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가 두려운 당신에게
  • 허진 (문학평론가)
  • 호수 650
  • 승인 2020.03.06 09:2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성원

어떤 대상을 두려워하는 사람에게 그 대상을 두려워하지 말라고 하거나, 권유하는 일은 때로 무례할 수 있다. 두려워하지 않을 수 있다면, 그들도 기꺼이 공포에서 벗어나고 싶어 하기 때문이다. 실제로 어렸을 때 나는 귀신을 무서워했는데, 밤에 화장실에 갈 때마다 변기에서 빨간 손이나 노란 손이 올라올까 봐 가슴을 졸이곤 했다. 환하게 불을 켜놓고 화장실에 가도 두려움은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어떤 미지의 대상을 무서워하는 사람에게 “그게 왜 무섭니?” “무서워하지 않도록 노력해봐”라고 말하는 것은 올바른 대응이 아닐 수도 있다. 공포는 없애고 싶다는 의지에 의해 손쉽게 없어지는 감정이 아니기 때문이다.

이처럼 공포가 개인의 의지로 쉽게 조절하기 어려운 감정이라면, 공동체의 시민으로서 우리는 공포가 혐오로 이어지지 않도록 각별한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수전 손택의 〈은유로서의 질병〉(이후, 2002)은 공포나 혐오 같은 주관적 감정을 떨쳐내고 이성적으로 질병을 바라보려는 분들께 권하고 싶은 책이다.

손택은 1976년 유방암에 걸린 뒤, 질병에 대한 사회의 편견에 맞서기 위해 1978년 〈은유로서의 질병〉을 출간했다. 손택은 이 책에서 암과 결핵 등의 질병이 어떤 은유적 의미를 지니는지에 대해 고찰하는 한편, 질병의 은유적 의미를 배격하고, 질병을 질병 그 자체로 사고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에이즈로 친구를 잃고 난 뒤, 손택은 〈에이즈와 그 은유〉를 썼는데, 이 글은 원래 〈은유로서의 질병〉의 새로운 판본이 나올 때, 본서의 뒤에 덧붙이는 글로 계획되었다. 애초 계획보다 분량이 길어지면서 〈에이즈와 그 은유〉는 독립된 한 편의 글이 되었다. 이후 출판사에서 나온 〈은유로서의 질병〉에는 이 두 편의 글이 함께 수록돼 있다.

질병이 어떻게 메타포로 기능할 수 있는지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이라면, ‘사회에 암적인 존재’라는 표현을 떠올려보면 도움이 될 수 있다. 여기에서 ‘암’은 ‘백해무익한’ ‘해악을 끼치는’ 따위의 의미로 쓰였는데, 이는 암에 의학적 의미 이상의 다른 부정적 의미가 존재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손택이 수행한 작업이 바로 결핵·암·매독·역병·광기·페스트 등의 질병을 둘러싸고 있는 여러 은유적 의미를 밝혀내고, 질병을 신비화하거나, 질병에 질병 이상의 다른 의미를 부여하는 일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었다.

그녀에 따르면, 서양에서 폐의 질병은 “영혼의 질병”으로 여겨졌던 반면, 암은 “육체의 질병”이었다. 또한 18세기 이후에는 질병이 의복과 마찬가지로 자아를 표현하는 수단으로 기능했다. 그래서 특정한 질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 곧 개성이 있다는 의미로 받아들여지기도 했다. 일례로 결핵을 앓고 있다는 것은 감수성이 예민하다는 증표였고, 결핵은 “젊은 예술가의 질병”으로 간주되기도 했다. 반면에 암은 “냉혹하고, 무자비하고, 타인의 희생을 가져오는 것”에 비유됐다. 매독은 병자에 대한 “도덕적 심판”을 의미했으며, 〈일리아드〉와 같은 서사시에서 역병은 “신의 분노를 보여주는 도구”로 묘사됐다. 중세 시대에 페스트는 “도덕적 타락이라는 관념과 견고하게 맺어져” 있었고, 20세기에 광기는 “정신적인 격정”을 보여주는 상징이라고 생각됐다.

질병에 대한 이 같은 은유는 한국 문학작품에서도 발견할 수 있다. 이를테면, 허수경 시인의 시 ‘폐병쟁이 내 사내’는 이렇게 시작한다. “그 사내 내가 스물 갓 넘어 만났던 사내 몰골만 겨우 사람 꼴 갖춰 밤 어두운 길에서 만났더라면 지레 도망질이라도 쳤을 터이지만 눈매만은 미친 듯 타오르는 유월 숲속 같아 내라도 턱하니 피기침 늑막에 차오르는 물 거두어주고 싶었네(허수경, 〈슬픔만 한 거름이 어디 있으랴〉, 실천문학사, 1997, 32쪽).” 여기에서 폐병을 앓는 사내는 연민의 대상이고, 폐병은 ‘사내’에게 보호본능을 유발하는 기능을 한다. 만약 이 사내가 폐병쟁이 사내가 아니라, 고혈압을 앓는 사내였다면, 이 시는 다른 의미를 지닌 시가 됐을 것이다. 이태준의 〈까마귀〉에서도 폐병은 비슷한 의미로 사용됐는데, 여기에서는 폐병을 앓는 여자가 주인공의 연민과 동정의 대상이다. 이처럼 폐병은 단순히 질병이 아니라, 병인에게 연약함과 신비함을 부여하는 수단으로 문학작품에서 종종 사용됐다.

이렇듯 질병에는 ‘질병 그 자체’의 의미 외에, 다른 은유적 의미가 존재하며, 이러한 은유적 의미에 저항해야 한다고 손택은 〈은유로서의 질병〉에서 주장했다. 손택이 이 책에서 질병의 은유적 의미에 저항해야 한다고 주장한 이유는 그런 의미들이 환자에게도, 사회에도 전혀 도움이 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한편 〈은유로서의 질병〉에는 오늘날의 정치 현실에 대한 통찰을 제시해주는 내용도 있어서 그 내용을 여기에 소개한다. “우파든 좌파든 현대의 전체주의 운동은 두드러지게 -노골적으로- 질병의 이미지를 사용하는 경향이 있다. 나치는 여러 피가 섞인 ‘인종적’ 혈통을 지닌 사람은 매독 환자 같은 사람이라고 단언했다. 유럽의 유태인들은 제거되어야만 할 매독이나 암에 끊임없이 비유됐다.” “오늘날, 어느 정치적 사건이나 상황을 질병에 비유한다는 것은 죄를 뒤집어씌우고 심판을 내린다는 것이다.” “어느 현상을 암으로 묘사하는 일은 폭력을 선동하는 것이다.”

질병을 일상적으로 본다는 것

또한 〈에이즈와 그 은유〉에서 손택은 전염병 창궐이 외국인 혐오로 이어졌던 과거의 사례에 대해 다음과 같이 서술했다. “역병을 다루는 흔해빠진 이야기에는 이런 특징이 있다. 즉, 이 질병은 예외 없이 어딘가 알지 못하는 곳에서 찾아오는 질병이라는 것이다.” “흔히, 전염성 질병은 외국인들과 이민자들의 출입을 모두 금지시켜야 한다는 요구를 불러오기 마련이다. 또한 외국인 혐오증을 부추기는 허위 선전은 이민자들을 늘 질병(19세기 후반의 예를 들자면, 콜레라나 황열병 또는 장티푸스, 결핵 같은 질병) 보균자로 묘사하곤 한다.”

그렇다면 질병을 혐오하지 않는 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즉 건강과 안녕을 추구하는 대부분의 사람에게 질병은 기피 대상인데, 질병에 대해 혐오 외에 달리 어떤 감정을 가질 수 있으며, 그것은 어떻게 가능한가? 여기에 대해서는 허수경 시인의 ‘정든 병’이라는 시에 나오는 “이 세상 정들 것 없어 병에 정듭니다(허수경, 〈혼자 가는 먼 집〉, 문학과지성사, 1992, 17쪽)”라는 시구를 소개하고 싶다. ‘병에 정들었다’는 시구처럼, 질병을 살면서 마주하게 되는 하나의 현상 정도로 받아들이면, 한결 마음이 편해질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코로나19보다, 코로나19를 둘러싼 부정적 인식, 질병에 대한 공포와 혐오, 집단적 격리 수용과 경제활동의 중단, 집단 수용 과정에서의 인권과 기본권 침해, 정부의 과잉 대응, 외국인과 불특정 다수의 사람에 대한 의심과 혐오가 더 건강에 해로울지 모른다. 그런 점에서 “두려움을 불러일으키는 특정 질병을 일상적으로 볼 수 있다는 것도 무척 바람직한 일일 것”이라는 손택의 진술은 오늘날에도 음미해볼 가치가 있다.

Magazine
최신호 보기 호수별 보기

탐사보도의
후원자가 되어주세요

시사IN 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