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신선영

2018년 9월, ‘노회찬재단 설립 제안문’에 참여한 이들은 재단의 목적이 “노회찬이 했던 정치를 ‘노회찬 정치’로 되살리는 것”이라고 적었다. “제2, 제3의 노회찬을 양성하고 지원”하는 것이 그 방안이다. 지난 1월24일 노회찬재단이 창립 1주년을 맞았다. 재단은 ‘노회찬 정치’를 어떤 방향으로 해석해왔고, 활동할 예정일까?

1월30일 조돈문 노회찬재단 이사장을 만났다. 조돈문 이사장은 노 전 의원에게 자신의 책을 헌정하며 그를 ‘동지’라고 적었다. 조 이사장은 1999년 민주노동당 창당을 준비할 때부터 노회찬 전 의원의 정치를 외곽에서 지원해온 인물이다. 노회찬재단이 이어가려 하는 노 전 의원의 유지가 무엇인지 조돈문 이사장에게 들었다.

노회찬재단 창립 후 1년은 어땠나?

재단 상근자들은 대부분 노 전 의원 가까이에서 일했던 이들이다. 마음을 다스리기도 전에 일이 닥쳐왔다. 계획을 미리 세우고 실천하는 게 아니라 일하면서 배우는 1년이었다. 대원칙은 있었다. 노회찬 전 의원의 추모·기념사업을 넘어 지속 가능한 활동을 하는 것이다. 주된 사업은 3가지다. 노 전 의원의 말과 글을 정리하는 아카이빙, 노 전 의원의 정신을 계승하는 ‘노회찬 정치학교’ 운영, 공정하고 평등한 나라로 나아가기 위한 비전 만들기이다. 지금도 재단이 어떤 활동을 할지 고민을 이어가고 있다. ‘노회찬 정치’의 핵심은 사회적 약자들을 위한 정치이며,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를 만들자는 것이다. 우리 사회 한쪽에는 ‘6411번 버스’로 상징되는 비정규직 노동자가 있고, 반대쪽에는 국가권력과 삼성으로 대표되는 시장권력이 있다.

노회찬 전 의원을 어떻게 알게 되었나?

긴밀하게 같이 활동하게 된 계기는 1999년 여름 민주노동당 창당 준비 때였다. 창당 준비 실무책임자가 노 전 의원이었고 나는 노동 분야 강령을 만드는 데에 참여해 의견을 주고받았다. 2004년 17대 총선 당시에는 노회찬 전 의원이 선대본부장을 맡았고, 나는 100~200명 규모 교수지원단을 꾸려 집행위원장을 했다. 총선 공약을 만들며 함께 일했다. 그 후에도 노회찬 전 의원은 진보 정치의 핵심으로 활동했고, 나는 필요할 때 당에 차출돼서 일했다.

2004년 17대 총선에서 노회찬은 원내 진출에 성공했다. “50년 동안 같은 삼겹살판” 등의 촌철살인으로 이름을 알렸다.

파괴력 있는 대중적 진보 정치인이 되겠다고 느꼈다. 깊이 없이 위트만 있는 사람은 그냥 말 잘하는 개그맨이다. 노회찬의 말에는 우리 사회의 모순이 있고, 해법의 정수도 있다. 평생 고민해왔던 콘텐츠가 울림과 감동을 자아내는 것이다. 17대 총선을 준비하던 때, 나는 노회찬이 반드시 국회의원이 돼야 한다고 느꼈다. 교수지원단으로서 후보들에게 공약 교육을 하던 때였다. 그런데 공약은 결과물이다. 그 배후에 어떤 고민이 있었고, 어떤 딜레마가 놓였는지, 왜 이런 선택을 했는지까지는 ‘답안지’만 봐서 알 수가 없다. 이 전체 과정을 아우를 수 있는 사람이 1명이라도 국회에 들어가야 하고, 그게 노회찬이라고 봤다.

그에 대해 사람들이 잘 모르는 면모가 있나?

당내에서 공격을 받아도 노 전 의원이 화내는 걸 사석에서조차 본 적이 없다. 나 같은 주변 사람들이 흥분하면 도리어 위로를 해주었다. 그래서 늘 궁금했다. 노회찬은 누구를 만나서 욕을 하고, 언제 어떻게 스트레스를 풀까? 노회찬재단 이사장을 맡고 유가족과 동창 등 그와 가까운 사람들을 만나게 됐다. 누구를 만나서도 욕을 한 적이 없다고 하더라. ‘그 모든 분노를 삭이고 혼자 책임지고 갔구나’라고 생각했다.

노회찬 전 의원이 내성적인 성품이었다는데?

낯을 많이 가렸다. 천성이 수줍었다. 그런데 진보 정치를 하는 사람들 가운데 가장 통합력이 큰 정치를 한 사람이 노회찬이다. 2004년 민주노동당이 총선을 치를 때 농민단체, 빈민단체 등 다양한 세력을 포섭한 게 노회찬 작품이다. 수줍어하고 낯가리는 사람이 어떻게 그런 역할을 했을까? 그건 목적의식이다. 진보 정치를 성공시키기 위해 자기 몸에 맞지 않는 방식으로, 의무감에서 했던 것이다. 일종의 사회적 자아가 있었다고 본다. 노 전 의원은 스스로를 객관적 입장에서 평가하고 그 지시를 충실히 따랐다.

‘진보 정치의 성공’은 무엇을 뜻하나?

사회적 약자들이 행복한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는 진보 정치가 강화돼야 하니까 진보 정당 의석이 늘어야 한다고 (노 전 의원은) 열망했다. 일반 시민들의 바람직한 나라상이 언제 구체적·집합적으로 표출됐을까? 노회찬 전 의원은 촛불집회 때였다고 본다. 노 전 의원은 촛불 민중이 많이 든 팻말 구호인 ‘이게 나라냐’가 불공정·불평등을 향한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 시대의 과제로 노 전 의원은 공정·평등·평화를 들었다. 평화는 재단이 어떻게 할 수 있는 문제는 아니라고 봐서 ‘평등하고 공정한 나라 노회찬재단’을 재단 정식 명칭으로 삼았다. 사회에서 통용되는 게임의 규칙은 국가권력과 시장권력에서 배제된 사람들에겐 대단히 불공정하다. 게임의 규칙을 공정하게 만들어야 불평등한 사회가 좀 더 평등해지고, 평등한 사회에서는 사회적 약자의 발언권이 강화되니 게임의 규칙이 좀 더 공정해지고. 이게 재단의 과제라고 봤다.

‘노회찬 정치학교’에서 양성하려는 제2의 노회찬이란?

노회찬 정치학교는 ‘노회찬 이후 노회찬 정치’를 표방한다. 그의 말과 글을 읽혀 붕어빵처럼 노회찬을 ‘제조’하는 것을 말하지는 않는다. 특정 주제에 몰두하는 자세, 사회적 약자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삶을 개선하려고 고민하는 태도가 중요하다. 예컨대 노 전 의원이 발의했던 고위공직자범죄수사처(공수처)법이나 중대재해기업처벌법이 통과되면 노회찬 정치는 끝인가? 그게 아니라 핵심은 집요한 문제의식과 창의적 정치 전략이다. 어떻게 법제화를 하고 말로 표현해 의제로 관철할지가 중요하다. 1기는 16주로 진행해 2월 초에 끝난다. 2기는 올해 하반기에 시작한다.

노 전 의원과 삼성은 뗄 수 없는 관계다. 최근 삼성그룹이 출범시키려는 ‘준법감시위원회’를 어떻게 보나?

이재용 삼성전자 부회장에게 면죄부를 주려는 사법부의 가증스러운 노력이라고 본다. 사법부와 삼성의 ‘짜고 치는 고스톱’이다. 노회찬 전 의원이 얘기했던 불공정의 핵심이 삼성이었다. 삼성만큼 헌법 위에서 군림했던 기구도 없다. 2008년 이건희 회장이 대국민 사과를 하며 내놓은 3대 약속 역시 뒤집은 바 있다. 노무현 정부 당시 진보적 대법관 5명 중에 한 사람(김지형 전 대법관)을 준법감시위원장으로 임명했으니 믿으라는 건데, 이 부분도 의문이다. 김 전 대법관은 2009년 삼성에버랜드 전환사채 헐값 발행에 대해 이건희 회장에게 무죄를 선고했다.

향후 노회찬재단이 계획 중인 주요 활동은?

‘6411번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다. 이 버스는 서울 구로에서 출발해 강남으로 간다. 승객들의 경로를 분석해보면 한국 노동계급 이동 지도가 된다. 현재는 버스가 통과하는 정류장의 빅데이터를 분석 중이다. 출발점과 도착점이 중요한 포인트다. 구로역 탑승객과 강남역 빌딩 탑승객이 어떻게 서로 만나는지 볼 생각이다. 6411번 버스 승객들이 대표하는 비정규직 여성 노동자들을 위해 무엇을 할지 연구하고 네트워크를 형성하려 한다.

기자명 이상원 기자 다른기사 보기 prodeo@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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