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이명익

의과대학 수업은 머리보다 체력을 요구했다. 오경재 교수(원광대 예방의학교실)는 대학 시절 자주 조는 학생이었다. 조는 중에도 또렷이 들린 말이 있었다. “‘나무 하나하나에 정성을 들인다고 숲 자체가 건강해지지 않는다. 숲 전체를 봐야 한다. 의학도 개인이 아니라 전체가 건강해지는 법을 고민해야 하는 학문이다.’ 교수님이 그 말씀을 하는데 정신이 번쩍 나더라고요.” 그 말에 의지해 ‘인기 없는’ 예방의학을 선택했다. 3평 남짓한 진료실에 평생 앉아 지내지 않아도 된다는 것만으로도 좋았다. “근데 제가 잘 몰랐어요, 시골 출신이라. 전공의가 돈을 잘 벌더라고요(웃음).”

오경재 교수는 장점마을 환경비상대책 민관협의회 민간위원 중 한 사람이다. 역학조사 당시 조사방향이나 연구방법 등 전반적인 내용을 검토했다. 환경부와 마을 주민, 민관협의회 위원들 사이에 역학적 관련성을 두고 갑론을박이 이어졌을 때도 그가 묘안을 냈다. 조사 결과를 한국역학회에 넘기자며 설득했다. ‘역학적 관련성이 있다’는 결론이 나기까지 지난한 싸움의 최전선에 오 교수가 있었다.

역학조사를 전후해 여러 번 장점마을을 찾았다. 주민들 몰래 다녀가곤 했다. “저도 사람이라 감정이입이 돼요. 장점마을은 내용을 알면 알수록 북받치는 게 있어요. 객관적으로 보고 의학자로서 태도를 유지하려면 일부러라도 거리두기를 할 필요가 있어요. 그게 마을 주민들에게도 더 도움이 되고요.”

처음부터 장점마을 문제에 관여한 건 아니었다. 역학조사 개시가 결정되고 난 뒤 의학적 부분을 검토할 사람이 필요하다는 요청이 왔다. 망설임이 없지 않았다. 환경문제는 인과관계를 다투기 매우 까다로운 분야다. 그럼에도 외면하기 어려웠다. 대도시에 비해 여러 자원이 부족한 지역사회에서 전문가로서 기여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했다.

오 교수는 2019년 11월 역학조사 결과 발표 이후 사그라진 언론의 관심이 걱정이라고 했다. “역학조사는 끝이 아니라 시작이에요. 언론은 끝이라고 생각했는지 쏙 들어갔지만(웃음). 앞으로가 더 중요하고 후속조치가 잘 되고 있는지 감시가 필요해요.” 3월5일 오후 원광대 의과대학 연구실에서 오경재 교수를 만났다. 그는 PPT 자료까지 준비해 취재팀을 맞이했다.

 

ⓒ시사IN 이명익금강농산에서 유기질비료를 만들 때 사용했던 연초박은 담배를 만들고 남은 부산물이다.

환경오염 피해로 인한 비특이성 질환의 역학적 관련성을 인정한 첫 번째 사례였다.

연초박은 사실상 담배다. 담배는 발암물질로 널리 알려져 있다. 담배 만들 때 그나마 ‘좋은’ 부분을 쓴다. 부산물인 연초박은 찌꺼기여서 환경이나 인체에 유해할 거라고 생각했다. 고열을 가해서 만드는 유기질비료 공정 자체도 유해성을 극대화하는 방법이었다. KT&G가 담배를 생산하고 남은 부산물을 비용을 들여 폐기 처분하는 대신 돈을 받고 팔아 수익을 챙겼다. 금강농산은 법에 정해진 대로 퇴비를 만든 게 아니라 부가가치를 높이기 위해 불법적으로 공정을 바꿨다. 행정기관에서는 모니터링을 전혀 하지 않았다. 장점마을 주민들은 사실상 ‘간접흡연’에 20년 가까이 무작위로 노출된 거다. 그것도 굴뚝을 통해 대량으로. 이건 인과관계를 규명하지 못하는 게 더 어렵다고 판단했다.

연초박이 담배만큼 위험하다면 왜 애초 법으로 금지하지 않았을까?

연초박을 단순 폐기물 취급해서 법적으로 안 걸러지는 게 문제였다. 발암물질이지만 많은 공장에서 취급하는 물질이 아니기 때문에 사각지대에 있었던 거다. 비료관리법에서 연초박으로 퇴비는 만들어도 된다고 돼 있는데, 제가 알고 있는 과학적 상식으로는 퇴비로 만드는 것도 안전하지 않다. 퇴비가 오히려 유해물질을 퍼뜨리는 셈이다. 퇴비로도 못 쓰도록 법을 바꿔야 한다. 농촌진흥청에서 재활용할 수 없도록 개선하기로 했다.

담배를 떠올렸을 때 생각하는 피부암이나 폐암이 아니라 다소 연관성이 부족해 보이는 암도 많이 발병했다.

그 때문에 부정적으로 해석하려는 사람이 많았다. 이걸 이해하면 좋겠는데, 담배는 9000여 가지 유해물질과 70가지 발암물질 덩어리다. 단일 물질이 아니라 혼합물이다. 담배라는 특이성 때문에 발암물질과 암이 일대일로 성립되지 않고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상호작용에 따라 수십 가지 암이 발생할 수 있다. 그리고 사람에 따라 질병을 일으키는 트리거(방아쇠)는 다 다르다.

역학조사는 2018년 12월에 마쳤는데 발표가  미뤄져 2019년 11월에야 결과가 알려졌다.

환경부에서 매우 소극적이었다. 왜 이렇게 안 되는 쪽으로만 논의를 끌고 가는가 봤더니 파급효과를 우려하더라. 전국에서 환경문제를 다 들고일어날 수 있다고. 그동안에도 비특이성 질환에 대해 인정되지 않은 게 그런 이유구나 싶었다. 당사자인 마을 주민들은 반박할 만한 전문지식도 없으니까. 장점마을은 운이 좋았던 게 전문가들이 결합해 있었다. 저만 해도 예방의학 전문의로서 환경부에 계속 근거를 대고 반박했다. 그래도 안 되어서 타협을 한 게 제가 한국역학회에 전문가들이 많으니 결과를 그쪽으로 가져가보자고 제안했다. 환경역학 전문위원들이 모여서 결과를 검토해 ‘역학적 관련성이 있다’고 확인해줬다. 앞으로 다른 문제에서도 마찬가지일 텐데, 이런 문제가 발생했을 때 피해자 처지에서 생각해야 한다. 증명 책임을 비전문가인 피해자에게 미뤄서는 안 된다. 대책은 사람 중심이어야 하지 않겠나.

환경부와 견해차가 가장 컸던 부분은?

환경부에서 주장한 내용 중 하나가 ‘인정하기에는 대상자 수가 너무 적다’는 것이다. 인과관계를 말할 때는 표본이 커야 한다는 거다. 건강조사나 통계조사처럼 전체를 대표할 수 있으려면 대상자 수가 커야 한다. 하지만 환자 대조군 연구는 수가 많을 필요가 없다. 이건 대상자가 적을 때 인과관계가 질적으로 훨씬 높은 연구다. 이런 질환은 발생하면 병원으로 오기 때문에 전부 추적이 가능하다. 전수가 확보된다는 의미다. 환경부 주장대로라면 환경문제는 대규모로 발생해야만 인정된다. 대도시에서만 가능하다. 대상자 수의 의미를 없애기 위해서 유해물질에 노출된 사람과 아닌 사람을 비교하는 거다. 장점마을과 비슷한 규모의 마을, 함라면, 익산시, 전라북도, 전국 이렇게 비교했을 때 (암 발생률이) 많게는 수십 배까지도 높게 나왔다. 한 마을에서 평생 같이 산 사람들이라 조건이 다 같다. 마을 주민 중 누군가 음식을 짜게 먹었을 수는 있다. 그런데 다른 마을은 안 그럴까? 비슷한데 여기만 데이터가 튀는 건 특별한 이유, 다른 지역에는 없는 요인이 있다는 거다. 또 하나가, 이건 내가 정말 분노하는 부분인데, ‘많은 사람들이 사망해서 알기 어렵다’고 했다. 건강 문제에서 가장 결정적인 정보는 사망이다. 그게 가장 강력한 증거다. 그런데 죽은 사람을 조사 못해서 알 수 없다고 했다. 내가 그랬다. 파묘(破墓)라도 해서 부검하자고. 그런 주장은 정말 딴지를 걸기 위해서라고 해석할 수밖에 없다.

ⓒ시사IN 이명익2월27일 익산시로부터 장점마을 환경개선사업을 위탁받은 ‘지역연구소 플랜플러스’가 설명회를 열었다.

그럼에도 역학적 관련성이 인정됐다.

반박-재반박이 정말 치열하게 오갔다. 중간결과 발표 때 ‘개연성은 있지만 제한점이 있어서 인정은 어렵다’고 했다. 환경부는 ‘그래도 우리가 이만큼이나 받아들였어’라고 칭찬받고 싶었던 것 같은데, 최재철 주민대책위원장이 그날 한 말이 있다. “이거 먹고 떨어지라는 거냐?(웃음)”

익산시가 환경개선사업 일환으로 경로당 안에 진료실이 포함된 건물을 마을에 짓기로 했다.

지금은 예산도 급하게 편성돼 일단 쓰느라 바쁜데, 안정적으로 후속조치를 하려면 기금 형식으로 관리할 방법을 찾아야 한다. 민관협의회 회의 때 건강관리 방향에 대해 더 논의할 수 있는 구성체를 만들자고 했는데 그 부분은 안 받아들여졌다. 암은 잠복기가 길기 때문에 평생 관리해야 한다. 대상자도 현재 암 환자로만 한정지어서는 안 된다. 유해물질에 오래 노출됐기 때문에 암 외에도 심혈관 질환 등 아직 안 나타난 질병까지 고려해야 한다. 마을 전체가 집단 노출된 것을 가정해 클러스터를 형성해서 관리해야 한다. 코로나19도 신천지 전수조사한 게 집단 발생했기 때문이지 않나. 일반검진은 건강보험에서 커버하고 있기 때문에 유해물질이 일으킬 수 있는 질환 위주로 집중 검진을 해야 한다. 정신건강과 심리적인 부분은 지금 손도 못 대고 있다.

금강농산 터 활용을 놓고도 여러 이야기가 있다.

지금은 용역을 줘서 결론이 어떻게 날지 모르겠는데. 처음 시에서 어린이 평화공원, 생태 테마공원 이런 걸 얘기해서 내가 정말 펄쩍 뛰었다. 절대 하면 안 된다고 했다. 사후관리 차원에서 조사가 시작됐지만 공장 터는 오염이 얼마나 더 심할지 아직 알 수 없다. 그런 장소에 아이들이 뒹굴 수 있는 테마공원을 만든다? 아무래도 지자체는 언제든지 보여주기식 행정으로 흐를 가능성이 높다. 임기 안에 성과를 만들어야 하니까. 그보다 더 급한 것들이 많다. 특히 농산물 문제다. 시에서 매입해 폐기하는 건 또 한번 낙인을 찍는 꼴이다. 안전한지 아닌지를 빨리 파악해주는 게 먼저다.

환경부는 앞으로 어떤 점이 바뀌어야 할까?

환경부가 지원하는 건 ‘피해구제’ 하나뿐이다. 하나마나다. 생색내기지. 인정해주는 것도 그동안 들어가는 진료비 정도다. 그건 보상이 아니다. 결국 예산이 중요하다. 환경부도 기획재정부를 설득해 정부 차원에서 환경문제와 관련해 쓸 수 있는 예산을 확보해두어야 한다. 또 환경 전문가를 양성해야 한다. 환경역학도 정말 열악하다. 환경부 안에서 전담하는 전문가도, 부서도 없다. 역학조사도 외부에 발주하면 관련 전공자들 모아서 하는 거다. 연속성·지속성·전문성이 약할 수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런 문제가 생기면 제대로 다루지도 못하고 소통도 안 된다. 환경문제가  전국적으로 지도를 그려놓고 보면 어마어마하게 산재해 있다. 질병관리본부처럼 상시 기구화해서 인력과 역량을 갖춰야 한다. 문제가 터지고 나서 수습하는 것보다 사전에 예방하는 게 비용 부분에서도 훨씬 효율적이다.

예방의학 관점에서 장점마을 사례는 어떤 의미가 있나?

한국 산업화 과정에서 사람은 뒷전이었다. 이제 와서 환경문제가 여기저기서 터지는 건 필연이다. 장점마을을 계기로 관리 모델 매뉴얼을 만들면 좋겠다. 장점마을은 후속조치를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엄청난 역사적 기회가 될 수 있다.

기자명 장일호 기자 다른기사 보기 ilhostyle@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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