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주당, 편을 가를 것인가 합쳐서 이길 것인가
  • 천관율 기자
  • 호수 650
  • 승인 2020.03.02 12: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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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체성 차이를 강조하는 정치는 협력의 범위를 확장할 수 없다. 팬덤 정치 역시 정체성 정치와 놀랍도록 닮았다. 총선을 앞둔 민주당 위기의 뿌리가 여기에 닿아 있다.
ⓒReuter2016년 7월9일 미국 루이지애나주에서 열린 흑인 시위에서 드레스를 입은 아이샤 에번스가 무장 경찰에 홀로 맞서고 있다.

〈시사IN〉은 제649호 ‘혐오, 선을 넘다’ 기사에서 영화 〈기생충〉, 감염병 바이러스인 코로나19, 그리고 숙명여대의 트랜스젠더 여성 입학 불발 사건을 소재로 혐오 감정의 본질을 탐구했다. 기사는 숙명여대 입학을 포기한 트랜스젠더 A씨의 글로 끝난다. “자신과 상대방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미지의 존재에 대한 공포는 더 알아가고자 하는 호기심이 되어야지, 무자비한 혐오여서는 안 된다. 혐오는 진정한 문제를 가리고, 다층적인 해석을 일차원적인 논의로 한정시킨다.”

사실, 이것은 이야기의 끝이 아니다. 더 많은 이야기의 시작이다. A씨의 글에서, 그리고 A씨의 입학을 반대했던 이들의 글에서, 우리는 형태만 바꿔 세계 곳곳에서 오랫동안 반복되어온 뿌리 깊은 논쟁을 발견한다.

Scene 1. 숙명여대

A씨는 우리가 서로 얼마나 다른지 이야기하기 위해 “자신과 상대방이 같은 사람이라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라고 쓴다. 그녀의 입학을 반대한 6개 여대의 23개 학회·동아리·소모임은 ‘여성의 권리를 위협하는 성별 변경에 반대한다’라는 성명서를 냈다. 성명서는 이렇게 쓴다. “실질적 평등을 위한 여자들만의 공간과 기회는 여자의 것이어야 한다.” A씨는 ‘같은 사람’이라는 공통의 기반으로부터 출발한다. 반대하는 이들은 ‘여성’이라는 생물학적 정체성으로부터 출발한다. 이 차이는 보기보다 크고 근본적이다.

‘정체성 정치’는 21세기 정치를 설명하는 핵심 키워드다. 우리 시대의 유권자는 자산·소득과 같은 고전적인 구분선을 따라 나뉘기보다는, 인종·종교·젠더 등 정체성에 따라 나뉘는 것처럼 보인다. 흑인은 흑인끼리, 무슬림은 무슬림끼리, 성소수자는 성소수자끼리 뭉친다. 이건 어느 정도는 자연스러운 현상이지만, 집단적 특성을 기준으로 유권자를 결집시키는 노력의 산물이기도 하다.

정체성 정치는 기본적으로 소수자 정치다. ‘백인 대졸 고소득 남성의 정체성 정치’ 같은 건 없었다. 주류 사회의 주변부로 밀려나는 인종과 종교와 젠더가 정체성 정치의 동력이 된다. 따라서 진보적 기획이었다. 흑인이, 무슬림이, 여성이, 자신들의 정체성 때문에 차별받는다는 자각은 차별을 철폐하라는 사회운동을 만들어냈다. 트랜스젠더 입학 반대 성명서가 ‘여성의 권리’를 제목으로 내걸 때, 이 성명서는 진보적인 소수자 운동의 계보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당장 딜레마가 떠오른다. 이것이 진보적 소수자 운동이라면, 트랜스젠더라는 소수자에게 혐오 발언(이게 왜 혐오 발언인지는 제649호 ‘혐오, 선을 넘다’ 기사에서 다루었다)을 하는 현실은 무엇인가. 정체성 정치는 이 모순을 다룰 수 있을까.

Scene2. 블랙 라이브즈 매터

‘블랙 라이브즈 매터’(Black Lives Matter, BLM)는 21세기 미국의 흑인 인권운동을 대표하는 슬로건이다. “흑인의 생명이 소중하다”라는 뜻이다. 경찰 공권력에 흑인 용의자가 사망하는 사건이 잇따라 일어나면서 BLM은 2010년대 초반부터 사회운동으로 불붙었다. 2016년 도널드 트럼프 대통령 당선을 전후로 찬반 논란이 격렬해졌다. 반감을 가진 시민들은 대항 구호로 “All Lives Matter(모든 생명이 소중하다)”를 외쳤다.

2017년 9월16일, BLM 활동가 몇 명이 수도 워싱턴의 트럼프 지지 집회에서 항의 시위를 하고 있었다. 두 집회 사이에 긴장이 고조되던 와중에, 트럼프 지지 집회의 지도자 토미 건이 갑자기 BLM 시위의 지도자 호크 뉴섬을 단상으로 불렀다. 건은 뉴섬에게 마이크를 넘겨주며 이렇게 말했다. “표현의 자유 시간입니다. 우리 무대에서 2분을 당신에게 주겠습니다. 사람들이 당신에게 동의하든 아니든 그건 중요하지 않아요. 당신이 말을 할 권리를 가졌다는 게 중요하죠.”

ⓒAP Photo도널드 트럼프 미국 대통령이 2월19일 지지자 집회에서 연설하고 있다.

뉴섬은 마이크를 넘겨받았다. 그는 돌발로 주어진 2분을 이렇게 시작했다. “저는 미국인입니다. 미국인은 나라가 어딘가 망가지면 그걸 고치려 움직입니다. 그게 이 나라의 미덕입니다.” 박수가 나오고 분위기가 누그러졌다. 뉴섬은 이어서 민감한 주제, BLM의 목표인 공권력의 흑인 차별 문제로 들어갔다. 그러자 다시 야유가 쏟아지고 긴장이 고조됐다. 청중석에서 “All Lives Matter” 구호가 나왔다. 이때 뉴섬이 “Black Lives Matter”를 외쳐 맞받아쳤다면 이날의 2분은 적대감만 끌어올리고 끝났을 것이다.

뉴섬은 그러지 않았다. 대신 그는 이렇게 말했다. “정말이지 당신들 말이 맞습니다. 모든 생명이 소중하지요. 그렇지 않습니까? (박수) 그래서 흑인 한 명이 생명을 잃을 때, 우리 모두가 정의를 잃는 것입니다. 그것이 우리가 ‘흑인의 생명이 소중하다’라고 외치는 이유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미국을 다시 위대하게 만들고 싶다면(이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대표 구호다), 우리 이 일을 함께 합시다.” 청중석에서는 박수와 “USA” 연호가 터져 나왔다. 연단에서 내려온 뉴섬은 트럼프 지지자들과 악수를 나눴다. 자기 아들을 뉴섬에게 안겨주고 함께 사진을 찍은 아버지도 있었다. 미국의 신생 매체인 ‘나우디스뉴스(Now This News)’가 페이스북에 이날 일어난 일을 영상으로 올리자, 좋아요 12만 개와 댓글 9500개가 달리는 폭발적인 반응이 따라왔다.

뉴섬은 정체성 정치를 했는가? 어떤 의미로는 그랬다. 그는 흑인이라는 정체성에서 출발하여 흑인 특유의 문제를 해결하려 했다. 정체성은 이 운동의 출발점이었다. 하지만 어떤 의미로는, 이것은 정체성 정치가 아니었다. 뉴섬은 흑인과 백인의 정체성 차이를 없는 척하지 않고 정면으로 보았지만, 둘의 차이를 강조해서 문제를 풀려 들지도 않았다. 그는 흑인의 생명이 특별히 중요하다고 말한 게 아니라, 흑인의 생명을 보호하지 못하면 모든 생명이 소중하다는 보편 원칙이 훼손된다고 말했다. 그런 문제를 그냥 두고 보지 않고 바로잡는 것이 “흑인의 일”이라고 하지 않고 “미국의 미덕”이라고 말했다.

소수자라서 겪는 문제를 바로잡는 전략으로 소수자의 특별한 권리를 내세우는 대신, 인간이라면 누구나 갖고 있는 보편적 권리에 호소한다. 소수자도 ‘보편적 권리의 원’ 안에 포함될 수 있도록 원을 넓혀야 한다고 호소한다. 이것은 당연해 보이지만 의외로 흔히 보기 어려운 태도다. 정체성의 문제를 다룰 때, 우리는 대부분 ‘보편의 원’에 호소하기보다는 정체성 그 자체에 호소한다. 우리는 타고난 편 가르기 전문가다. 왜 그런지를 알려면 우리 종의 머릿속으로 들어가볼 필요가 있다.

Scene 3. 수렵채집민 회로

지난 호 기사에서 우리는, 혐오 감정의 인지적 뿌리를 우리 뇌의 작동 방식에서 확인했다. 우리 뇌에서 미움을 관장하는 일련의 경로는 ‘미움 회로’라고 불린다. 미운 대상을 보면, 우리 뇌의 무리짓기와 구별짓기와 공격성 본능을 관장하는 시상하부가 자극받는다. 뇌섬·조가비핵·편도체가 따라서 반응하는데, 이 부위는 모두 변연계에 있다. 변연계는 진화적으로 좀 더 오래된 감정을 관장하는 곳으로, 한때 ‘파충류의 뇌’라고 불리기도 했다. 여기서 역겨움과 분노와 공포가 자극받는다. 반대로 이성을 관장하는 전두엽은 활동성이 떨어진다.

그런데 이 ‘미움 회로’는 ‘사랑 회로’라고 불리는 곳과도 상당히 겹친다. 우리 뇌는 두려움이나 불안을 느꼈을 때 무리짓기와 구별짓기로 대응한다(시상하부). 이렇게 내집단과 외집단을 나누고 나면, 내집단을 향해서는 사랑과 결속과 대규모 협력을 만들어내고(‘사랑 회로’), 외집단을 향해서는 분노와 공포와 역겨움을 느끼게 된다(‘미움 회로’). 우리 종에게 매우 중요한 협력과 결속의 기능이 작동하는 바로 거기에, 혐오와 배척의 스위치가 함께 내장되어 있다. 뇌과학자인 정재승 교수(카이스트)는 이렇게 설명한다. “내집단에 대한 사랑과 애착, 외집단에 대한 혐오와 배척, 이 둘은 정반대로 보이지만 사실은 한 회로에서 처리되는, 붙어 있는 감정입니다. 그래서 이걸 ‘수렵채집민 회로’라고 부르기도 해요.” 연구자들은 왜 이런 묘한 이름을 붙였을까?

우리 종이 진화해온 수렵채집민 시절, 풀어야 할 당면 과제는 협력이었다. 신체 능력이 탁월하다고 보기 힘든 인류는 다른 동물들을 뛰어넘는 협력 능력을 발휘한 덕에 살아남아 번성했다. 매머드 사냥부터 달 탐사까지, 인류는 협력의 규모와 범위를 갈수록 키워가면서 진보해왔다. 대형 동물 사냥에 성공하면 이웃과 고기를 나눠 먹는 게 유리하다. 냉장 시스템이 없던 시절에 고기는 금세 썩고, 사냥의 결과는 예측하기 쉽지 않다. 내가 사냥에 성공한 날 이웃을 먹이고, 이웃이 사냥에 성공한 날 나를 먹이면, 서로 협력하지 않을 때보다 둘 다에게 이득이다. 어느 문화권이든 음식을 나누는 행동은 선의와 호의를 드러내는 기본 행동이어서, 우리는 도시락 반찬을 나누지 않는 친구에게 유난히 가혹하다. 2010년 지방선거에서 무상급식 정책을 반대한 정치인들은 자신들이 보편적 복지정책에 반대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실제로는 도시락 반찬을 나누지 않는 친구로 비쳤다.

그러나 협력은 보기보다 훨씬 까다로운 도전 과제다. 기후위기를 해결하려면 인류가 다 함께 힘을 모아서 탄소 배출량을 줄여야 한다. 다른 나라들이 탄소를 줄이는 동안 우리나라만 탄소를 더 많이 배출하면, 다른 나라가 손해를 보는 덕에 우리만 더 풍족하게 살 수 있다. 우리가 그러는 것을 보고 모두가 그런 식으로 살게 되면 결국 탄소 배출량은 줄어들지 않는다. 협력이 어려운 이유는 협력이 좋다는 걸 몰라서가 아니라, 공동의 노력에 무임승차하는 ‘배신자’를 막기가 무척 어려워서다. ‘협력’이라는 공동의 노력을 파괴하는 ‘배신자’는 언제나 출현할 수 있다. 게임이론에서 유명한 딜레마다.

이 딜레마를 뛰어넘는 힘 중의 하나가 외집단의 압력이다. 맹수로부터 집단 방어 체계를 구축하려면, 대형 동물을 사냥하려면, 혹은 다른 부족과 전쟁을 하게 된다면, 끈끈한 결속이 필수다. 협력하지 않고 도망가는(‘배신자’) 구성원이 많을수록 맹수나 다른 부족을 이기기는 어려울 것이다. 외집단 압력에 맞서 살아남으려면 상반된 두 과제를 동시에 해내야 한다. 집단은 커져야 하고, 커지면서도 유대와 결속으로 묶여야 한다.

진화인류학자인 로빈 던바는 이 복잡한 사회적 과제를 해결하는 과정에서 우리가 유난히 큰 뇌와 복잡한 인지능력을 가진 종으로 진화했다고 본다. 맹수로부터 방어하려 할 때, 자원을 지키려 할 때, 다른 집단과 전쟁을 치를 때, 필요한 집단의 크기가 갈수록 커진다. 던바는 이걸 5명 내외의 가족부터 1500명 내외의 부족까지 여섯 단계로 구분했다. 150명 내외의 공동체 단위가 4단계에 해당하는데, 다른 집단의 습격을 방어하는 도전에 필요한 단위다. 우리는 지금도 이 정도 숫자의 친구와 안정된 사회적 관계를 유지하고, 이 숫자가 넘어가면 친밀감을 유지하는 걸 어려워한다. 안정된 사회적 관계의 기준선으로 ‘150’은 ‘던바 넘버’라는 별명이 붙어 있다.

이제 ‘수렵채집민 회로’라는 이름이 붙은 이유를 알 수 있다. 인류는 외부의 위협을 인식할 때 안으로 결속하고 밖으로 적대하는 반응을 보인다. 현대 사회에서도 이 본능적 반응은 살아남아서, 외부의 공격이 눈앞에 올 때면 정치 지도자의 지지도가 올라간다. 2001년 9·11 테러 직후 조지 부시 당시 대통령의 지지율은 90%로 조사 역사상 최고치를 기록했다.

우리는 타고난 편 가르기 전문가이지만, 그저 그것만은 아니다. 우리는 ‘우리’에 속하는 범위를 갈수록 넓혀온 종이기도 하다는 사실을 던바는 보여주었다. 진화적으로 전개되어온 ‘우리’의 확장 과정을, 이제 인류 문명은 지성을 이용해 더 밀어붙이려 한다. 던바는 진화 연구자이므로 1500명 단위의 부족에서 멈췄다. 하지만 인류는 종교 공동체, 민족 공동체 등으로 ‘우리’의 범위를 넓혀왔다. 기후위기는 ‘우리’의 범위가 인류 전체로 넓어질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문명 전체가 걸린 도전이다. 우리는 편 가르기 전문가인 동시에, 우리 편의 범위를 끊임없이 확장해온 경험자다. 우리가 이 두 특성을 동시에 가진다는 점이 이 이야기 전체에서 결정적인 대목이다.

Scene 4. 갈림길

정체성 정치는 소수자 차별에서 출발하지만 곧 두 갈래로 나뉘곤 했다. 한쪽으로는 소수자가 보편적 존엄과 권리에 누락되지 않도록 ‘우리’의 범위를 확장하는 전략이 있다. 호크 뉴섬이 이 경로를 선택했다. 다른 한쪽으로는, 소수자 집단이 얼마나 고유하고 특별한지를 강조하는 길이 있다. 이것은 정체성 그 자체를 그들만의 독특한 권리의 원천으로 삼는 것으로, 차이의 원칙을 내세우는 것이다. A씨의 숙대 입학을 반대했던 성명서에는 차이의 원칙이 작동하고 있다. 우리 뇌는 차이의 원칙에 더 쉽게 반응한다.

이 갈림길은 거의 모든 소수자 정치에서 등장한다. 미국 흑인 인권운동의 전설적인 지도자는 마틴 루서 킹 목사다. 그에게 흑인 문제란, 모든 인간에게 주어지도록 되어 있는 보편적 존엄의 권리를 흑인에게까지 넓히는 문제였다. 이것은 미국을 파괴하거나 쪼개는 기획이 아니라 더 큰 미국을 만드는 기획이다. 뉴섬도 이 전통에 서 있다. 또 하나의 전설인 맬컴 엑스는 정반대 노선을 주창했다. 무슬림이자 흑인 운동가였던 그는 “나에게 섞인 백인의 피 한 방울 한 방울을 모두 증오한다”라는 말을 남긴 인종 분리주의자였다. 흑인의 권리는 스스로의 정체성과 자부심을 유지하면서 흑인들끼리 살 때 지킬 수 있다고 주장했다(암살당하기 이틀 전에 그는 자신의 분리주의를 후회하는 인터뷰를 했다).

세계적으로 보면 아시아는 차별받은 대륙이다. 아시아의 지도자들은 이 차별에 크게 두 갈래로 대응했는데, 아시아 고유의 특수한 가치를 강조하는 길과 아시아에도 보편 가치가 작동한다고 주장하는 길이 있었다. 20세기 후반, 아시아를 대표하는 두 지도자인 싱가포르 총리 리콴유와 한국의 야당 지도자 김대중 사이에 유명한 논쟁이 있었다. 김대중·리콴유 논쟁으로 알려진 이 논쟁에서 리콴유는 서구식 민주주의가 아시아에는 잘 맞지 않으며, 아시아는 아시아 특유의 가치를 살릴수록 더 잘 해나갈 수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김대중은 민주주의와 인권은 보편 가치이고, 아시아에도 풍부한 민주적 전통이 존재한다고 반박했다. “문화는 운명이 아니다. 민주주의가 우리의 운명이다.” 김대중은 아시아 국가들이 유엔 세계인권선언으로부터 출발하자고 제안했다. “이 국제문서는 인간 존엄에 대한 기본적 존중을 반영한 것으로, 아시아 국가들이 이의 실천에 앞장서야 할 것이다.”

ⓒ연세대학교 김대중도서관1999년 10월 김대중 대통령과 리콴유 전 싱가포르 총리의 접견 모습.

동성애자 권리 운동에서도 갈림길은 어김없이 작동했다. 동성애자 특유의 정체성을 강조하는 흐름과, 동성애자 역시 ‘보편적 권리의 원’에 들어와야 한다는 흐름이 공존했다. 2015년 6월26일, 미국 연방대법원은 결혼할 권리가 인간의 기본권에 속하므로 동성 간 결혼을 막는 법은 헌법에 반한다고 판결했다. 이날 버락 오바마 대통령의 트위터 계정은 “게이와 레즈비언 커플은 이제 결혼할 권리를 갖게 되었습니다. 다른 모두가 그렇듯이요”라고 썼다. 백악관 계정이 올린 짧은 영상의 제목은 ‘LOVE IS LOVE’다. 동성애자 권리 운동 최대의 성취는 보편적 권리의 폭을 확장하는 전략이 이루어냈다.

Scene 5. 갈림길을 선택하기

이쯤 되면 현실에서 두 갈림길의 명암이 비교적 분명해 보인다. 마크 릴라는 왕성한 현실 참여로 이름이 높은 미국의 정치철학자다. 트럼프의 승리 이후 그가 내놓은 〈더 나은 진보를 상상하라〉는 매우 독특한 정치 비판서다. 그는 진보주의자이지만, 불평등을 어떻게 줄이자거나 좌절한 저학력 백인들을 어떻게 다시 데려오자는 식의 이야기는 꺼내지 않는다. 그가 집중하는 것은 정치 그 자체다. 릴라에게 정치란, 우리가 써온 용어로 바꾸면, ‘협력의 범위’를 확장하는 기획이다. 그럼으로써 더 어려운 과제를 공동으로 풀어내는 기획이다. 정치란 우리가 개별로 환원되는 기본입자라는 세계관에 반대하여, 우리가 서로에게 의존하는 존재라는 걸 상기하는 일이다. “시민은 단지 시민이라는 이유만으로 우리 중 하나다.” 여기서 시민은 보편적 존엄을 공유하고 지키는 연대의 단위다.

그는 로널드 레이건 이후 공화당의 기획이 ‘시민을 해체하여 기본입자로 환원시키는 것’이었다고 본다. 레이건 혁명은 협력의 범위를 축소하고 공동의 프로젝트를 해체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이건 보수적 정치가 아니라 반(反)정치다. 그리고 릴라는 이렇게 덧붙인다. “정체성은 좌파의 미래가 아니다. 정체성은 좌파의 레이건주의다.” 소수자의 권리는 확대되어야 하지만, 그것은 소수자도 시민의 일원이 되는 과정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정체성 정치는 그 반대 방향으로 기운다. 그래서 릴라에게 정체성 정치란 진보 버전의 반(反)정치다.

그가 숙명여대 트랜스젠더 학생 입학 반대 성명서를 보았다면, 시민을 해체하고 파편으로 만드는 반(反)정치의 전형으로 꼽았을 것이다. 그는 정체성 정치가 해결 불가능한 모순에 빠진다고 본다. “정체성 진보주의자는 차이를 단언하고 특수한 경험과 욕구를 강조한다. 그러나 그들은 자신들을 돕는 정치적 행동을 나머지 사람들에게 촉구할 수밖에 없다. 정체성이 차이일 뿐이라면, 나머지 사람들이 그들의 요구에 반응할 이유가 있을까?” 입학 반대 성명서가 “여자들만의 공간과 기회는 여자의 것이어야 한다”라고 썼을 때, 이 주장을 관철하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 온전히 이에 동조하는 여성들만의 힘으로 이루어낸다. 그런데 소수자란 바로 그런 사회적 자원을 갖지 못한 이들이다. 이 길은 곧바로 막힌다. 둘째, 여성들이 그런 공간을 가질 필요나 권리가 있다고 다른 이들을 설득시킨다. 릴라는 이 대목에서 보편의 언어에 기댈 수밖에 없으므로 정체성 정치는 결국 작동하지 않는다고 본다.

ⓒAP Photo미국 연방대법원이 2015년 6월26일 동성 결혼을 합법화하는 결정을 내린 후 많은 시민들이 백악관 앞으로 몰려들었다.

정체성 차이를 강조하는 정치는 협력의 범위를 확장할 수 없다. 오직 우리 모두가 시민이라는 마음의 태도, 시민적 감정을 공유하는 것만이 협력의 범위를 확장하는 길이다. 하지만 협력의 확장은 늘 어려운 과제다. 우리는 매우 쉽게 편 가르기로 기울고, 그렇게 갈린 편의 크기는 현대 사회가 요구하는 시민의 범위보다 좁다. “시민적 감정을 유지하기가 매우 어렵기 때문에, 민주주의는 엔트로피의 지배를 받는다. 시민 사이의 연대가 약화되면 자연스럽게 정치 아래의 애착(정체성)이 사람들의 정신을 지배한다.” 그러니 정치란, 시간이 갈수록 시민적 감정이 흩어지고 옅어지는 자연스러운 경향에 맞서, 매 순간 시민들의 민주주의적 연대감을 끌어올리는 일이다.

이것은 현기증 나도록 까다로운 도전이다. 정치란 기본적으로 갈등을 다루는 일이다. 이를테면 가난한 사람의 정당과 부자의 정당으로 갈려 각자를 대변하는 일이 정치다. 그런데 릴라는 거기에 더해, 정치가 사람들의 연대를 끌어올리고 협력의 범위를 확장하는 일을 해야 한다고 요구한다. 갈등과 협력을 동시에 다루라니, 모순 아닐까? 시민적 감정을 고취하는 정치는, 구성원의 생각을 하나로 만드는 전체주의 정치와 어떻게 다를까?

마사 누스바움은 법철학과 정치철학 양쪽에서 존경받는 석학이다. 그의 최근작 〈정치적 감정〉은 책 전부를 바쳐 이 질문 하나와 씨름한다. 누스바움은 정치가 보편적 권리의 원을 확장하는 일이라는 점에서 릴라와 의견이 같다. 우리의 편 가르기 본성을 뛰어넘어 그 원을 확장하려면 이성만으로는 부족하다. 이것은 우리가 살펴본 진화인류학과 게임이론의 통찰과도 겹친다. 그래서 누스바움은 애국심, 동료 시민에 대한 사랑, 동정심과 같은 긍정적 감정이 반드시 필요하다고 본다. 동시에 누스바움은 그런 식의 감정이 분별없는 애국심과 당파적으로 기운 사랑에 휩쓸릴 위험을 인식한다. 그렇기 때문에 우리의 사랑을 요구하는 정치체란 까다로운 기준을 통과해야 한다. 모든 인간의 보편적 권리와 존엄을 평등하게 보장하고, 언제나 비판에 열려 있도록 표현의 자유를 보장하는 열린 체제여야 한다.

정치철학자들의 결론은 한곳으로 모이는 것 같다. 정치란 통합과 갈등, 보편적 권리와 서로 다를 자유를 동시에 다루는 매우 까다로운 과업이다. 우리는 동료 시민이 되는 동시에 자유로운 개인이 되어야 한다. 앞으로 지나치게 기울면 전체주의가 된다. 뒤로 지나치게 기울면 시민적 감정이 파괴된다. 둘 다 정치의 추락을 뜻한다. 이 추락을 피하는 길은 아주 좁아서 정치는 자주 추락한다.

Scene 6. 반찬가게

2월9일 문재인 대통령은 충남 아산의 한 전통시장을 방문했다. 문 대통령은 반찬가게 상인에게 “좀 어떠세요”라고 물었다. 상인은 “거지 같아요. 너무 장사가 안돼요. 어떻게 된 거예요. 점점 경기가 너무 안 좋아요”라고 답했다. 이 영상이 공개되자 뜻밖의 후폭풍이 일었다. 문 대통령의 열성 지지층이 영상의 댓글에 인신공격성 댓글을 달고, 반찬가게의 상호와 주소를 댓글로 공유하기도 했다. 논란이 확산되자 결국 청와대에서 강민석 대변인이 “그분이 공격받는 게 안타깝다”라는 대통령의 말을 브리핑해 진화를 시도했다.

문재인 대통령은 현역 정치인 중 가장 열성적인 지지자 그룹을 보유하고 있다고 평가받는다. 팬덤의 공격적인 지지 행동이 정치적 논란으로 이어진 적도 몇 차례 있다. 그럴 때 문 대통령은, 지지층의 의사표현은 정치적 자유에 속하므로 정치인이 감당할 일이라는 취지로 답한다. 민주당 대선 후보 경선이 끝난 2017년 4월3일, 문재인 당시 대선 후보는 지지자들의 문자폭탄 등 공격적 지지 행동에 대한 질문을 받고 “경쟁을 흥미롭게 만들어주는 양념 같은 것”이라고 답했다가 다음 날 사과해 수습한 적이 있다.

팬덤의 정치 행동을 어떻게 볼 것인가는 진보 성향 지지층 내에서도 논란거리였지만, 찬성하든 반대하든 문 대통령 강성 지지층의 몇 가지 특징에 대해서는 대략 합의가 도출되어 있다. 첫째, 대통령에 대한 강력한 정치적 일체감을 갖고 있다. 강성 팬덤에서는 민주당도 ‘우리 편’에 포함되지 않을 정도로 대통령에 대한 일체감이 좁고 강력하다. 특히 노무현 전 대통령의 비극적 운명을 기억하는 이들이 문 대통령도 그렇게 잃을 수 없다는 정서가 강하다. 둘째, 집권 이후에도 문재인 대통령을 적대적 다수파에 둘러싸인 소수파로 인식한다. 대통령만 바뀌었을 뿐 한국 사회의 기득권 구조는 그대로 남아서 문 대통령을 포위하고 있다는 관점을 공유한다. 이른바 ‘조국 사태’를 거치면서 이런 관점은 더 강화됐다. 셋째, 그 결과로 정치를 근본적인 선악 구도로 바라본다. “이번 총선은 한일전”이라는 제목을 단 정치 포스터가 강성 지지층 사이에서 유행한 적이 있었다. 일본군 진영 쪽에 나경원 의원 등 보수 정당 지도자들 얼굴이 합성된 포스터다. 선악 구도에서 상대방은 시민적 감정을 공유하는 동료 시민이 아니다. 몰아내야 할 악이다. 댓글과 문자를 동원한 공격은 선을 실천하는 행위가 된다.

ⓒ시사IN 신선영2017년 5월8일 문재인 대선 후보의 마지막 선거유세가 광화문광장에서 열렸다.

팬덤 정치는 지지하는 정치인에 대한 몰입, 소수파 의식, 그 결과로 도출되는 근본주의적 선악 구도를 세 기둥으로 한다. 이것은 우리가 지금까지 추적해온 정체성 정치의 문법과 놀랍도록 닮았다. 정체성 정치는 확고하게 공유하는 단일 정체성, 소수자라는 자의식, 그리고 그 정체성 자체에서 특수한 권리가 도출되는 근본주의적 권리의식으로 구성된다. 팬덤 정치는 ‘문재인 팬덤’ ‘박근혜 팬덤’이 어떤 사람들인지 들여다보아서는 온전히 설명되지 않는다. 이것은 변형된 정체성 정치의 일종이다. 특정 정치인에 대한 지지를 자신의 정체성과 구분되지 않을 만큼 깊이 받아들였을 때 등장하는 현상이다.

정체성 정치의 가장 가혹한 비판자인 마크 릴라를 다시 불러보자. 정체성 정치란 시민적 감정을 유지하는 데 실패하면 나타나는, 일종의 반(反)정치다. 2016년 박근혜 탄핵 촛불집회는 특정 정파의 요구를 넘어서는 보편성을 갖고 있었다. 그것은 헌법과 법률에 구속되는 통치, 특권과 반칙이 없는 시스템, 생명을 기본권으로 소중히 다루는 국가를 요구했다. 그리고 이 모든 보편적인 요구에 공감하는 동료 시민이 이렇게나 많다는 것을 확인시켜주는 축제였다. 문재인 정부의 최대 자산은 이 시민적 감정이었다. 하지만 집권 3년을 향해가는 지금, 이 시민적 감정은 빠르게 고갈되고 있다. 그러면 정치는 그 특유의 역동성과 감정적 고양을 멈추고, 지루하고 특색 없는 기술자들의 득표 마케팅으로 쪼그라든다. 2020년 총선을 앞둔 민주당 위기의 뿌리는 아주 오래된 정치의 원칙에까지 닿아 있다.

Scene 7. 토양

파커 파머는 미국의 사회운동가다. 그가 쓴 책 〈비통한 자들을 위한 정치학〉은 문재인 대통령이 야당 지도자 시절 세월호 천막에서 단식을 하면서 읽은 책이다. 이 책은, 보편의 원을 확장하는 시민적 감정 없이 민주주의는 작동하지 않는다는 우리의 주제를 간결한 문장으로 압축한다. “정치는 절대로 게임이 아니다. 그것은 공동체를 창조하기 위한 오래되고 고귀한 인간적인 노력이다.” 그런 노력이 작동하려면 무엇이 필요할까? 그는 “겸손함과 뻔뻔스러움”이라고 답한다. 시민들은 의견이 다른 동료 시민에게 말을 걸고 기꺼이 반대에 부딪힐 만큼 뻔뻔할 필요가 있다. 동시에, 나의 견해가 옳다고 확신하지 않고 상대가 옳을 수도 있다는 걸 늘 받아들일 수 있도록 겸손해야 한다. 겸손함과 뻔뻔스러움을 갖춘 시민들은 의견이 달라도 공적 대화를 할 수 있다. 그런 공적 대화는 자체로 시민적 감정을 고양시키는 축제다.

우리의 현실은 정반대다. 정치 대화는 대체로 의견이 같은 사람들 사이에서만 머문다. 팬덤으로 대표되는 유사 정체성 정치는 의견이 다른 동료 시민과 만날 일을 줄여준다. 뻔뻔할 필요가 없다. 동시에, 나의 견해가 옳다는 확신을 끝없이 강화해준다. 겸손할 필요가 없다. 우리는 정치적 부족민들이 되어가는 중이다. 정치적 의견이 다른 사람과 대화하는 법을 잊어가고 있고, 다른 의견에 지나치게 상처받으며, 비슷한 의견끼리 과하게 대화한다. 이것은 정체성 정치를 배양하는 완벽한 토양인 동시에, 정체성 정치가 작동한 결과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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