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독한 미식가’의 만화와 인생을 맛보다
  • 김문영 (이숲 편집장)
  • 호수 650
  • 승인 2020.03.07 12: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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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림 그리는 사람〉
다니구치 지로·브누아 페터스 지음
김희경 옮김, 이숲 펴냄

〈고독한 미식가〉 〈열네 살〉 〈산책〉 〈신들의 봉우리〉의 작가, 많은 만화가가 꿈꾸는 만화가, 작화 기법의 롤모델인 다니구치 지로가 갑작스레 세상을 떠난 지 3년이 되었다. 3주기에 맞춰 그의 마지막 대담집 〈그림 그리는 사람〉이 국내에서 출간되었다.

그림책이 아닌 대담집을 소개하는 이유는, 작가이자 그림 그리는 사람, 그리고 예술을 사랑한 다니구치 지로의 모든 것이 이 책에 담겨 있어서이다. 대담을 진행한 프랑스 작가 브누아 페터스는 프랑스의 인문학자인데 특히 만화 전문가로 알려져 있다.

책은 총 6부로 이루어져 각 챕터에 맞는 주제를 다루고 있다. 가족사부터 만화가 조수로 일하던 시절, 그의 만화가 어떻게 유럽에 알려졌는지, 하루에 얼마만큼의 그림을 그리며 어떤 기준으로 만화를 그리는지 등에 대한 이야기가 시공을 넘나들며 펼쳐진다. 또 자기 작품을 다각도로 분석하며 기획할 때 어떻게 핵심 주제를 형상화하고, 어떻게 서사 구조를 구성하고, 시나리오를 화면에 옮기는 과정에 어떤 원칙을 세우며, 어떻게 인물의 감정 표현을 가시화하고, 감정과 메시지를 표현하는 방법은 무엇이고, 배경에 지극히 공을 들이는 이유는 무엇인지 등을 꼼꼼히 설명한다. 책을 읽고 나면 마치 유익하고 친절한 ‘만화와 인생’ 강의 하나를 들은 느낌이 든다.

전업 만화작가는 물론이고 만화가를 꿈꾸는 학생, 그리고 만화에 관심이 있는 일반인도 이 책을 읽고 나면 마음에 잔잔한 감동이 일 것이다. 그것은 아마도 작가가 만화가로 살아가며 삶의 여러 국면에서 보여준 겸손하고 진솔한 자세가 깊은 여운을 남기기 때문이리라.

그에게는 작은 행복을 놓치지 않고, 삶을 음미하며 살아가고, 많은 것을 발견하고, 새롭게 도전하며, 늘 창작하는 열정에 불타는 일상이 무엇보다 소중했다. 대담자 브누아 페터스가 그에게 ‘지니 같은 요정이 크든 작든 운명을 바꿀 수 있게 해주겠다면 무엇을 바꿔달라고 말하고 싶으냐’고 묻자 그는 담담히 대답한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겁니다. 아무것도 바꾸고 싶지 않으니까요. …전 운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아마도 그런 즐거움 덕분에 제가 계속해서 작업할 수 있는 것 같습니다. …전 엄청난 성공을 원하지 않습니다. 전 이미 제가 희망할 수 있었던 모든 걸 넘어서 인정받았습니다. 겸손하게 말하는 게 아니라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합니다. …이제 절 자극하는 것은 더 큰 성공을 거두겠다는 야망이 아니라, 제게 정말 중요한 만화를 그리고 이야기하고 싶은 소망입니다.”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을 겁니다”

일본 돗토리현 시골 가정에서 태어나 평범한 유년시절을 보낸 후 대학 진학을 포기하고 도쿄로 가서 일을 시작한 다니구치 지로. 선배 만화가 밑에서 조수로 일하며 혹독한 도제 시절을 거친 후 독립했던 그는 일찍이 유럽 만화에 관심을 갖고 유럽 만화 기법을 적극 받아들였다. 그의 작품은 우리가 아는 일본 전통 만화와, 작품성으로 승부하는 서양식 ‘그래픽노블’ 그 중간쯤에 위치한다. 그런 덕에 프랑스에서도 그의 작품이 다수 번역 출간되었고, 프랑스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에서 〈열네 살〉과 〈신들의 봉우리〉가 각각 최우수 시나리오상과 최우수 작화상을 받는 등 세계적인 만화가로서 명성을 얻게 되었다.

다니구치 지로가 세상을 떠난 직후인 2017년 3월, 나는 파리 도서전을 방문할 기회가 있었는데, 그때 도서전에서는 전시관 하나를 그에 대한 추모로 할애해 다소 놀란 기억이 난다. 많은 이들이 줄지어 관람했고, 만화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진심으로 그의 죽음을 애도했다. 생각보다 유럽에서 그의 위상은 높아 보였다.

올해 초 앙굴렘 국제만화페스티벌을 방문한 나는 만화박물관에 소장되어 전시 중인 이 대담집을 포함한 그의 작품을 보고 또 놀랐다. 다니구치 지로는 떠났지만 그의 작품은 앙굴렘 만화박물관에 영구히 남겨져 세대와 인종과 국가를 넘어 사람들을 위로했다. 그의 삶과 생각을 읽어 내려가다 보면, 마치 그가 〈산책〉에서 대사 없이 오로지 그림으로만 전하려 했던 그 향기, 그 바람이 가슴에 불어오는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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