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Google 갈무리자메이카 출신 DJ 쿨 허크(사진 오른쪽)는 ‘힙합의 아버지’라고 불린다.

잘 모르는 것, 대표적으로 힙합에 대해선 말을 얹지 않았다. 내 듣기의 바탕은 팝, 록 한정이기 때문이다. 왠지 모르게 힙합은 좀 더 전문적인 비평의 영역이라는 인상을 준다. 실제로도 한국에는 능력 있는 힙합 평론가가 여럿 있다. 힙합은 그들에게 맡기고, 나는 그나마 꿰고 있는 것에 대해 쓰고 말하려 했다. 지금까지 지켜온 마지노선이요, 최소한의 직업윤리다.

그럼에도, 오해를 바로잡고 싶어서 글을 쓴다. 결론부터 말하자면 힙합은 당신의 생각보다 훨씬 유서 깊은 음악이다. “힙합 요즘 애들 음악 아냐?” 이런 단언과 수도 없이 마주쳤다. 이 글을 읽는 독자는 부디 그러지 않기를 바란다. 놀라지 마시라. 힙합의 역사는 정확히 47년 정도 되었다. 1973년 최초의 힙합이 탄생했으니까 말이다.

장소는 뉴욕 브롱크스였다. DJ 쿨 허크라는 인물이 작은 레크리에이션 룸에서 파티를 개최했고, 이게 바로 힙합의 시작이었다. 그는 당대에 가장 혁신적인 DJ였다. 기존 DJ와는 달리 턴테이블을 2대, 그것도 동시에 사용하면서 곡을 끊임없이 잇고, 늘렸다.

핵심은 지금부터다. 그는 라디오에서 나오는 흔한 음악 따위는 틀지 않았다. 또한 곡 전체를 틀지도 않았다. 음악 용어로 설명하자면 ‘브레이크 비트’만 추려내 관객들을 광란으로 몰고 갔다. 브레이크 비트는 ‘곡의 절정에서 드럼과 베이스를 강조한 파트’를 뜻한다. 이를테면 곡의 특정 부분을 잘라서 붙인 셈이다. 힙합의 기본인 ‘컷 앤드 페이스트’가 여기에 뿌리를 두고 있다.

흑인들은 이 브레이크 비트에 맞춰 고난도의 춤을 추며 실력을 겨뤘다. 브레이크 댄스의 등장이다. 사람들은 ‘브레이크’의 맨 앞글자만 따와 그들을 ‘비보이(B-boy) & 비걸(B-girl)’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어느덧 한국이 최강국 중 하나가 된 비보이 & 비걸의 탄생이다. 기실 힙합은 음악 장르가 아니다. 원래 힙합은 턴테이블 DJ, 랩을 하는 MC, 비-댄서와 그림 예술인 그래피티를 모두 합친 총체였다. 이후 힙합은 역사상 가장 거대하게 성장한 하위문화가 된다.

나를 구원한 ‘낯섦에 대한 관용적 태도’

“요즘 힙합은 허세만 가득해.” 쉽게 내뱉은 적 있을 것이다. “돈과 여자 얘기만 해” 무심코 불평한 적 있을 것이다. 꼭 그렇지는 않다. 과하다 싶은 느낌이 없지 않지만 ‘마음만 먹으면’ 한국에서도 짜릿한 예술적 성취를 이룬 작품을 얼마든지 찾아볼 수 있다. 2010년대로만 한정해도 딥플로우의 〈양화〉(2015), 넉살의 〈작은 것들의 신〉 (2016), 이센스의 〈디 애닉도트(The Anecdote)〉(2015), 화지의 〈이트(Eat)〉 (2014) 등, ‘마음만 먹으면’ 리스트를 적는 걸로 지면을 채울 수 있을 정도다.

결국 마음먹기에 달렸다고 믿는다. 그 대상이 무엇이든 낯섦은 경계심을 불러온다. 어쩌면 인간의 본성이다. 인생을 살면서 피할 수 없는 게 하나 있다면 관성에 지배당하는 거라고 생각한다. 나이가 들수록 인간은 익숙하고 편한 대상을 찾게 되어 있다. 전부는 아니지만 대체로 보면 그렇다.

그리하여 내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다음과 같다. 나를 구원한 건 결국 ‘낯섦에 대한 관용적 태도’였다. 강요는 아니다. 다만, 함부로 재단하지 말자는 거다. 좀 더 광범위하게 논해볼까. 예외가 버젓이 존재함에도 전체를 싸잡아 판단하려 할 때 혐오와 폭력은 작동한다. 오늘, 중국인 입국 금지 청원을 봤다. 과연, 비단 힙합에만 국한된 얘기는 아닌 듯싶다.

기자명 배순탁 (음악평론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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