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국 질병통제예방센터(CDC) 제공스페인 독감이 유행했던 1918년 미군이 감염된 병사들을 분리해 관리하는 모습.

인류 역사에는 태풍같이 몰려왔다가 안개처럼 사라진 병마가 많다. 대표적인 건 15세기 말에 시작해 16세기까지 영국을 강타한 발한병(發汗病·sweating sickness)일 거야. 최초 발병 기록은 1485년 8월. 영국의 왕위를 둘러싸고 귀족들이 혈투를 벌인 ‘장미전쟁’이 종료될 즈음이었어. 병의 증세는 매우 간단했어. ‘땀을 흘리면서 잠에 빠졌다가 그냥 죽는다.’

발한병을 연구한 의사 존 케이어스의 증언을 보면 그야말로 괴질이라는 표현이 적합할 것 같구나. “환자는 흑사병보다 더 심한 고통과 괴로움을 당했다. (···) 어떤 사람은 창문을 열다 죽었고, 어떤 사람은 거리에 접한 문에서 아이들과 함께 놀다 죽었으며, 어떤 이는 발병한 지 한 시간 이내에, 그리고 대다수가 두 시간 이내에 죽었고, 길어봤자 즐겁게 점심 만찬을 들고 슬픈 저녁 식사를 맞곤 했다(〈한국경제신문〉 1995년 5월18일).”

특이한 건 이 병은 주로 영국에서 발생했다는 점이야. 1529년 대유행 때 딱 한 번 도버 해협을 건너 독일 지역까지 퍼진 적이 있지. 그해 독일 헤센주 마르부르크에서는 종교개혁가 마르틴 루터와 울리히 츠빙글리가 치열한 교리 논쟁을 벌이고 있었어. 그런데 발한병 유행으로 회담이 중단되고 말았지. “두 사람은 서로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각자의 길을 갈 수밖에 없었고 개신교의 두 교파인 루터파와 칼뱅파의 분열은 되돌릴 수 없이 굳어지고 말았다(장항석, 〈판데믹 히스토리〉).” 그런데 이 발한병은 1551년의 유행을 마지막으로 다시는 나타나지 않았고 역사의 수수께끼로 남게 돼. 왜 발병했고, 왜 영국에 집중됐으며, 왜 사라졌는지 인류는 발한병에 대해 아는 게 없어. 20세기에도 비슷한 병이 있었지. 도무지 원인을 알 수 없고 치료법도 모르는 채 수천만 명의 목숨을 거둔 뒤 홀연히 사라진 병. 바로 ‘스페인 독감’이라 불린 인플루엔자 바이러스(H1N1)야.

스페인 독감은 제1차 세계대전 말 미국에서 처음 발병했어. 곧이어 이 전염병은 세계대전에 참전한 미군들의 발걸음을 따라 유럽으로 번지면서 전 세계를 강타했지. 학자에 따라 다르지만 최소 2500만명, 많이 잡을 경우 1억명에 가까운 사망자가 발생했다고 하니 그 위력을 짐작할 수 있을 거야. 그야말로 지옥도가 세계적으로 펼쳐진 셈이야. 당시 사람들이 얼마나 답답해했는지는 미국에서 벌어진 일 하나로 짐작해볼 수 있다.

미국에서만 이 병으로 55만명이 사망하자 미국 정부는 교도소 수용자에게 사면을 조건으로 생체실험을 제안했어. 독감 백신을 얻어보기 위한 고육책이었지. 수용자 62명이 자원했다. 그러나 실험은 별 소득 없이 끝났어. “연구팀은 죄수들의 눈, 귀, 입에 독감 바이러스를 뿌리고 독감 희생자의 허파 조직을 주입했다. 독감 환자를 데려와 죄수들 코앞에서 기침을 하게 했고 급기야 환자의 배설물을 죄수 목 안에 발랐다. 그래도 죄수들은 멀쩡했고 실험팀 의사 한 명이 죽었을 뿐이었다(〈조선일보〉 2003년 12월14일).”

각지에서 의사와 과학자들은 필사적으로 스페인 독감과 맞섰다. 영국에서 독감이 걷잡을 수 없이 번질 무렵 맨체스터의 보건의료 담당관이었던 제임스 니븐은 독감의 확산 경로를 추적했어. 계절마다 보는 평범한 독감이 아니라고 판단한 거지. 니븐은 맨체스터의 학교들을 폐쇄하라고 촉구했어. 하지만 당시 교육 관료들은 니븐이 병의 위험을 과장한다고 일축했단다. 니븐은 자기 혼자 전단을 찍고 벽보를 붙이며 사람들에게 위험을 호소했어. 독감의 위험성을 경고하는 영화까지 상영했지. 바로 100년 뒤인 오늘날 각국 정부가 하고 있는 일이야. 그 노력으로 맨체스터 시민 수천 명이 목숨을 지켰어. 영국 런던에서 근무하던 의사 배질은 간호사들에게 마스크를 씌우기 위해 갖은 노력을 다했단다. “환자들이 불편해할까 봐” 마스크를 거부하던 간호사들이 환자를 뒤따르듯 죽어가는 것을 보며 그는 울부짖었어. “마스크를 쓰세요. 마스크를 벗은 뒤엔 버리고 새 마스크를 쓰세요.” 역시 100년 뒤 우리가 하고 있는 일이지.

ⓒViginia Commonwealth University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의 유전자 배열을 재구성한 병리학자 제프리 토벤버그.

나흘 만에 3만9000배로 증식하는 괴력 발휘

스페인 독감은 그야말로 태풍처럼 지구를 휩쓴 뒤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당시 사람들은 대체 무엇이 이런 참사를 불러왔는지 몰랐어. 전자현미경이 발명되기 전이었거든. 인류는 박테리아보다 더 작은 ‘바이러스’의 실체를 파악할 수 없었단다. 가공할 위력만큼이나 스페인 독감은 빠르게 잊혔어. 하지만 그 병의 정체를 까발리려 꾸준히 노력해온 이들도 있었지. 스웨덴 출신의 미국 의사 요한 훌틴도 그중 하나였어.

1951년 스물일곱 살 대학원생이었던 훌틴은 바이러스 연구자로부터 색다른 정보를 얻었어. 만약 스페인 독감 희생자의 시신이 영구동토에 묻혔다면 부패되지 않았을 것이고 그 폐에 바이러스가 남아 있을지도 모른다는 것이었지. 만약 시신에서 바이러스를 검출할 수 있다면 스페인 독감의 원인을 밝힐 수 있다는 얘기였어. 훌틴은 이 말을 듣고 이누이트의 땅으로 찾아갔다. 바깥 세계의 질병에 취약했던 이누이트들은 스페인 독감으로 인구의 60%가 죽어갔다고 해. 그중 한 마을의 묘지에 가서 땅을 파헤친 끝에 죽은 시신의 폐에서 조직을 떼어오는 데 성공했지. 그러나 바이러스를 검출해내지는 못해. 훌틴은 독감이 새롭게 유행할 때마다 얼음을 깨고 희생자들의 폐 조직을 찾아보자고 호소하지만 아무도 귀를 기울이는 사람이 없었어. 심지어 ‘공상과학’이라고 비웃음을 당했지.

그런데 46년 뒤인 1997년, 오랫동안 바이러스를 연구해온 병리학자 제프리 토벤버그가 포르말린 용액 속에 저장된 희생자의 폐 조직을 다룬 논문을 발표했어. “훌틴이 연구하던 1950년대에는 바이러스를 분석할 기술이 없었지만 토벤버그 시절은 바이러스의 염기서열을 읽어내는 기계가 만들어진 뒤였다(서민, 〈청소년을 위한 의학 에세이〉).”

이 논문이 나올 무렵 훌틴은 일흔셋의 노인이었지. 의사뿐만 아니라 목수, 발명가, 심지어 자동차 안전 설계자로 바쁜 일생을 보냈단다. 그러나 젊었을 때 놓쳤던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에 대한 기억이 새삼 그의 가슴을 뛰게 했어. 훌틴은 즉각 토벤버그에게 편지를 썼지. “스페인 독감 희생자들이 묻혀 있는 곳을 알고 있소.” 훌틴은 수십 년 전 자신이 방문했던 이누이트 마을의 공동묘지를 찾아서 바이러스를 머금고 있는 희생자의 폐를 확보하는 데 성공해. 이를 전달받은 토벤버그와 동료들은 연구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2005년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의 8개 유전자 배열을 재구성하는 데 성공한다. 20세기를 통틀어 가장 잔인하게 인류를 할퀴고 간 학살자의 정체가 밝혀지는 순간이었지. 수십 년 만에 깨어난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는 실험체의 폐에서 나흘 만에 3만9000배로 증식하는 엄청난 괴력을 과시했다고 해. 이런 실험을 통해 스페인 독감의 원인인 바이러스가 그즈음 유행하던 조류독감(AI)과 매우 유사한 바이러스라는 사실이 밝혀졌지. 연구진에 따르면 “스페인 독감 바이러스는 결국 인간에게 적응된 조류독감”이었던 거야.  

인류는 바이러스의 정체를 밝혀낼 기술을 터득했지만 아직 이 바이러스들을 제어할 수단은 확보하지 못했어. 제프리 토벤버그가 말한 대로 “눈에 보이지 않는 무서운 테러리스트인 자연” 앞에서 인간은 미약하고 무력하니까. 하지만 인류의 역사는 미약함을 조금이나마 보강하고 무력함을 어떻게든 떨쳐내면서 발전해온 것이기도 해. 그 동력은 “죽어가는 사람들을 살려야 한다”라는 절박한 휴머니즘, “다시는 사람들을 죽어가게 하지 않겠다”라는 인간애의 다짐이었단다.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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