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이명익이수정 교수는 “스토킹을 구애행위로 취급한다. 강간 개념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국회의원은 여성 생명권과 관련된 법률을 다루면 안 된다”라고 말했다.

2018년 여름, 이수정 경기대 범죄심리학과 교수는 망막박리증 진단을 받았다. 망막이 안저에서 떨어져 시력장애를 일으키는 병이다. 연구자로서 치명적이었다. 좌절의 시간을 보냈다. 수술한 눈에 가스를 채우고 한 달간 엎드려 있을 때 방송출연 제의를 받았다. 범죄영화에 대해 코멘터리하는 프로그램이었다. 말만으로 가능한 일이었다. 제작진의 기억에 따르면 이 교수는 섭외 당시 이렇게 말했다. “범죄영화를 엔터테인먼트로 소비하는 매체는 관심 없다. 여성이나 아동 같은 피해자 입장에서 다룬다면 모르겠지만….” 그렇게 네이버 오디오클립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영화 프로파일〉이 시작됐고 1년 만인 최근 같은 제목의 책이 출간됐다.

영화를 통해 가정폭력, 성범죄, 미성년자 보호 문제 등을 짚었다. 〈가스등〉에서 가스라이팅의 어원을 찾고, 개봉 당시 새로운 로맨스 영화로 평가받았던 〈번지점프를 하다〉에서 그루밍 성폭력을 읽었다. 몇 번이나 강조하는 건 ‘피해자’다. 방송을 들은 범죄 피해자들이 사연을 보내오기도 했다. 그사이 눈은 호전되었다. 이제야 계단을 헛딛지 않게 되었다. ‘n번방 사건’도 있었다. 이 교수는 기적처럼 시력을 회복한 자신의 오른눈처럼 n번방 사건 피해자의 고통도 끝날 수 있다는 걸 믿어주면 좋겠다고 말한다. 이수정 교수를 경기대에서 만났다. n번방 사건으로 NHK 취재진이 다녀간 직후였다.

눈 상태는 어떤가?

영원히 부등시를 안고 살아야 한다. 왼쪽 눈과 오른쪽 눈의 이미지가 현저히 다른데 한쪽은 심한 근시, 한쪽은 심한 원시라고 보면 된다. 지금은 좀 나아졌지만 두세 달 전까지 컴퓨터로 문서 작업을 하는 게 힘들었다. 30분 타이핑하면 두통과 어지러움이 온다. 예전으로 돌아갈 수는 없다. 처음엔 좌절감이 컸다. 보고서도 못 쓰는 연구자가 무슨 쓸모가 있나 싶었다. 그즈음에 오디오클립 출연 제안을 받았다. 한쪽 눈이 안 보여도 입 놀리는 건 가능하니까. 심리학자라서 할 수 있는 얘기 위주로 했다.

방송에서 살인마보다 귀신이 무섭다고 했는데?

귀신은 무섭다(웃음). 영화에선 살인자가 신비주의적이고 전지전능한 인물로 자주 나오지만 현실은 (화성 연쇄살인사건의) 이춘재라고 보면 된다. 무능력하고 보통사람보다 부족함이 있는 편이다. 우리는 과도한 불안감이 있다. 그런 걸 얘기해주고 싶었다.

피해자를 자주 강조한다. 특히 사법기관 종사자가 피해자의 입장에서 생각할 수 있는 감수성을 가져야 한다는 말이 인상적이었다.

한국의 형사사법제도는 피해자를 위한 제도가 아니다. 그런데도 마치 정의를 실현하는 것처럼 구는데, 나는 좀 거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피해자를 증인으로만 생각한다. 더 이상 존재 가치가 없으면 외면하는 게 현실이다. 말 그대로 정의를 실현하려면 피해를 회복시키는 것까지 포함해야 한다. 피해를 당하게 한 책임도 국가에 있는 거니까.

피해자보다는 범죄자를 이해해야 하는 직업이다.

SBS 〈그것이 알고 싶다〉를 통해서든 수사 자문을 통해서든 사건을 들여다볼 기회가 있을 때마다 ‘피해를 당한 사람은 무지 안타깝고 억울할 텐데’ 하는 생각이 있었다. 처음 만난 살인사건의 범죄자가 실은 가정폭력 피해자들이었다. 경남 마산에서 가정폭력에 시달리던 모녀가 남편이자 아빠를 살인하고 시신을 토막 내 매장했는데 일부가 증발했다. 경찰에서 나더러 그걸 물어봐달라고 했다. 당시 강력계에는 여자 수사관이 없었다. 면담하면서 이들이 가해자가 아니라 피해자였다는 걸 느꼈다. 경찰이 작성한 조서를 보니 범행 동기가 ‘앙심’이라고 되어 있었는데 공감이 안 됐다. 가정폭력으로 죽음을 넘나드는데 무슨 앙심이 있었겠나. 연구를 보면 보통 가정폭력 피해 여성이 남편을 죽이는 이유는 악의나 원한, 즉 고의가 아니고 ‘공포’ 때문이다. 앙심의 실체가 뭘까. 그걸 밝히는 데 인생을 투자해도 아깝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사IN 이명익3월25일 ‘n번방’ 박사방의 운영자 조주빈이 검찰에 송치되기 전 종로경찰서를 나오고 있다.

당시 기사를 찾아보니 가정폭력 이야기가 거의 없고 ‘무서운 모녀’ ‘비정한 모녀’로 표현됐다.

딸이 간호사였다. 엄마를 어떻게든 도와줘야겠다는 생각에 의학적 지식을 동원해 밤새 토막 낸 거다. 대한민국의 형사사법제도가 그렇게밖에 해줄 수 없나. 형사정책을 모르지만 어떻게든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갖게 됐다. 지금도 가정폭력처벌법의 ‘반의사 불벌(피해자가 처벌을 원치 않으면 가해자를 처벌할 수 없는)’ 조항 때문에 싸우고 있다. 내가 여자가 아니었다면 앙심이라 해도 별다른 느낌이 없었을 거다. 가부장 질서에 반하는 극단적인 인면수심의 범죄라고 생각한 거잖나. 남자였다면 비슷한 생각을 했겠지.

성범죄에 대한 관심도 꾸준했던 것 같다.

2000년 무렵 법무부 요청으로 분류심사 절차 만드는 일을 했다. 교도소에서 죽음이 많이 발생했다. 위험한 사람은 여유로운 공간에 배치하고 위험하지 않은 사람은 밀집된 생활을 해도 문제 없으니 심사 절차를 만들어 분리 수용의 근거로 삼겠다는 거였다. 위험한 사람을 심리할 수 있도록 절차를 만들어달라고 했다. 법학에서 위험한 사람을 어떻게 정의하는지 궁금해 형법학자를 찾아다녔다. 형법에 형량이 나와 있고 양형이 무거운 사람이 제일 위험한 사람이라고 했다. 결국 살인범이었다. 내가 가진 재소자 데이터의 절반 이상이 살인자였다. 살인범은 초범도 있고 전과자도 있고 잡다했다. 살인만으로는 위험 정도를 파악하기 어려웠다. 일부 초범 살인자 중에 여자들이 있었는데 다수가 가정폭력 피해자였다. 이들이 더 이상 무슨 살인을 하겠나. 위험하다고 정의하기 어려운 거다. 구제받지 못한 피해자였다.

그래서 어떻게 분류했나?

재범 가능성을 판단할 근거가 부족해 영어 논문 등을 뒤졌더니 미국에서 가장 위험한 범죄자는 성범죄자였다. 지금은 한국도 교도소에 있는 재소자의 반 이상이 성범죄자다. 당시엔 우리나라 성범죄 형량이 유달리 짧아 성범죄자 데이터가 없었다. 길어야 2년6개월 징역형이었다. 반의사불벌죄 조항 때문에 가해자가 피해자와 돈 주고 합의하면 유야무야 증발되는 범죄였다. 그땐 막연하게 유교 전통 때문에 성범죄가 적다고 생각했다. 미국에서 제일 위험하다고 분류하는 소아성애자들도 당시 데이터엔 없었다. 성폭력 피해자가 13세 미만인 경우도 없었다. 조두순 같은 경우가 교도소에는 없었다. 아동성범죄도 안 일어나는 줄 알았다. 역시 유교적 전통 때문에.  

ⓒ시사IN 신선영‘십대여성인권센터’ 활동가가 성매매 알선 및 청소년 성착취에 이용되는 모바일 앱을 모니터링 하고 있다.

결과적으로 누가 가장 위험한가?

전과 13범이 있었는데 일곱 번이 금고형 이상이었다. 강간, 강간미수, 강제추행 등이었다. 당시 강간을 해서 들어왔는데 2년6개월 형기였다. 형량에 전과가 누적되지 않은 거다. 출소 6개월을 앞두고 있었는데 전력만 봐도 나가서 또 일(범죄)을 저지르겠구나 알 수 있었다. 미국 기준에 따르면 그가 가장 위험한 사람이고, 이 사람을 만나보면 위험이 뭔지 알 것 같았다. 법무부에 요청하고 이리저리 찔러봤지만 성사가 안 됐다. 민간인한테 보여준 전례가 없고 보안상의 이유라고 했다. 젊은 여자인데 사고 나면 누가 책임지느냐는 거다. 미국에서 공부할 때 성범죄자 연구를 했다. 살인이 예고된 사람들은 죽일 의지가 없어도 피해자가 반항하면 죽인다. 이춘재도 살인을 저지르기 전 연쇄 성범죄자였다.

전자발찌 도입 당시에도 관여했는데?

대상자 선별 기준을 만드는 데 참여했다. 성범죄자 데이터를 가진 사람이 당시 나밖에 없었다. 어떻게 보면 우연이다. 학생들이 자주 범죄 심리학자나 프로파일러가 되고 싶다며 메일을 보내는데 답을 잘 안 한다. 어쩌다 이렇게 됐는지 모르기 때문이다. 돌이켜 생각해보면 몸부림 쳐왔던 걸로 보인다. 부당하긴 한데 해결하기 위해 뭘 해야 할지 알 수 없었다. NGO도 있겠지만 연구자가 할 수 있는 게 무엇인가 고민했다.  

가정폭력을 이야기할 때 부부 간 폭력은 통계로 잡히지 않는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경찰에 입건되면 전산상에 입력해야 하는데 부부 항목이 아예 없다. 친족만 있다. 가정폭력처벌법이 적용되면 가정폭력이지만 상해가 심하면 형법으로 넘어가 가정폭력으로 집계되지 않는다. ‘여성의 전화’에서 가정폭력으로 사망하는 여자의 숫자를 집계하기는 한다. 유엔에선 파트너 폭력(Intimate partner violence)이라고 말하는데 우리는 국가가 이 통계 자체를 내지 못한다. 일단 혼인관계에 놓여 있지 않으면 취급을 안 하고 형법이 적용되면 다 빠져나간다. 경찰에 데이트폭력이나 가정폭력으로 신고하는 사람이 연간 22만 건 정도다. 여성단체가 집계한 게 10만 단위다. 겹치는 걸 고려해 20만 정도로 보고 있다. 재판까지 가는 건 몇백 건이다.

원가정 보호를 중시하는 것 같다.

가부장제 때문이다. 가정은 실체가 없다. 아주 공고한 관념일 뿐이다. 그 관념은 진보적인 사람이라 해서 다르지 않다. 특히 기성세대들이 그렇다. 어느 수준 이상의 계층들, 폭력이란 걸 경험해보지 않은 사람들은 막연하게 가정은 좋은 인간관계로 구성되어 있고 지지적인 환경이라 생각하고 유지되어야 한다고 본다. 그렇지 않다. 폭력이 있으면 가정으로 취급하면 안 된다.

ⓒ전소영 제공네이버 오디오클립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영화 프로파일〉 녹음 장면.

가정폭력의 경우 상담을 조건으로 기소유예를 내리기도 한다.

그만큼 오만한 제도를 못 봤다. 기소유예라는 면죄부를 주기 위해 상담받으라는 건데 매 맞는 여자를 교육의 대상으로 삼는 거다. 피해자를 보호해야 한다는 개념은 한참 뒤에 나왔다. 건강하지 못한 가정을 교육의 대상으로 삼아 갱생의 기회를 주겠다는 시혜적인 아이디어다. 상담이 이루어지는 가정폭력상담소도 초창기와 지금의 주체들이 너무 달랐다. 처음엔 반여성적인 분위기도 있었다. 한번은 가정폭력상담소장을 수업에서 봤는데 계도가 안 되더라. 피해 여성이 맞을 짓을 했다는 등 무지렁이로 취급했다. 그냥 나는 세대를 바꾸고 싶다. 세대마다 생각이 다르다. 가정을 바라보는 관점 자체가 바뀌어야 한다.

살인의 예비적 행위로 스토킹에 주목했는데?

지난해 KBS가 1심 선고가 끝난 381건의 살인과 살인미수 사건을 전수 조사한 결과 여성 피해자의 30%가 살해 전 스토킹에 시달렸다는 사실을 보도했다. 죽이기 전에 행적을 추적해야 하잖나. 피해자를 미행하는 시기가 바로 스토킹이다. 그걸 범죄화할 수 있으면 목숨을 잃지 않아도 된다. 강서구 전처 살인 사건도 남자가 새벽에 나오는 여자를 공격한 건데 그 시간대에 나오는 걸 모르면 어떻게 일이 벌어졌겠나. 올해도 별거 중인 남편이 아내와 아들, 딸을 죽이려다 딸만 간신히 살아남은 사건이 있었다. 사건 전 아이들에게 구애 행위 비슷한 걸 했다. 미행하는 느낌 때문에 피해자가 불안해했다. 피해자는 어느 시점엔 죽을 수 있다는 걸 아는데 그걸 보호해주지 못하면 세금은 왜 내는 건가. 스토킹 방지법은 표류 중이다. 얼마 전 국회 국민청원으로 n번방 사건이 올라와 국회의원들이 토론한 내용이 공개됐는데, 딥페이크가 예술이라는 둥 청소년기에는 그렇다는 둥 무지몽매한 말들이 나왔다. 이러니 스토킹도 구애행위로 취급하는 거다. 강간 개념을 정확히 알지 못하는 국회의원은 여성 생명권과 관련된 법률을 다루면 안 된다고 본다.

n번방 사건을 보며 어떤 생각이 들었나?

조짐은 있었다. 조건 만남이 그것이다. 청소년 가출팸 사이에서 일종의 비즈니스였다. 남자 청소년이 성관계 영상을 촬영해 남성 협박에 가담했고 그게 조건 강도다. n번방 사건도 비슷하다. 청소년을 매개로 성착취물을 찍은 다음 그걸 이용해 돈을 벌었다. 조건 만남은 2000년대 초반부터 있었고 학업 중단자, 가출 청소년이 많아지면서 폭발적으로 증가했다. 어떻게 보면 연계되어 있다. 가정은 아이를 학대하고 학교는 학교폭력으로 아이를 내쫓고 소년법 아래 보호가 필요한 아이들까지 다 처벌하고. 기술적 부분은 소라넷에서 답습하고 진화된 것 같다.

앞으로 어떻게 되리라 보는가?

입법하지 않으면 계속될 거라 본다. 조주빈이 처벌받는다고 1만5000명 (조주빈이 운영한 박사방 회원 수) 모두 처벌된 게 아니다. 의외인 건 총선과 함께 덮일 줄 알았다. 우리 사회가 그런 걸 불편해한다. 이번엔 총선이 끝나도 안 덮였다. 시민들이 움직이기 시작한 거 같다. 계속 댓글 올리고 청원 올리고 그러면서 유지되는 것 같다. 목소리가 잦아들지 않으면 입법될 수도 있다. 장애물이 많지만.

10대 성매매의 유입 경로가 되는 랜덤채팅 앱을 규제해야 한다고 말했는데?

지난여름 랜덤채팅 앱을 다운받아서 깔았는데 사방 천지에서 쪽지가 날아왔다. 10만원, 7만원, 5만원 준다며 제안하는 거다. 대화창을 오래 열어놓으면 애플리케이션 회사에서 커피 쿠폰을 준다. 아이들이라는 먹잇감이 있어야 성인 남자가 오고 먹잇감을 오래 붙드는 방법으로 쿠폰을 주는 거다. 이런 회사들을 왜 처벌하지 않나. 처벌하면 영세한 정보통신 사업자들은 죽는다는 건데 대낮에 불법이 자행되는 걸 보고도 보호해야 하는 건지 모르겠다. 아동유인방지법(온라인으로 미성년자를 유인하는 행위 자체를 처벌)이 있으면 이런 대화가 오가는 플랫폼 업체에도 책임을 지울 수 있다.

미성년자 의제강간 연령을 높여야 한다고 강조했다.

 의제강간 연령(동의 여부와 관계없이 아동과 성행위를 할 경우에는 형사처벌 대상이 되는)을 13세 미만에서 16세 미만으로 높이는 건 상징적인 일이다. 디지털 범죄 생태계의 바닥에 있는 13~16세 여자아이들은 n번방 사건의 가장 큰 피해자이기도 했다. 그동안 청소년의 성을 보호하는 데 관심이 없었다. 문제아고 처벌 대상으로 여겨 보호관찰소에 보내버렸다. 그런데 처벌 대상이 아니라 보호 대상이 되는 거다. 아동·청소년은 건드리면 안 된다는 규범이 생기는 거다.

피해자를 외면하는 게 가해행위의 연장선이라는 말에 뜨끔했다.

나부터도 성매매 여성을 보고 자발적인 거라고 생각하면 편하다. 애초부터 원해서 한 걸까? 왜 성착취라고는 생각하지 못했을까? 구조되어야 한다는 생각에 미치지 못했다는 점에서 반성하는 부분이 있다. 조건 만남을 한 아이들을 처벌 대상으로 삼는 게 잘못이라는 생각을 최근에서야 하기 시작했다. 알려고 안 했던 우리의 책임은 없느냐는 거다. n번방 사건을 보며 양심의 가책을 많이 느꼈다. 예상했으면서 더 적극적으로 대응하지 않았다. 더 급한 일이 있어서 그랬다지만 이것보다 더 급한 일이 어디 있나.

리벤지 포르노는 잘못된 용어인가?

포르노는 동의를 전제하기 때문에 아동 포르노그래피라는 게 있을 수 없다. 리벤지 포르노도 마찬가지다. 게다가 리벤지라고 하는 순간 복수할 만한 일이 있었다는 전제를 깔게 된다. 어휘가 사고를 제약한다. 강남역 살인사건 당시 욕을 많이 먹었다. 여성단체에서 여성혐오 범죄로 말하는데 그렇게 부르는 순간 여성이 혐오 대상이 되는 거다. 굳이 지칭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여성인권 운동으로 인해 굉장히 많은 게 변했다.

미국에선 교도소가 많은 지역에서 공부했다.

주민이 교도관들이라 치안이 좋았다. 성범죄자들에 대한 치료감호(civil commitment) 제도가 인상적이었다. 치료 목적의 보호수용 제도다. 현재 출소가 임박한 성범죄자를 심사하러 가면 조두순 저리 가라 하는 사람이 여럿이다. 나영이 같은 피해자를 여러 명 양산한 범죄자를 보면 시한폭탄을 내놓는 기분이다. 사방천지가 놀이터다.
아이들의 비명소리가 성적으로 느껴진다고 했다. 현재로선 그 사람을 잡아놓지 못한다.

여자라 피해자 고통에 더 공감했다면 여자라서 어려운 점도 있었을 것 같다.

일하는 여성이 겪는 어려움이 마찬가지로 있었다는 정도다. 내가 바깥일을 함에도 우리 집 애들이 범죄 피해를 받거나 가해를 하지 않고 정상적으로 성장한 건 다행스러운 일이다. 후회되는 일은 딸을 너무 제약해서 키웠다는 거다. 나더러 성차별주의자라더라. 여자라서 안 된다고 키웠으니까. ‘밤늦게 들어오면 안 된다, 혼자 모르는 사람을 만나면 안 된다.’ 너무 많은 걸 알아서 딸에겐 부담이 되었던 것 같다. 아들을 잘 가르쳤어야 되는데 그 부분은 매우 미안하게 생각한다.

입법 안에서 해결할 게 많다. 정치권의 러브콜도 있었을 텐데?

송충이는 솔잎을 먹을 때 가장 건강하다고 생각한다. 전공 영역 같으면 벌써 갔을 거다. 열정과 선의만 가지고 되는 일은 아닌 것 같다. 그랬다면 국회에 간 지인들이 입법을 했을 거다. 그만두는 데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겠지. 지난해 BBC가 ‘영향력 있는 여성 100인’으로 나를 왜 선정했을까 생각해보면, 20년 동안 해온 일 때문일 거다. 정치인이었으면 선정되지 않았을 거다. 이미 정치를 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옳다고 생각하는 방향으로 송충이처럼 꿈틀꿈틀 가고 있다.

직업적으로 어려움을 겪을 때는 없나?

조현병 환자가 찾아온 적이 있다. 1박2일 동안 지키고 있다가 학교 연구실에서 만났다. 자기 머릿속에 내가 있다더라. 언론에 자주 나오니 꽂힌 것 같다. n번방 사건 때문에 협박 메일도 받았다. 경찰이 2시간 동안 내 컴퓨터를 조사했다. 결국 메일을 보낸 이를 알아냈는데, 하루는 신경 쓰여도 다음 날 되면 걱정이 사라진다. 20년이나 이 짓을 해왔다. 경계심이 덜한 편이다.

〈이수정 이다혜의 범죄영화 프로파일〉을 진행한 이다혜 기자가 본인이 분에 못 이길 때마다 그래도 나아지고 있다는 확신을 주었다고 했는데?

좋아지고 있다. 20년 전 내가 가진 데이터에서는 성범죄자가 10%밖에 안 됐다. 그렇게 처벌이 안 된 거다. 이제는 반이 넘는다. 대법원도 디지털 성범죄에 대한 양형 기준을 높이라고 권고했다. 얼마나 큰 변화인가. 방송국이나 기자들의 요청에 응하는 건 세상의 눈곱만한 변화도 나 혼자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기자들이 기사화하고 작가들이 프로그램에서 다뤄주어야 한다. 그 방향이 옳으면 돈이 안 돼도 한다. 공감대를 형성하는 과정이다.

기자명 임지영 기자 다른기사 보기 tot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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