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격 수업을 즈음해 회의는 날마다 이어졌다. 모두가 처음 가는 길이었다. 정해진 건 아무것도 없고, 뜻을 모아야 하는 사안은 산더미였다. 가벼운 일거리부터 처리하면 속도가 날 것 같았다. 나는 가벼운 이야기랍시고 담임 소개 건을 꺼냈다. 교사와 학생이 서로 알지 못하니 개학 전에 오리엔테이션 게시물을 올리면 좋지 않겠느냐는 의도였다. 다들 수긍하는 분위기이기에 나는 ‘셀카’ 영상을 어떻게 찍어야 할지 모르겠다고 너스레를 떨었다. 돌아오는 반응이 묘했다. 휴전선을 그은 것처럼 회의실 공기의 반은 차갑고 반은 뜨거웠다.
“온라인에 얼굴을 공개하고 싶지 않아요. 사진 띄우는 것도 부담스럽네요. 대신 학급 소개 영상 따로 제작할게요.” 차분한 목소리가 어색한 공기를 갈랐다. 누구보다 열성적으로 온라인 수업을 준비해온 분이었다. 아이들이나 학부모에게 자랑삼아 본인을 내세워도 될 법한데 결심이 단호했다. 다른 여자 선생님 한 분이 조심스럽게 의견을 보탰다. “저는 듀얼 넘버 쓰고 프로필도 얼굴로 안 해놓거든요. 좁은 동네인데 노출되는 게 부담스럽더라고요. 남자 선생님들은 모두 사진 걸어놓으셔서 놀랐어요.”
여교사 딸 살해 모의한 공익근무요원 이야기
전혀 의식하지 못했다. 나는 전화번호를 두 개 쓴 적도 없고, 벚꽃이나 풍경으로 프로필 사진을 채우지 않는다. 동료 여선생님의 비어 있는 프로필을 보아도 그저 취향 탓이겠거니 했지, 사생활 유출의 공포가 반영된 거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다. 몇 해 전 부모 또래의 여성 선배 교사와 나눈 대화가 기억 깊숙한 곳에서 튀어나왔다. “신규 선생일 때 말이야. 시골 학교 관사에 있으면 누가 창문을 자꾸 퉁퉁 쳤어. 문 앞에서 지저분한 농지거리도 하고. 자물쇠를 두 개, 세 개 채워놓고 지냈지.”
선배는 담담하게 야만의 시대를 회고했다. 밑도 끝도 없는 음담패설, 젊은 여교사를 교장·교감 옆에 붙여 술 따르기, 3차로 간 노래방에서 억지로 추는 블루스…. 지옥의 전설은 가까이 있었다. 나는 “언제 적 일이에요? 말도 안 돼”를 연발했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신안군 흑산도에서 20대 여교사가 학부모 3명에게 집단 성폭행을 당했다는 뉴스를 들었다. 지옥의 문은 여전히 열려 있었다.
‘n번방 사건’ 관련 청와대 국민청원에서 ‘박사방 회원 중 여아 살해 모의한 공익근무요원 신상공개를 원합니다’를 눈여겨봤다. 여아 살해를 모의한 강 아무개씨는 고등학생 시절 담임을 맡았던 여교사를 상습 협박한 혐의로 징역 1년2개월을 복역하고 출소했다. 출소한 뒤 사회복무요원으로 일하며 다시 협박을 일삼았다. 살해를 음모한 여아는 그 여교사의 딸이다. 사회적 관계에 서투른 제자를 진심 어린 태도로 상담해주던 담임선생님은 9년간 정상적인 생활을 하지 못했다.
나는 담임을 하면서 제자에게 스토킹당할지 모른다는 두려움을 가져본 적 없다. 선택적으로 두려움을 뿌리치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그런 위협을 가정하지 않는다. 안전은 내가 인식하는 세계의 기본값이다. 내가 공기처럼 누리는 평화가 남성이기에 가능했음을 일깨워준 건 동료들의 생생한 증언이었다.
나는 불편한 진실을 마주할 때마다 소름이 돋았다. 더 섬뜩한 건, 내가 금세 평정심을 회복한다는 사실이었다. 얕은 수준에서 여성들의 이야기에 공감하는 듯하지만, 의식의 밑바닥에서는 결국 이 모든 서사가 나와는 거리가 먼 다른 세계의 일이라는 본능적인 안도감을 느끼는 것이다. 나는 해맑은 얼굴로 무심할 수 있는 권리를 누리고 있었다.
내가 누리는 권리가 정당하지 못하다는 걸 기억하려 의식적으로 노력한다.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자꾸 무관심한 상태로 내빼는 나를 잘 알기 때문이다. 특정 성별만 누리는 이상한 특권은 모두가 나누어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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