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장기집권 ‘문재인 뉴딜’에 달렸다
  • 천관율 기자
  • 호수 661
  • 승인 2020.05.20 12: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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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재인 정부의 ‘한국판 뉴딜’이 유권자 정렬을 바꾸는 사회 재계약 프로젝트로 나아갈 수 있을까. 성공하면 한 세대 이상 가는 민주당 다수파 시대를 열 수도 있지만, 실패하면 우리도 포퓰리즘의 역습을 맞을 수 있다.
ⓒ시사IN 포토

2020년 총선 분석, 마지막 이야기입니다. 동시에, 2020년 이후 한국 정치가 만날 결정적 분기점에 대한 첫 번째 이야기입니다. 우리는 미래를 내다보기 위해 과거를 들여다볼 겁니다. 짧게는 2020년 4월의 총선 결과부터, 멀리는 1930년대의 미국까지 거슬러 올라갈 겁니다. 앞으로 2년은 더불어민주당이 입법부와 행정부를 동시에 지배합니다. 유권자 지형 변화는 2016년부터 이미 시작됐습니다. 그러나 그 폭과 깊이와 지속성은 이 2년의 결과에 따라 크게 달라질 수 있습니다.

〈시사IN〉과 여론조사 전문기관 한국리서치는 총선 직후인 4월17~19일 사흘 동안 1100명에게 182개 질문을 던지는 웹 조사를 했습니다. 지난 기사에서 우리는 보수 투표연합이 구조적으로 위축되는 징후를 지목했습니다(〈시사IN〉 제659호 ‘그들은 전향했다, 민주당 지지로’ 기사 참조). 이번에는 민주당 다수파가 어떻게 만들어지고 있는지 보겠습니다. 제659호에 사용한 분석방법, 그러니까 2016년 최순실 사태 이전의 지지 정당과 현재 지지 정당을 기준으로 분석 대상 그룹을 정의하는 방법을 다시 쓰겠습니다.

지난 호에서 우리는, 최순실 사태 이전에도 민주당 지지자였고 현재도 민주당 지지자인 그룹을 ‘민주단심’이라고 불렀습니다. 이번 이야기에도 이 그룹은 중요합니다. 이들의 비교 대상으로, 최순실 사태 이전에는 민주당 지지자가 아니었지만 현재는 민주당 지지자인 사람들을 보겠습니다. 미래통합당 지지자, 국민의당 지지자, 정의당 지지자, 무당파 등 여러 곳에서 민주당 지지자로 넘어온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이들을 ‘새민주’라고 부를 겁니다. ‘새민주’는 누구일까요? 이들은 ‘민주단심’과 무엇이 비슷하고 무엇이 다를까요?

ⓒ시사IN 신선영5월7일 더불어민주당 당선인 총회에서 참석자들이 국민의례를 하고 있다.이날 김태년 의원(앞줄 맨 오른쪽)이 새 원내대표로 선출됐다.

‘민주단심’은 이번 총선에서 94%가 민주당 후보를 찍었습니다. ‘새민주’는 88%가 민주당 후보를 찍었습니다. 이 정도면 상당한 결집력입니다. 충성도 차이는 좀 납니다. ‘민주단심’은 80%가 선거 과정에서 지지 후보를 바꾼 적이 없습니다. ‘새민주’는 58%만 그랬습니다. 선거 결과 평가도 온도차가 납니다. 여당이 얻은 180석이 많은지, 적은지, 적절한지 물었습니다. 충성도 높은 민주당 지지자라면 ‘적절하다’거나 심지어 ‘적다’고 답할 것입니다. ‘민주단심’은 적절하다와 적다를 합쳐서 73%입니다. 많다는 응답은 25%입니다. 반면 ‘새민주’는 적절하다와 적다를 합쳐서 56%, 많다는 응답이 42%입니다. ‘민주단심’은 180석 압승을 마음껏 기뻐하는 반면, ‘새민주’는 민주당 승리를 바라기는 했지만 지나치게 의석 균형이 무너져 당황하는 기색도 있습니다.

두 그룹은 결정적으로 투표 결정 동기에서 차이가 납니다. ‘민주단심’은 정부·여당 지지 동기가 더 강한 반면, ‘새민주’는 야당 심판 동기가 더 강합니다. 정부·여당이 잘해서 이긴 선거인지 미래통합당이 잘못해서 진 선거인지 물었습니다(아래 〈표 1〉 참조). ‘민주단심’은 52%(정부·여당이 잘해서) 대 45%(미래통합당이 못해서)입니다. 반면 ‘새민주’는 34%(정부·여당이 잘해서) 대 63%(미래통합당이 못해서)입니다. 자신이 지지하는 정당이 자랑스럽냐고도 물었습니다. ‘민주단심’은 56%가 자랑스럽다고 답합니다. 전체 평균이 31%니까 이 정도면 매우 높습니다. ‘새민주’는 아닙니다. 30%만 자랑스럽다고 답합니다. 단적으로 말해, ‘민주단심’은 정부·여당을 지지해서 민주당을 찍었습니다. ‘새민주’는 미래통합당을 응징하고 싶어서 민주당을 찍었습니다.

한국 정치에서 보수 다수파 시대가 길었던 이유는 보수가 유능하다는 폭넓은 합의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보수는 고도성장기 지도자인 박정희의 후계자였고, 특히 먹고사는 문제를 해결한다는 강점을 내세웠습니다. 보수당·관료·재벌 삼각동맹을 구축해 ‘유능’ 이미지를 강화했습니다. 그런데 이게 철저하게 무너졌습니다. 우리는 민주당과 미래통합당이 안보·경제 등 각각의 영역에서 유능하다고 생각하는지 물었습니다. 〈표 2〉는 두 당 각각에 대한 응답자들의 평가입니다. 민주당이 얼마나 유능한가에 대해서는 온도차가 좀 있습니다. ‘민주단심’이 ‘새민주’보다 일관되게 민주당을 더 유능하게 봅니다. 특히 안보 정책이나 경제 운영과 같은, 민주당이 약하다고 평가받은 영역일수록 ‘새민주’는 더 시큰둥합니다.

‘노무현’이라는 정치적 상징에 공명

‘민주단심’과 ‘새민주’는, 미래통합당이 그 어떤 영역에서도 유능하지 않다는 데 완전히 의견이 일치합니다. 특히 보수의 전통적 강점인 경제 운영에 대한 평가는 처참한 수준입니다. 미래통합당이 경제 운영에 유능하다는 응답은 ‘민주단심’이 5%, ‘새민주’가 8%입니다. 이들이 민주당 지지층이니 당연한 결과일까요? 그렇게만 보기 어렵습니다. 2016년 이전에나 지금이나 일관되게 미래통합당을 지지한 ‘미통단심’ 그룹은 보수의 핵심 지지층입니다. 이들조차 그렇다고 응답한 비율은 35%에 그칩니다. “경제는 보수”라는, 한때 한국 정치에서 상식으로 받아들이던 이미지는 이제 완전히 박살났습니다.

1997년 외환위기와 21세기 이후의 저성장 양극화를 겪으며 박정희식 고도성장 모델의 인기가 치솟았습니다. 이명박·박근혜 두 보수 정부는 박정희 모델이 더 이상 작동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확인시켜주었습니다. 고도성장은 돌아오지 않았고, 그나마 있는 성장의 과실은 상류층에만 머물고 하층까지 데우지 못했습니다. 새로운 현실에 보수의 옛 모델은 답을 주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2016년 총선(최순실 사태가 터지기 전입니다)부터 보수 투표연합이 쪼그라드는 재정렬이 일어났습니다. 민주당 투표연합으로 신규 진입한 유권자들은, 정당 충성도는 기존 지지자보다 덜합니다. 하지만 보수가 무능하다는 인식은 강하게 공유합니다.

그래도 지지 정당을 바꾸는 건 여전히 어려운 일입니다. 정당 지지는 강한 애착과 충성심을 동반하는 것이어서 일생 동안 잘 바뀌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민주당 지지층으로 새로이 진입한 사람이라면 그 허들을 넘도록 해주는 무언가가 있었을 겁니다. 흥미로운 단서가 잡힙니다. ‘노무현’입니다.

진영마다 상징이 되는 지도자가 있습니다. 보수의 상징은 박정희 전 대통령입니다(이승만 전 대통령은 일부 강성 지지층 밖에서는 인기가 없습니다). 진보의 상징은 김대중·노무현 두 전직 대통령입니다. 각각의 인물에게 호감을 느끼는지 물어봤습니다.  〈표 3〉입니다. ‘새민주’는 노무현 전 대통령에게 “호감이 간다”는 응답이 86%나 됩니다. ‘민주단심’의 96%보다, 민주당 지지자가 아니었던 ‘새민주’의 86%가 더 인상적입니다.

지지 정당을 바꾸는 선택은 현재 정당에 대한 강한 실망에다가, 넘어갈 정당에 대한 기본적인 호감을 요구합니다. 민주당은 노무현이라는 가장 강력한 상징을 보유한 정당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 호감도는 전체 평균으로도 74%에 이릅니다. 2020년 총선 이후 민주당이 다수파 정당, 심지어 포괄정당(catch-all party, 계층과 이념 성향이 다양한 지지자를 포괄하는 정당)이 될 수 있을까라는 논의가 정치권에서 활발합니다. 만약 그럴 수 있다면, 노무현이라는 상징은 민주당의 핵심 전략자산입니다. 민주당이 가진 지지율, 당원 조직, 정책 역량 등 어떤 자원보다도, 노무현이라는 상징이 ‘포괄(catch-all)’에 가깝습니다.

보수가 유능하다는 믿음이 박살났고, 반대편의 민주당은 호감 가는 상징을 갖고 있습니다. 밀어내는 힘과 당기는 힘이 이렇게 만나 허들을 낮춰주었습니다. 여기에 더해, ‘새민주’는 이념적으로도 민주당에 더 친화적인 그룹입니다. ‘성장과 복지 중에 무엇이 더 중요한가’라는 질문은 한국 유권자들의 이념 성향을 잘 보여줍니다. 보수가 성장을, 진보가 복지를 더 선호합니다. 이번 조사에서 ‘새민주’는 복지 선호가 56%에 이릅니다(〈표 4〉). ‘민주단심’의 63%와 비교해도 차이가 크지 않습니다.

이제 우리는 민주당 투표연합으로 새롭게 진입한 유권자 블록의 특징을 요약할 수 있습니다. ‘새민주’는 민주당 충성도가 높지 않습니다. 하지만 미래통합당에 대한 반감은 매우 강합니다. ‘새민주’는 민주당 투표연합에 장기적으로 안착할 가능성도 일부 보여줍니다. 노무현이라는 정치적 상징에 강력하게 공명하는 블록이고, 또 이념적으로도 성장보다 복지에 대한 선호가 더 높습니다.

그래도 ‘새민주’는 ‘민주단심’만큼 공고한 정당 일체감을 구축한 유권자가 아닙니다. 민주당 처지에서 보면 언제든 떠나갈 가능성이 높은 표입니다. 다수파 연합을 만든다는 것은 이런 휘발성 높은 지지자들이 정당 일체감을 갖도록 한다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 투표할 이유를 찾지 못해 투표하지 않는 유권자들을 지지자로 불러낸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이런 게 어떻게 가능할까요?

민주주의 역사에서 가장 유명하고 파괴력 있는 재정렬은 미국에서 1932년부터 일어났습니다. 이 시기는 공화당 다수파 시대였고, 민주당은 남부 지역당에 만족하는 소수파였습니다. 1929년 대공황의 여파로 1932년 대선에서 모처럼 민주당이 집권합니다. 대통령이 된 프랭클린 루스벨트는 대공황을 극복하는 동시에 새로운 사회경제 질서를 만들어내는 프로젝트에 착수합니다. 그는 미국 역사상 유일한 4선 대통령으로 12년 동안(그는 마지막 임기를 채우지 못하고 사망했습니다) 자신의 정책을 밀고 나갑니다. 이 프로젝트를 ‘뉴딜(New Deal)’이라고 부릅니다. 말 그대로 새로운 사회계약입니다.

ⓒ시사IN 신선영지난해 5월12일 노무현 전 대통령 10주기를 맞아 시민문화제가 열렸다.

한국인들에게 ‘뉴딜’ 하면 떠오르는 이미지는 대규모 토건사업입니다. 정부가 토건사업을 집행해 실업을 줄이고 경기를 부양한 게 뉴딜이라고 익히 알려져 있습니다. 홍남기 경제부총리는 5월7일 비상경제 중앙대책본부 회의에서 ‘한국판 뉴딜’을 두고 이렇게 말합니다. “기존의 토목사업 위주 경기부양성 뉴딜 개념과는 확연히 구분되는 개념이다.” 이 말은 뉴딜에 대한 전형적인 오해를 잘 보여줍니다. 루스벨트의 뉴딜은 토건과 경기부양을 훌쩍 뛰어넘는 총체적 사회 재계약 프로젝트였습니다.

뉴딜은 대규모 공공사업을 한쪽 날개로, 강력한 사회보험 정책과 노동조합 육성책을 반대편 날개로 장착했습니다. 이 두 날개는 모두 새로운 민주당 투표블록을 묶어냈습니다. 대공황 여파로 실업자가 대규모로 발생하자 루스벨트는 공공사업진흥국을 설치하여 공공사업을 일으키고 일자리를 제공했습니다. 공공사업진흥국 일자리를 받은 노동자들 중 80%가 민주당에 투표한 것으로 추정됩니다. 복지제도의 불모지나 다름없던 미국에 루스벨트는 사회보장법을 들여왔습니다. 실직자와 노인들이 기본적인 연금을 받게 됩니다. 자유권과 재산권을 신성시하는 나라 미국에 ‘사회적 권리’ 개념이 사실상 처음으로 도입됩니다.

ⓒAP Photo1932년 대선에서 대통령이 된 루스벨트는 새로운 사회 재계약을 만드는 프로젝트를 추진했다.

1932년 미국 선거는 지배계급의 전복

와그너법은 뉴딜 프로젝트를 대표하는 법으로 손꼽힙니다. 이 법은 노동조합을 만들고 단체교섭에 나설 권리를 보장하고 확대해주었습니다. 노동자와 고용주의 힘의 관계를 조정하는 겁니다. 미국의 역사가 조지 맥짐시는 와그너법이 “일종의 노사 공동협정”이라고 평가했습니다. “경영자는 노동자의 권리를 인정하고, 노동 지도자들은 경영에 일정 권한을 가지며, 대신 경영이 일정하게 이익을 가져가도록 인정하는” 합의가 이루어진 겁니다. 노동조합은 20세기 내내 민주당의 핵심 지지 블록이 됩니다.

20세기의 첫 30년 동안 미국은 이민·도시화·산업화라는 삼중의 혁명적 변화를 겪었습니다. 이민자들이 몰려 들어와 자식을 낳았고, 도시화가 진행되어 이들이 한데 모여 살았으며, 산업화는 이들을 산업노동자로 빨아들였습니다. 공화당과 민주당은 이런 급격하고도 심대한 변화를 따라잡지 못했습니다. 두 정당은 여전히 전통적인 지지층에 호소하는 선거를 했고, ‘대도시에서 공장에 다니는 이민자의 자식들’은 사실상 선거에서 불려 나오지 않았습니다.

루스벨트는 바로 이들을 불러내어 민주당 투표연합으로 묶어내는 데 성공합니다. ‘대도시에서 공장에 다니는 이민자의 자식들’에게 가장 절실한 요구는 노동정책과 사회보장 정책이었습니다. 뉴딜은 그 요구를 받아 사회 질서를 바꾸는 프로그램이었고, ‘보이지 않는 유권자’였던 이들은 대거 투표장으로 몰려 나왔습니다. 그 파괴력은 엄청나서 남부 지역당에 불과하던 민주당은 루스벨트 이후 40년 가까이 미국 정치를 사실상 지배합니다. E. E. 샤츠슈나이더는 20세기 미국의 정치학자입니다. 고전으로 평가받는 〈절반의 인민주권〉에서 샤츠슈나이더는 이렇게 씁니다. “1932년 선거는 공화당의 패배 이상을 의미했다. 그것은 지배계급의 전복이었다.”

근본적으로 뉴딜이란 정치를 바꿔서 유권자 정렬을 바꾸고, 결국 권력을 바꾼 혁명이었습니다. 루스벨트의 세계관이 그 뿌리에 있었습니다. 루스벨트는 사회가 다원적인 힘들 사이의 끊임없는 조정을 통해 작동한다고 믿는 다원주의자였습니다. 다원적 힘들의 관계는 언제나 변화하므로, 그를 조정하는 작업 역시 언제나 새로 이루어져야 합니다. 이것은 자유방임이 세상을 늘 최적의 상태로 가져다줄 것이라는 우파적 자유주의와 뿌리부터 다른 접근법입니다. 대공황기 미국은 노사 간 힘의 균형이 사용자 측으로 기울어져 있는 대량실업 국가였습니다. 루스벨트는 노동이 조직을 만들어 대응할 수 있도록 제도로 뒷받침하여 노사 간 힘의 균형을 맞추었습니다. 자유방임과 효율 극대화 원리에 맞서서 루스벨트가 내세운 것은 다원주의와 사회적 조정, 그리고 균형의 원리였습니다. 그 원리를 구현하려면 자유방임으로는 안 되고 사회적 합의를 새로 도입해야 합니다. 뉴딜입니다.

이것은 아무래도 노무현 전 대통령을 떠올리게 합니다. ‘균형’은 참여정부 임기 전체를 관통하는 키워드였습니다. 경남도지사로 일하는 김경수는 2010년에는 봉하재단 사무국장으로 봉하마을에서 농민들과 부대끼며 살았습니다. 노 전 대통령 1주기를 맞아 기자가 봉하마을에 갔을 때, 김경수 사무국장이 이런 말을 했습니다. “균형은 노무현 통치 철학의 핵심 원리입니다.”

균형이 깨지면 특정 부문이 웃자라기 마련이고, 이는 나머지 부문의 희생을 전제로 합니다. 장기적으로 이는 전체 시스템의 기능을 떨어뜨리므로 더 비효율적입니다. 정치는 불균형을 솎아내어 생태계가 잘 굴러가도록 도와주는 일입니다. 균형이라는 발상은 이렇듯 생태적입니다. 미국의 사회운동가 에릭 리우는 정치의 이런 역할을 ‘정원사’에 비유했는데, 생태계가 잘 굴러가도록 웃자라는 개체를 쳐내지만 그 외에는 생태계 자체의 작동에 맡기는 접근법입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이 들었다면 거의 틀림없이 동의했을 겁니다. 그가 생애 마지막에 시골 마을로 내려가서 오리농법이니 우렁이쌀이니, 얼핏 한가해 보이는 생활로 돌아간 의미도 이 생태계의 원리를 보여주고 싶어서였습니다.

노무현 전 대통령의 임기는 영남 지역주의, 수도권 집중, 양극화, 친미 편향 외교라는 불균형 상태와의 싸움으로 점철되었습니다. 노 전 대통령은 선거제도 개혁, 지역 균형발전, 격차 해소, 동북아 균형자론을 내세워 균형의 복원을 시도했습니다. “균형이란 아무래도 진보적 개념입니다.” 2007년 과학기술인 오찬 간담회에서 그가 한 말입니다. 노무현 정부가 균형이라는 철학을 실제 통치에서 충분히 구현했다고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가 퇴임 후에 준비하던 책 〈진보의 미래〉에서도 대체로 실패했다는 자평이 나옵니다. 그리고 그의 비서실장이자 친구인 문재인 대통령이 2020년 총선에서 승리한 후 내놓은 화두가, 균형이라는 접근법을 함축하는 뉴딜입니다.

이것은 마치 루스벨트 정부와 문재인 정부의 평행이론처럼 보입니다. 미국 민주당과 한국 민주당은 둘 다 오랫동안 소수파 정당의 설움을 겪었습니다. 둘 다 첫 집권은 상대 세력의 헛발질에 크게 도움을 받았습니다. 둘 다 중간선거에서 압승하며 개혁 추진력을 확보했습니다. 루스벨트는 1934년 중간선거에서 이겨 뉴딜을 밀어붙일 힘을 얻었고, 문재인 정부는 2020년 총선 압승으로 개혁 과제를 실현할 여건을 확보했습니다. 무엇보다도, 두 정부는 재난이 열어준 정치적 기회를 잡았습니다. 루스벨트 집권기는 대공황 여파로 적극적 사회경제 정책에 저항하기 어려운 시기였습니다. 2020년 한국은 코로나19 대유행 이후 경기 후퇴와 고용위기가 곧 닥쳐올 것이어서, 적극적 사회경제 정책이 시급히 요구되고 있습니다. 이 모든 맥락 위에서 두 정부가 꺼내든 카드가 뉴딜입니다.

문제는 여기서부터입니다. 루스벨트의 뉴딜은 소외된 약자들의 힘을 끌어올리고, 사회보험과 사회권 원리를 도입하고, 사회 전체의 다원적 균형을 회복하며, 그를 통해 정치의 핵심 전선 자체를 재편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그래서 “지배계급의 전복”에까지 도달했습니다. ‘한국판 뉴딜’은 현재까지는 실체가 명확하지 않습니다. 관료 주도의 규제 완화와 인프라 투자 아이템이 우선 배치된 가운데 정치가 내용을 채워나가려 시도하는 단계입니다. 전 국민 고용보험이라는 과감한 사회보험 정책이 강기정 청와대 정무수석의 메시지로 나오기도 했습니다. 구현된다면 진정으로 뉴딜이라는 이름이 붙을 만한 야심찬 기획이지만, 이후 당·정·청은 수위 조절에 들어갔습니다. ‘한국판 뉴딜’이 루스벨트가 그랬던 것처럼 사회경제적 재계약으로 나아갈지, 관료 주도의 아이템에 뉴딜이라는 포장지만 씌운 형태가 될지, 아직은 예측하기 어렵습니다. 이를 둘러싼 싸움이 문재인 정부 임기 후반부에 가장 중요한 전선이 될 것입니다. ‘전복’과 ‘기존 질서 강화’ 사이의 갈림길이 여기에 있습니다.

조국 사태, 보이지 않는 유권자들

여기서 한국판 뉴딜 연합을 만들어내는 데 성공한다면, 민주당은 한 세대 이상 가는 다수파 시대를 열 수도 있습니다. 이해찬 민주당 대표가 주창했던 ‘20년 집권론’은 이런 경로로만 작동할 수 있습니다. 루스벨트와 그의 후임자 해리 트루먼(민주당)이 연속으로 집권한 기간이 20년입니다. 하지만 실패한다면, 그때는 세계를 휩쓸고 있는 분노한 유권자의 포퓰리즘이 한국에도 상륙할 수 있습니다.

ⓒ시사IN 신선영지난해 9월2일 조국 법무부 장관 후보자가 기자간담회 장에 입장하고 있다.

세계를 거세게 뒤흔드는 포퓰리즘의 물결에는 중요한 공통점이 있습니다. 고학력 대도시 중산층에 대한 저학력 지방 노동계층의 역습입니다. 브렉시트는 영국을 뒤에 남겨두고 홀로 잘나가던 국제금융도시 런던에 대한 역습이었고, 도널드 트럼프 현상은 미국 동서 해안가의 글로벌 엘리트들에 대한 고졸 산업노동자들의 역습이었습니다. 이 현상이 한국에서도 재현될 가능성이 있을까요? 토양은 갖춰지는 중입니다. 한국에서도 대도시 고학력 상층 노동자와 나머지 사람들의 격차가 갈수록 첨예한 문제가 되고 있습니다. 상위 10%가 버는 소득이 전체 소득에서 차지하는 비중은, 노무현 대통령이 취임하던 2003년에 36.3%였다가 문재인 대통령이 취임하던 2017년에는 50.7%까지 올랐습니다.

지난해 정국을 뒤흔든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 파동은 민주당 지지 연합을 쪼갤 파괴력이 있습니다. ‘새민주’는 조국 법무부 장관 임명 강행이 잘못한 일이라는 응답이 55%입니다. 반면 ‘민주단심’은 51%가 잘한 일이라고 답합니다(〈표 5〉). 파동의 전개 과정을 보면, 표면적으로는 중상층 엘리트들 사이의 갈등이 두드러졌습니다. 그 층위 아래에는, ‘울타리 안 사람들’이 벌이는 특권의 대물림 구조에 조용히 좌절하는 ‘보이지 않는 유권자들’이 있었습니다. 조국 대란은 울타리 안과 밖을 가르는 균열, 세계적으로 포퓰리즘의 역습을 만들어낸 이 균열을 한국에서도 잠깐 활성화시켰습니다. 이때가 문재인 정부 출범 이후 최대 위기였습니다.

이 균열은 민주당의 다수파 전략을 가로막을 최대 복병입니다. 이것이 정치의 핵심 갈등축이 되면 민주당은 수도권 고학력 중산층 정당으로 포위당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서구 민주국가들의 전통 있는 진보 정당들이 정권을 놓치거나 심지어 몰락해간 바로 그 경로입니다. 민주당의 잠재적 최대 위협은 기존 야당인 미래통합당이 아니라 이 ‘역습’일 가능성이 높습니다.

정부와 여당이 던진 ‘한국판 뉴딜’이라는 전장의 의미가 이제 다르게 다가옵니다. 실업과 경기 후퇴의 위기는 코앞에 있고, 코로나19가 가져온 피해를 누가 부담해야 하는가라는 질문도 받아들고 있습니다. 재난은 매우 특별한 정치의 공간을 엽니다. 재난은 새로운 질서를 탄생시킬 기회인 동시에, 기존 질서의 기득권에게도 기회입니다. 우리는 이미 1997년 외환위기가 사회적 약자들에게만 가혹한 짐을 지우고, 결국 사회 재계약 대신 각자도생의 교훈만 남긴 실패를 경험했습니다. 코로나19 재난에서 우리는 외환위기의 실패와 다른 경로를 잡을 수 있을까요? 한국판 뉴딜은 약자를 위한 사회 재계약까지 도달할 수 있을까요? 이 질문에 앞으로 한 세대를 규정할 한국 정치의 변곡점이 들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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