까’였다. 독자 25인에게 근황을 물었다. 박정훈 라이더유니온 위원장은 외환위기의 영향을 받지 않은 두 부류가 있다는 말로 시작한다. 엄청난 부자, 그리고 엄청나게 가난한 자다. 세상이 어떻게 변하든 자신의 삶이 바뀌지 않고 그래서 코로나19로 인한 타격이 별로 없는 일상에 대해 말한다. 농부 도상록씨는 〈작은책〉 때문에 귀농한 사연을 보내왔다. 책에 실린 농부 시인의 글을 보고 무작정 그를 찾아가 농사를 지은 게 시작이었다. 류미례 영화감독은 코로나19로 일이 기약 없이 미뤄져 아이들에게 세뱃돈을 빌리고 동료 PD들의 도움을 받은 이야기를 덤덤하게 들려준다. 〈작은책〉 글쓰기 모임에서 ‘글을 꾸며 쓰면 안 된다’고 구박을 듣던 안미선 작가는 그 후 20년 가까이 소수자들의 목소리를 기록해왔다. 〈작은책〉이 바꾼 사람과 세상에 대한 기록이다.

26년간 운영한 책방을 정리하고 제주로 내려간 책방 주인, 개학 연기 소식에 복통을 느끼는 교사, 4년 차 장애인 재택근무 사원의 일상, 감염이 두렵고 감염되면 ‘죽일 ×’이 되는 보육교사의 이야기도 있다. 그간 좋은 반응을 얻은 글만 모은 단행본 〈서로 안고 크니까 그렇지〉와 〈이만하면 잘 살고 있는 걸까〉가 동시 출간됐다. 마트 노동자, 일용직 택배 노동자, 철물점 노동자, 도시가스 점검원 등의 생활밀착형 글이 담겨 있다. 다른 어디에서 접하기 어려운 글이다.

현장 노동자들이 점점 책 읽는 걸 힘들어한다는 인상을 받는다. 창간 초기에 비해 주부와 교사 독자가 늘었다. 규모가 큰 단체보다 비정규직 사업장 등 절박한 곳에서 잡지에 더 관심을 보인다. 이들은 어디엔가 호소해야 하고 그 방법 중 하나가 글이다. 〈작은책〉이 더 작고 더 낮은 곳에 닿고 있다. 2009년부터 합류한 정인열 〈작은책〉 독자사업부 부장 겸 기자도 코스콤 비정규직 노조에서 활동했다. 2007년 비정규직 문제의 해결을 위해 마포대교 북단에 설치된 CCTV탑에서 고공농성을 벌일 때 안 발행인이 취재를 위해 그를 찾아왔다. 그때부터 정씨를 눈여겨보았다. 장기간의 농성 끝에 사태는 해결됐으나 정씨는 현장으로 돌아가지 못했다. 안 발행인이 연락하니 노무사를 준비할까 생각 중이라고 했다. 비정규직 문제가 막 드러나던 시기였다. 노조 활동을 하며 생각과 가치관이 많이 바뀌었다. 그 시기 처음 접한 〈작은책〉도 정씨에게 영향을 끼쳤다. 흔히 보는 글처럼 주장하거나 호소하는 형태가 아니었다. 구호는 없지만, ‘세상이 그렇구나’ 자연스럽게 깨닫게 해주었다. 그런 방식의 글쓰기가 필요하다고 느꼈다. 〈작은책〉에서 일하면서는 기사 쓰는 게 가장 힘들면서도 가장 보람됐다. 취재원들이 전화를 걸어 고맙다고 말한다. 현장을 많이 다녀야 노동판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 있다. 잡지는 그 감각을 유지하게 해준다.

“이상하게 돈 없는 사람들이 서로 나눠요”

지하철 매점이나 작은 서점에서는 〈작은책〉을 구하기 어렵다. 주로 구독 형태다. 매달 5000부를 발행하고 정기구독자 규모도 이와 비슷하다. 500여 명 후원회원도 있다. 어느 비정규직 노동자가 100만원을 쾌척하기도 했다. 안 발행인은 거기서 25년 장수의 비결을 꼽는다. “이상하게 돈 없는 사람들이 서로 나눠요. 그게 〈작은책〉이 버틸 수 있는 힘 아닐까요. 자기들 이야기가 담긴 책이 남아 있어야 한다는 절박감이죠.” 아직 적자는 아니지만 구독 부수는 줄고 있다. 구독 해지 사유로 ‘해고당해서’라는 말을 들을 때가 제일 안타깝다. 초창기 독자 중에는 돌아가신 분도 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다며 구독을 중지하겠다고 의사를 전달해왔다.

25년 사이 64쪽짜리가 160쪽으로 늘었다. 글이 매끄러워졌다. 교정 교열을 열심히 하는데 이게 옳은 건지는 모르겠다. 옛날엔 좀 더 투박한 글이었고 그 때문에 투고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던 것 같다. 안건모 발행인 본인부터 그렇다. 그는 만화 〈쿠바 혁명과 카스트로〉를 보고 충격을 받아 〈자본론〉과 〈태백산맥〉 같은 책을 연달아 읽었다. 이런 책이 사회를 보는 시선을 달라지게 만들었다면 〈작은책〉은 글쓰기의 세계를 열어주었다. 쓴다는 행위 덕분에 주눅 들지 않고 살았던 것 같다. 지난해 한 편집위원의 권유로 방송통신대를 졸업했다.

안건모 발행인은 오래전부터 택시 기사를 해보고 싶었다. 그가 보기에 시내버스만큼 안 바뀌는 세계다. 대체로 보수적이다. 직접 경험해 글을 쓰고 싶다. 어릴 때부터 머리 쓰는 일보다 몸을 움직이는 게 좋았다. 머리를 쓰면 진전이 안 보이는데 청소를 하면 금방 깨끗해진다. 일을 해야 글감이 나온다는 생각이 든다. 잡지를 만드느라 바쁜 와중에도 기타를 치고 카메라를 배우고 유튜브로 인디자인을 배워 광고를 만든다.

300호는 창간호의 뜻을 새기는 차원에서 지금 노동자들이 얼마나 쓰고, 읽는지 들여다봤다. 한 노조 선전실장은 글만으로는 안 된다며 카드뉴스와 유튜브를 언급하기도 했다. 25년 전 발행한 〈작은책〉 1호에 창간사가 실려 있다. 당시에도 장밋빛 전망은 아니었다. 문제의식은 지금과 비슷하다. “노동자가 책을 안 본다. 판매가 걱정된다”라는 주변의 의견에 대해 당시 엮은이 차광주는 말한다. “저희는 이런 의견을 들을 때마다 거꾸로 이렇게 묻곤 해요. 우리가 노동자들이 볼 수 있도록 책을 만든 적이 있는가?”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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