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식이 신나게 나가 놀기보다 가만히 책이나 읽기 바라던 부모 욕심을 계몽사가 채워주던 시절이었다. 우리 집에도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이 들어왔다. 천성이 심약하고 매사에 매가리가 없어 나가 노는 시간이 원체 길지 않은 탓도 있거니와, 가만히 책이나 읽고 있는 모습을 부모가 더 좋아한다는 것쯤 이미 눈치로 알았기에, 나는 매일 마루 한복판 엄마 아빠 눈에 제일 잘 띄는 곳에서 책을 읽었다.

처음에는 재밌어서 읽었지만 곧 우쭐한 기분이 좋아서 읽고 있었다. 누나들보다 빨리, 많이 읽는 게 유일한 자랑이던, 참으로 유치한 어린아이였다. 그렇게 한 권 두 권 해치우듯 읽다가 〈작은 아씨들〉 차례가 되었다. 이렇다 할 모험도 떠나지 않고 외로운 고아가 주인공도 아닌, 그냥 시시한 이야기. 그런데 내가 그런 책을 좋아하게 될 줄이야. 더구나 나는 ‘아씨’도 아니지 않은가!

어린 내게 〈작은 아씨들〉은 베스의 이야기였다. 심약하고 매가리 없는 모습에 동질감을 느껴서일까. 누나 둘의 악다구니를 매일 지켜보던 내게, 조와 에이미의 다툼을 지켜보는 베스가 남 같지 않아서일까. 나는 울었다. 베스가 죽을 때 정말 펑펑 울었다. 영화가 아니라 책을 보면서, 마른 책장 위로 눈물을 뚝뚝 흘려 적셔가며 운 경험은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책갈피 대신 끼워둔 눈물의 기억만 간직한 채 나는 어른이 되었고, 그레타 거윅 감독의 〈작은 아씨들〉을 보았다. “나는 항상 자유롭게 창조적인 ‘조’가 되고 싶었다”라는 그에게 이 소설은 ‘세상에서 가장 슬픈 이야기’가 아니다. ‘세상에서 가장 용감하고 진취적인 여성의 이야기’다. 이렇다 할 모험도 없다고 느낀 그때의 나와 달리 어린 거윅의 눈에는 조의 매일매일이 모험이었다. 내겐 ‘베스의 죽음으로 끝나는 이야기’였는데 그에겐 ‘베스의 죽음을 딛고 앞으로 나아가는 자매들의 이야기’다.

커다란 이야기가 작게만 보였던 이유

왜 내 눈엔 조가 보이지 않았을까? 왜 내겐 ‘영감을 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눈물이 나는 이야기’였을까? 어려서 그랬다고 말하고 싶지만 그건 정답이 아니라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남자라서 그랬다. 남자라서, 이 커다란 이야기를 작게만 보았다.

“여자도 감정만 있는 게 아니라 생각과 영혼이 있다고요. 외모만 있는 게 아니라 야심과 재능이 있어요. 여자에겐 사랑이 전부라는 말, 지긋지긋해요.” 영화 속 조의 대사가 내 기억 속 베스의 죽음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이야기라는 걸 이젠 안다. 제목에 쓴 ‘아씨’라는 단어 말고는 단 하나도 진부한 요소가 없는 정말 근사한 영화 덕분에, 이제라도 어른의 눈으로, 늦었지만 조의 마음으로, 〈작은 아씨들〉을 다시 읽을 작정이다.

믿기 힘들겠지만, 영화 〈작은 아씨들〉은 ‘지난 시대의 고전’이 아니다. ‘우리 시대의 신작’이다. 놀라울 정도로 모든 면에서 요즘 이야기. 그러면서도 즐겁고 따뜻하고 가슴 벅찬 영화.

기자명 김세윤 (영화 칼럼니스트)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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