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조남진5월1일 전주 한옥마을의 모습.

전라북도 전주시 구도심에서 기린대로를 따라 전주천을 넘어가면 팔복동이라는 동네가 나온다. 1969년, 이곳에는 전라북도를 대표하는 공업단지 중 하나인 전주 제1일반산업단지(전주 1공단)가 들어섰다. 50년 넘는 세월이 흘러 공장은 낡고 먼지가 쌓였다. 가동을 멈춘 공장을 쉽게 찾을 수 있었다. 일부 부지는 재개발에 나서고, 다른 부지에는 도시재생 사업의 일환인 팔복예술공장이 들어서 관광명소로 탈바꿈했다.

팔복동 1공단의 이런 변화는 인구 65만 중소도시인 전주시의 현재를 압축적으로 보여준다. 관광산업 의존도가 높아졌고, 굴뚝산업보다는 전통과 문화를 강조하기 시작했다. 개발 중심에서 벗어나 도시재생에 적극적인 2020년 어느 날, 질병이 도시를 덮쳤다. 바이러스와 재난은 지역과 도시를 가리지 않았다.

코로나19 확산 이후 전주시도 위기를 맞았다. 다른 도시와 마찬가지로 소비는 얼어붙었고 실업 위기가 높아졌다. 대기업 제조공장이 도시에서 핵심 기능을 하는 인근 군산시와 달리 전주는 영세한 중소기업이 많다. 대기업 제조공장이 지역에 자리 잡고 있다면 노동조합이 해고에 적극 대응할 수 있지만, 영세 기업이 많은 전주시에서는 개별 노동자가 해고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기 어려웠다.

지역은 좁고, 실업은 감염병만큼 빠르게 퍼진다. 영세 기업 경영자들은 서로 누가 누구인지, 각자의 사정이 어떤지 빤히 알고 지낸다. 어느 한 곳이 해고를 단행하면 둑이 무너지듯 실업자가 쏟아져 나올 가능성이 높았다. ‘해고해도 되는 분위기’를 막는 게 무엇보다 중요했다. 4월21일 전주시와 지역 기업, 노동단체, 시민사회단체가 협약한 ‘해고 없는 도시 전주 상생선언(상생선언)’은 이 같은 배경에서 등장했다. 코로나19 이후 다양한 후속조치가 중앙정부와 지방정부에서 쏟아져 나왔지만 ‘해고를 막겠다’는 선언을 지역 공동체가 함께한 것은 전주시가 처음이었다.

전례가 없던 일이라 부담이 컸다. 지자체 처지에서는 상생선언이 파기될 때 뒤따르는 정치적 부담을 고려하지 않을 수 없었다. 반대도 만만찮았다. 전주시는 상생선언 발표를 준비하는 한 달여 동안 여러 연구기관에 조언을 구했다. 외부 전문가일수록 전주시에 우려를 표했다. 구속력 있는 성과를 내기 쉽지 않고, 선출직 시장으로서도 남은 임기 동안 책임을 떠안아야 하기 때문이다.

4월29일 〈시사IN〉과 만난 김승수 전주시장은 “우리도 (외부에서 지적하는 정치적) 부담감을 잘 알고 있다. 그래도 이렇게라도 해서 실업자를 조금이라도 줄일 수 있다면 어떻게든 이 길을 가야 한다. 기업이 강제할 수 있는 법적 테두리에 있는 건 아니지만 지금 정책의 초점은 단 몇 개월이라도 함께 생존하는 데 있다. 전주 같은 중소도시는 법으로 강제하는 것보다 끝까지 함께 가보자는 일종의 분위기를 만드는 게 중요하다”라고 말했다.

ⓒ시사IN 조남진전주시내 상가에 재난지원금 카드 사용을 알리는 안내문이 붙어 있다(위).

해고 없는 도시, 전주

상생선언의 핵심에는 고용보험과 고용유지지원금이 있다. 전주시는 상생선언이라는 사회적 틀을 만든 뒤, 이 테이블에 참여하는 기업에게 고용유지지원금을 추가로 지급하는 유인책을 사용했다. 중앙정부가 지원하는 고용유지지원금을 받더라도, 기업 처지에서 부담해야 할 몫(임금의 10% 이상)이 남는다. 영세 기업 경영자 처지에서는 이 돈마저 부담스럽다고 느낄 수 있는 데다, 당장 고용을 유지하기 위해 복잡한 서류작업을 하는 것조차 품이 들어간다. 전주시가 만들어둔 상생선언은 이런 영세 기업에게 간명한 메시지를 주었다. ‘복잡한 절차는 시청이 하겠다. 기업 몫 부담금도 시가 지원하겠다. 단, 어떻게든 해고는 하지 말고 버텨달라. 협약 테이블에 포함된 분들께는 이 같은 지원을 약속하겠다.’

고용유지지원금을 받기 위한 핵심 자격요건은 고용보험 가입이다. 기업의 최소 납입금(고용보험료 6개월분)을 시청이 지원하는 사업도 병행했다. 고용보험이라는 기존 제도를 최대한 확대하고 100% 활용할 수 있도록 유도한 것이다. 물론 특수고용직처럼 법률상 고용보험 사각지대에 놓여 있는 이들까지 모두 보듬을 수 없다는 한계도 존재한다. 그러나 상생선언의 핵심은 ‘할 수 있는 일은 최대한 다 해보자’는 데 있다. 김승수 전주시장은 “중앙정부가 현재 추진 중인 전 국민 고용보험 가입 정책이 지방도시에 반드시 필요한 대책이다. 현재 같은 위기 상황에서 고용보험 가입 유무는 ‘단 몇 개월이라도 버틸 수 있느냐’를 결정한다”라고 설명했다.

해고 없는 도시 상생선언은 전주를 코로나19 이후 가장 주목해야 할 도시 공동체로 떠오르게 했다. 이미 몇 차례 선도적인 모범 사례가 있었다. 코로나19가 막 번져가던 2월과 위기가 절정에 달하던 3월, 전주시는 두 차례 전국적인 관심을 받았다. 임대인들의 자발적인 임대료 인하 운동과 전국 최초로 단행한 선별적 긴급재난기본소득 정책이다.

ⓒ전주시 제공4월21일 ‘해고 없는 도시 전주 상생선언’에 참석한 관계자들이 선언 이행을 다짐하고 있다.

임대료 인하 운동은 전주에서 시작해 전국으로 확산되었다. 2월12일 전주 한옥마을 건물주 14명이 3개월간 임대료를 10% 이상 인하한다는 ‘상생선언’을 발표했고, 언론을 통해 전국적으로 알려졌다. 지역의 훈훈한 미담으로 그칠 것 같았던 이 사례는 나비효과를 일으켰다. 전주시 전역은 물론 전국 곳곳에서 ‘착한 임대인 운동’으로 확대됐다. 전국 각지에서 동참 행렬이 이어졌다. 임대료 인하 운동이 일종의 사회 캠페인으로 확대되면서 지자체별로 캠페인에 동참한 건물주에게 세금 감면 등의 혜택을 주겠다고 선언하기도 했다.

한시적·선별적 긴급 생계지원금인 ‘전주형 재난기본소득’도 신속한 집행으로 관심이 집중되었다. 전주시는 3월10일 최대 5만명을 대상으로 52만7000원을 지원하는 선별형 기본소득 사업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조례안이 일사천리로 3월12일 통과되었다. 선별 사업이기 때문에 기초생활수급자나 차상위 계층, 아동수당, 실업급여 등 중앙정부의 개별 지원을 받는 사람들은 제외되는 선별형 지급구조를 띤다. 취약계층 지원 사각지대 해소를 위한 성격이 강하다.

전주시 곳곳에서는 어렵지 않게 ‘전주형 재난기본소득 사용 가능’이라는 안내문을 발견할 수 있다. 잡화점과 식당, 안경점은 물론 건강검진센터마저 비슷한 안내문을 붙여두고 있었다. 다른 지역에 비해 전주시에서는 조금 일찍, 조금 더 광범위하게 경험할 수 있는 풍경이었다.

전주형 재난기본소득은 중앙 정치권에서 정치적 논쟁이 벌어지며 더 주목받았다. 김경수 경남도지사, 이재명 경기도지사 등이 재난기본소득 어젠다를 주도하긴 했으나 중앙정부 차원에서는 논의 속도가 붙지 않던 상황이었다. 이 와중에 인구 65만명 지방도시에서 관련 조례안이 통과된 것이다. 과거 경기도 성남시가 기초자치단체로는 이례적으로 청년수당 같은 복지정책 어젠다를 이끈 적이 있지만, 전주시는 재정과 인구 모두 성남시와 비교하기 어려운 비수도권 중소도시다.

난제의 연속이었다. 가장 먼저 부딪힌 문제는 재원 마련. 대다수 지자체가 중앙정부의 2차 추경과 보편적 재난지원금 발표를 기다리는 동안 전주시는 재난 관련 기금(재난관리기금·재해구호기금)을 활용하는 묘수를 꺼내들었다. 재난 관련 기금이란 풍수해나 가뭄 같은 자연재해 피해를 복구하기 위해 지자체가 적립해두는 기금을 의미한다. 이를 활용하기 위해서는 기금 용도 확대를 중앙정부가 허가해야 하는데, 전주시의 건의안이 통과되어 시 예산 163억원 외에 재난 관련 기금 100억원을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이 사례 역시 전국적으로 확대됐다. 전주시의 이 같은 움직임으로 지방정부는 선별형 긴급 지원을, 중앙정부는 전 국민을 대상으로 하는 포괄적 지원을 추진하는 일종의 역할 분담이 자리 잡게 됐다.

코로나19 확산은 지방정부에 공포를 안긴다. 확진자 발생 자체가 특정 지역의 경제·사회적 기능을 마비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물리적 방역이 지방정부의 최우선 과제로 꼽힌다. 소독을 철저히 하고 의료지원을 아끼지 않으며, 재원을 적재적소에 투입하는 데 지방정부의 역량을 총동원해야 한다.

방역은 단순히 바이러스를 막는 데에만 그치지 않는다. 코로나19가 지역경제에 줄 타격은 불을 보듯 뻔했고, 그중에서도 대규모 실업이 지역사회의 공포로 점차 커져가고 있었다. 모두가 ‘경제적 방역’이 필요한 시점이라고 체감하지만, 지역 차원에서 할 수 있는 일은 제한적이라고 믿고 있었다.

전주시 사례는 지역사회, 지방정부의 경제적 방역에 경계가 무의미하다는 걸 보여준다. 임대료 인하 운동부터 전주형 재난기본소득, 해고 없는 도시 상생선언은 모두 지방정부, 특히 기초자치단체의 통상적인 업무 패러다임으로는 발상과 시행이 쉽지 않은 사례다.

세 가지 정책이 지역에서 호응을 얻고 빠르게 추진될 수 있었던 배경에는 지역 시민사회의 적극적인 협력도 한몫했다. 언론의 스포트라이트를 받은 건 정책을 집행하는 지방정부지만, 결국 ‘함께 버티자’는 약속은 시민사회가 동참해야 출발선에 설 수 있다. 전주시 관계자들은 지방정부가 가용할 수 있는 자원이 제한적인 비수도권 도시일수록 ‘사회적 연대’가 무형의 자산으로 작동한다고 설명한다. 특히 전주에서 가장 중요하게 작동한 네트워크가 바로 소규모 마을 공동체였다.

“시대가 많이 바뀌었다. 사회적 재난이 발생했을 때 우리 같은 자원봉사센터는 중간지원 조직 역할을 하고, 지역사회의 다양한 마을 공동체가 주인공이 되어 이들에게 협력을 요청해야 한다.” 전주시 자원봉사센터 박정석 센터장은 코로나19 이후 추진한 각종 봉사활동에서 마을 공동체의 역할이 중요했다고 설명했다. 과거에는 자원봉사센터가 등록된 봉사자들을 이끄는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면, 최근에는 다양한 동네별 점조직에 사안별로 협력을 요청하는 방식으로 지역 자원봉사 시스템이 작동한다.

코로나19 이후 지역에서 추진한 주요 사업에도 이들 마을 공동체가 적극 참여했다. 소외계층에게 마스크를 제공하기 위해 포장하고, 개강을 맞아 전주로 돌아온 1900여 명 중국 유학생에게 지원 물품을 분배하고, 급식 중단으로 고통받는 농가를 위해 김치를 만들어 판매하는 등 손이 여럿 필요한 일에 으레 지역의 마을 공동체가 자원봉사센터를 찾아 힘을 보탰다. 전주시가 매주 수요일 진행하는 일제 소독운동에도 사회적 기업 100여 곳과 마을 공동체(온두레공동체) 70여 곳, 도시재생센터 5곳이 동참하고 있다.

이 같은 마을 공동체는 최근 도시재생 사업과 함께 확대되는 추세다. 지방정부에서도 사회적연대지원단(국 규모)을 편성해 각 행정동별 마을 공동체 구성·운영과 사회적 기업 양성을 돕고 있다. 그동안 구축한 소규모 네트워크가 코로나19 확산 국면에서 사회적 협력을 이끌어내는 커뮤니케이션 축이 되었다. 전주 한옥마을에서 전국 최초로 임대료 인하 운동이 시작된 것도 이 같은 지역 공동체가 이전부터 구축되어 있었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전주에서는 코로나19 확산 이전부터 한옥마을을 비롯한 젠트리피케이션 위험 지역에서 건물주와 임차인의 상생 협력을 돕는 ‘함께가게’ 사업을 추진했다. 이 사업은 건물주의 임대료 동결을 유도하는 지역 공동체 사업이었지만, 이 논의가 확장되어 임대료 인하 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

지역사회 구성원들의 이른바 ‘선한 영향력’도 지역에서 화제를 모으며 연대 움직임을 강하게 만들었다. 3월16일 전주시청을 찾은 한 택시기사는 자신의 중간 퇴직금 168만3000원을 기부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코로나로 다들 어려운 요즘, 택시 타는 승객마다 남기는 원망과 한숨 소리가 제 마음을 아프게 하네요. 사실 저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습니다. 하루 14시간 일하고 있습니다. 손님이 있으면 아무리 화장실이 급해도 태우게 되고 밥도 굶고 일하게 됩니다. 퇴직금을 받아서 ‘가구를 살까? 침대를 살까? 아이들을 위해 쓸까?’ 생각이 많았습니다. 그러다가 코로나 위기 극복 정책에 대한 전주시장 인터뷰를 보고 기부를 결심하게 됐습니다. 나보다 더 어려운 이웃을 위해 이 돈을 써주십시오.”

ⓒ시사IN 조남진코로나19 취약계층을 위해 써달라며 신혼여행 비용을 전주시에 기증한 김나란(왼쪽)·유대현 부부.

지방정부와 시민의 신뢰관계 구축

지역사회를 감동시킨 작은 기부가 이어졌다. 4월14일 세 아이를 키운다는 한 남성도 기부에 동참했다. “아동돌봄쿠폰(40만원)이 지급된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우리보다 어려운 다른 아이들을 위해 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는 쿠폰 금액에 해당하는 돈에 자신의 돈 10만원을 보태 50만원을 만들고 그동안 모은 마스크 38장과 함께 전주시청에 기부했다. 뒤따라 다른 가족도 아동돌봄쿠폰에 자신들이 따로 모은 돈을 더해 300만원을 기부하기도 했다.

자영업을 하는 소상공인 신혼부부 유대현(35)·김나란(32)씨도 이런 움직임에 함께한 이들이다. 유대현씨는 20대에 서울로 가서 음악가로 활동하다 2년 전 고향으로 돌아와 지역에 안착했다. 김나란씨도 남미·남극·인도 등을 여행하며 자유롭게 부유하다 다시 고향에 정착했다. 두 사람은 지난해 처음 만나 올해 3월 결혼할 예정이었다. 코로나19 확산으로 인해 결혼식을 미루게 되었다. 신혼여행을 가려고 모아둔 300만원을 의미 있게 사용하고 싶었다. 마침 다른 지역에서 한 신혼부부가 신혼여행 경비를 울산대병원 의료진에게 기부했다는 소식에 용기를 낼 수 있었다. 유씨와 김씨는 “기부를 하고 나니 지역사회에 더 안착했다는 기분이 들었다”라고 말했다.

전주시는 전라북도에서 가장 큰 도시지만 1년 예산 규모(1조4468억원)는 비슷한 인구 규모를 지닌 수도권 안산시(2조2062억원)에 미치지 못한다. 전주시 사례는 비수도권 지방도시 공동체일수록 소규모 네트워크 같은 비자본적인 자원을 동원해야 하고, 행정 분야에서도 더 큰 상상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모든 도시가 전주와 같은 길을 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시민들이 지역 공동체를 키워나가는 데에는 오랜 준비가 필요하고, 도시마다 산업구조도 다르기 때문이다.

재난은 역설적이게도 지방도시가 장기적으로 어떻게 공동체를 유지해야 하는지를 보여준다. 가장 적극적이고 장기적인 재난 예방은 지방정부와 시민들 간의 신뢰관계를 구축하는 일이다. 그동안 대규모 토목사업과 외연 확장, 외부 산업시설 유치로 점철되었던 지방도시의 ‘성장’ 패러다임이 코로나19 이후로는 크게 바뀌어야 함을 전주시는 보여주고 있다.

기자명 전주·김동인 기자 astoria@sisain.co.kr 다른기사 보기 astori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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