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조남진김중기씨는 “남·북·미 대화가 막힌 상태에서 돌파구를 열기 위해 ‘평화여행 2020’을 만들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1980년대 말의 학생운동에서 하나의 상징이다. 1988년 3월 서울대 총학생회장 유세 과정에서 제안한 ‘남북한 청년학생 체육대회’로 사회·정치적 파문을 일으켰다. 당시 한국에서 북한이란 존재는 ‘절대 금기’였다. 군사정부에 대한 저항이 어느새 ‘북괴의 사주를 받은 간첩사건’으로 엮여 잔인무도한 고문의 소문과 함께 대중에게 줄줄이 전시되던 시대다. 비록 총학생회장 선거에서 낙선했으나, 그의 제안은 ‘8·15 남북 학생회담 성사’ 투쟁으로 발전해 그해 여름 대규모 시위로 폭발한다. 학생회담은 성사되지 않았다. 그러나 ‘절대 금기’에 대한 그의 도전은 임수경 당시 외국어대 학생, 문익환 목사 등의 방북으로 이어지면서 1990년대 초반 대중적 통일운동의 시대를 열어젖히게 된다.

통일운동의 열기 속에는 그가 없었다. 1997년 그는 영화 〈시간은 오래 지속된다〉의 주인공으로 나타난다. 이후 시간이 오래 지속되는 가운데 그는 어느새 중견 연기자로 성장했다. 여행 애호가들에게 유명한 프로그램인 KBS 〈걸어서 세계 속으로〉의 내레이션을 맡아 팬클럽까지 생길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남한산성〉 〈암수살인〉 같은 영화와 tvN 드라마 〈자백〉 등에서도 볼 수 있었다. 그는 배우 김중기씨다.

최근 김중기씨는 ‘평화여행 2020’이란 단체의 공동대표를 맡았다. 지난 2월9일 발기인 대회를 열었다. “북녘 여행을 함께” 가잔다. 발기인들은 1인당 100만원을 그 비용으로 냈다. 남북 학생회담과 북녘 여행. 뭔가 비슷하면서도 다른 것 같다. 2월17일 김중기씨를 만나 물었다.

이런 시기에 북한 여행이라니?

지난 2년여 동안 ‘북·미 관계가 해결되어야 남북 관계도 풀리고, 남북 관계가 해결되어야 민간 교류도 가능해질 것’이라고 믿어왔다. 그러나 미국은 오는 11월 대통령 선거 때까진 북·미 관계를 실질적으로 개선하려는 마음이 없는 것 같다. 북측도 마찬가지다. 기대만큼 실망도 크다. 한국의 ‘민간’에서 어떤 의지를 보여줘야 하지 않을까? 민간 차원에서 가장 쉽게 접근 가능한 일이 북한 여행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신년사에서 ‘대북 개별 관광 추진’ 의사를 밝히기도 했다. 민간 교류로라도 막혀버린 대화와 화해의 물꼬를 터야 한다.

미국은 개별 관광을 반대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북한 역시 한국 여행객을 좋아할까?

개별 관광이 유엔 안보리의 제재 대상은 아닌 것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미국이 ‘작은 제재가 뚫리면 큰 제재도 무너진다’고 생각하는 한 쉽지 않다. 개별 관광도 여행사나 항공사를 끼워야 하는데 이런 업체들이 미국의 독자 제재를 받을 수 있다. 북한 역시, 1988년 당시에도 느꼈는데, 민간 교류를 크게 환영하지 않는다. 제한되고 통제 가능한 범위 내에서 진행 가능한 체육대회 같은 민간 교류를 선호한다. 남·북·미 대화가 꽉 막힌 상태에서 뭔가 돌파구를 만들려면, 한국 정부가 결심하고 북측도 이를 대국적으로 받아들이는 상황을 만들어 미국을 설득할 수 있어야 한다. 그래서 이 운동을 결심했다.

참여 비용이 100만원이다.

‘개인당 100만원까지 모을 필요 있나’라는 의견도 있다. 그러나 남·북·미 당국에 민간의 의지를 보여주려면 어쩔 수 없다고 봤다. 그들이 ‘한국엔 100만원을 먼저 내고라도 한반도 평화와 긴장 해소를 바라는 사람이 많구나’라고 느끼게 해야 한다. 북한 역시 경제개발을 다그치는 지금 처지에서 외화가 절실히 필요하다.

ⓒ김중기 제공1988년 서울대 총학생회 선거 유세 모습. 맨 오른쪽이 김중기씨.

북한에게는 일종의 경제적 인센티브로 작용할 수 있겠다. 현재 진행 상황은 어떤가?

어제(2월16일)까지 141명이 마음을 함께해주었다. 판문점 남북 정상회담 2주년인 4월27일까지 427명의 발기인을 모을 예정인데, 현재 추세로 보면 무난할 것 같다.

지금 상황이라면 북한 여행이 언제 성사될지 알 수 없지 않은가?

어제 북한이 개별 관광에 대한 입장을 내놓았는데, ‘무슨 소리냐? 안 된다!’가 아니라 ‘왜 미국에 가서 개별 관광을 해결하려 하느냐’였다. 굉장히 긍정적 신호다. 짜증내는 말투였지만 개별 관광에 관심이 있다는 거다. ‘남한 여행객을 북한이 개방하는 몇 개 관광지에는 받겠다’는 의사 표현으로 받아들였다. 문재인 대통령과 통일부가, 미국과 척을 져서는 당연히 안 되지만, 이 문제에서는 결단해야 한다고 본다. 관광 문제라면 미국을 설득할 여지가 있다. 우리는 4월27일 이후부터 발기인보다는 일반 여행단을 주로 모실 생각이다. 여행이 공식적으로 성사되기 전까지는 5만원이든 10만원이든 계약금만 내게 할 계획이다. 427명을 1만명, 나아가 10만명 규모로까지 늘려서 대규모 여행단을 꾸리고 싶다. 그렇게 되면 북측도 개별 관광이 경제적으로 엄청난 이익이 될 수 있다는 점을 실감할 것이다.

북한의 어디로 여행을 갈 계획인가?

궁극적으로 우리의 꿈은 ‘북한 자유여행’이다. 북측이 당장 허용하긴 어려울 것이다. 그래서 일단 (북측이 관광객 유치를 위해 개발 중인) 원산갈마관광지구와 마식령스키장, 관동팔경 중 1위라는 총석정(주상절리로 이루어진 바위기둥과 절벽으로 유명한 금강산 북쪽의 명승지) 등을 목표로 삼고 있다. 특히 갈마반도의 명사십리 해수욕장은 해변의 길이가 무려 10㎞에 걸친, 세계적으로 드문 크기의 백사장을 갖고 있다. 여름에 갈 수 있다면 좋겠다. (함경북도의 금강산으로 불리는) 칠보산도 엄청나다고 한다. 다만 개인적으로는 관광지보다 북한의 뒷골목을 가보고 싶다. 가끔 혼자 해외여행을 떠나는데 관광지보다 평범한 사람들의 일상이 있는 곳으로 다닌다. 북한의 뒷골목 선술집에서 술이라도 한잔 하고 싶다. 북측도 관광지구에 한국인들이 드나들다 보면 결국 평양과 개성 정도는 개방하게 되지 않을까? 이런 과정 자체가 긴장 해소의 길이 될지도 모른다.

이 행사에 뛰어들게 된 계기는?

지난해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의 실패 이후 남·북·미 간의 분위기가 차가워지다가 겨울 접어들며 그야말로 경색 국면이 도래하고 말았다. 답답해하던 차에 1988년 서울대 총학생회장 선거 당시 (함께 남북 학생회담을 주장했던) 부학생회장 후보였던 유재석씨로부터 ‘북한 여행단을 조직하자’는 제안을 받았다.

ⓒ평양 조선중앙통신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이 2018년 원산갈마관광지구 건설 현장을 현지 지도하는 모습.

어떻게 보면  1988년부터 본격화된 통일운동의 기폭제 역할을 했다. 지금은 이미지가 중요한 중견 배우다. 공동대표로 나서기가 부담스럽지 않았나. 과거의 경력을 빼들며 ‘종북 빨갱이’라고 선동할 사람이 줄줄이 나올 것이다.

부담스러웠다. 배우를 하면 할수록 ‘이미지가 전부’라는 생각이 든다. 사실 1988년 그 시절의 이미지를 빼기 위해 25년여 동안 노력해왔다. 그때와 연관 짓는 언론 인터뷰도 차단했다. 더욱이 남북문제는 이데올로기적으로 굉장히 첨예하고 논란의 소지가 크다. 우리 사회, 심지어 진보 세력 내에서도 북한을 곱게 보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북측이 최근엔 사실상 문재인 대통령을 겨냥한 것으로 보이는 험한 말까지 내뱉지 않았나. 지금까지 쌓으려고 노력해온 이미지가 흩어지는 것이 두려웠다. 처음엔 돕긴 하되 발기인 대회를 마치면 빠지려고 했다. 그러나 동료들이 ‘네가 총대를 메야 한다’고 하더라.

당신의 상징성 때문이었을 터이다.

아마도! 다만 남북문제에서 우리 세대가 중심 역할을 할 수 있는 것은 ‘평화여행’이 마지막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 30년 전에 ‘가자, 만나자’고 앞장섰다가 성사시키지 못한 것에 대한 마음의 빚도 있었다.

다른 공동대표는 어떤 분들인가?

평화여행을 준비하면서 세운 방침이 있다. 기존의 통일·평화운동 단체보다는 한국 시민 개인의 입장에 서서 운동을 만들어나가자는 것. 민족통일운동으로 접근하기보단 평화를 최선의 가치로 보려고 했다. 그래서인지 꽤 다양한 성향의 분들을 공동대표로 모실 수 있었다. 전상훈 이지스커뮤니케이션 대표, 목판화가인 김준권 화백, 개인 유튜버로 유명한 최인호씨 등 여섯 분이 공동대표로 참여해주었다. 성소수자 운동을 해온 김조광수 감독도 공동대표로 모셨다. 성소수자는 한국 사회에서도 차별받아온, 인권 문제의 핵심에 있는 집단이다. 북한도 언젠가는 이런 이슈에 정면으로 마주할 수 있어야 하지 않겠나. 이외에도 배우 문성근, 강신일, 김의성, 방은진, 이정은, 신동엽 시인의 아들인 신좌섭 교수, 김명환 서울대 중앙도서관장 등이 응원해주셨다. 특히 강신일 형님은 걱정하면서도 도와주셨다.

지금의 배우라는 직업을 좋아하는가?

너무 좋다. 가장 즐거운 일이다. 사람이 인생에서 가장 해볼 만한 직업이 배우라고 생각한다.

ⓒ연합뉴스문재인 대통령이 1월14일 신년 기자회견에서 질문에 답하고 있다(위).

한때 통일운동의 ‘수뇌부’ 정도로 여겨졌다.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고 놀랐다는 사람이 한둘이 아니다. 배우가 된 특별한 동기가 있었나?

(남북 학생회담 건으로 투옥됐다 나온) 1989년과 1990년이 너무 힘들었다. 어떤 일도 행복하지 않았다. 호흡하기가 어려웠다. 정신질환 일보 직전이라는 생각까지 했다. 그때 비디오로 많은 영화를 봤다. 〈정복자 펠레〉 〈1900년〉 〈뻐꾸기 둥지 위로 날아간 새〉 〈빠삐용〉 〈레인 맨〉…. 잭 니컬슨이나 더스틴 호프먼, 로버트 드니로의 연기를 보는데 카타르시스를 느끼며 나도 모르게 눈물을 흘리게 되더라. 군대 갔다 와서 문화운동에 뛰어들기로 결심했다. 처음엔 영화 연출을 꿈꿨는데 이미 지인들 몇 명이 그쪽 공부를 하고 있더라. ‘나까지 연출할 건 없잖아’라고 생각하다가 배우들로부터 받은 감동을 떠올렸다. 그래서 연기를 해보자고 결심했다.

20대 중반 넘은 나이였다. 어려웠을 텐데?

그랬다. 1980년대 중반부터 거의 10년 동안 조직운동을 했다. 사물을 이성적이고 사회과학적으로 파악하려는 습관이 몸에 배어 있다. 세상과 사람을 전략적이고 목적의식적으로 대하는 관성에 젖어 있었다. 이걸 깨기가 굉장히 힘들었다. 1994년, 한국예술종합학교에 입학했다. 1학년 1학기 때부터 엄청 욕을 먹었다. 여름방학 동안 열심히 수련했다. 2학기 때는 기필코 뭔가 다른 멋진 모습을 보여주겠다고 모질게 마음먹었다. 2학기 첫 독백 수업에서 연기를 했는데, 선생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다. “너는 연기하지 마라.” 연출이나 기획으로 바꾸라고 했다. 엄청난 충격이었다. 자리로 들어가서 앉았는데 그 시간 내내 울었다. 그러고 보니 봉준호 감독으로부터도 비슷한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2003년 부산국제영화제에 초청되었을 때 우연히 술자리에서 봉 감독을 만났다. 내가 대학 시절에 무엇을 했는지도 알고 있었다. 농담을 주고받다가 ‘선배님, 눈빛이 너무 강해요’라고 하더라. 이후 눈빛을 부드럽게 만들려고 노력했다. 당시부터 그의 영화에 캐스팅되고 싶다는 바람이 있었던 모양이다(웃음).

그래도 연기자로 자리를 끈질기게 지켰다.

졸업 이후엔 영화로 배우 생활을 시작했다가 극단 차이무에 들어갔다. 차이무에서 10년 정도 부대꼈더니 비로소 ‘이제 내가 배우를 할 수 있겠다’ ‘나는 배우다 라고 외부에 말할 수 있겠다’라는 자긍심이 들었다. 사실 그때까지도 다른 사람들이 내 과거 경력에 대해 말하는 것을 심하게 꺼렸다. 심지어 (배우 생활을 선택한 이유가) ‘나를 모르는 사람이나 집단 속에 파묻히고 싶었던 것이 아닌가’라고 자문한 적도 있다. ‘나는 배우다’ 규정할 수 있게 되면서 담담해졌다. ‘숨길 필요 없잖아?’ 치유라고 하면 좀 거창한가?

평화여행이 한반도 평화에 기여할까?

글쎄다. 여행은 여행일 뿐이다. 그러나 한국 시민들의 여행으로 북한의 경제체제가 조금이라도 개방적으로 변하고 북측 인민들의 생활에 보탬이 된다면 그것 자체가 평화에 기여하는 일이 되지 않을까. 북한 지도자들도 개방체제로 전환해서 글로벌 경제 시스템에 참여해야 나라 경제를 살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다.

발기인 대회의 선언문에 “우리는 자유인들입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자유’라고 하면, 북한 측이 싫어하지 않을까?

‘자유’란 말을, ‘자유여행’이란 용어를 꼭 넣고 싶었다. 북한도 변해야 할 것은 변해야 한다. 우리가 남북 간의 교류, 심지어 통일까지 이야기할 때는 ‘지금의 불안한 상태를 지속시키는 것이 아니라 양측이 좀 더 좋아지는 방향으로 변하자’는 것 아닌가. 그렇지 않다면 통일할 필요도 없다고 생각한다. 평화여행이 성사된다 해도 우리의 여행은 당분간 북측이 통제하는 개별 공간에서 이뤄질 수밖에 없을 것이다. 궁극적으로는 한국 시민도 북한을 자유롭게 여행하고, 북한 인민도 한국을 자유롭게 여행하는 그날이 와야 하지 않을까. 그래서 선언문에 “우리의 출발이 남녘 북녘에 ‘개별 관광 자유여행’이라는 새 시대 남북 교류의 마중물이 되기를 희망한다”라고 써넣었다. 우리의 여행은 한반도 평화를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그에 앞서 ‘여행’ 자체가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여행을 왜 하는가? 자유롭게 가고 싶은 곳을 가고 만나고 싶은 사람을 만나려는 것이다. 여행은 기본적으로 자유로운 것이며, 여행하는 사람은 자유인이다.

기자명 이종태 기자 다른기사 보기 peeke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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