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브리그’는 우리 일터 이야기다
  • 김영화 기자
  • 호수 647
  • 승인 2020.02.13 23: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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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라마 〈 스토브리그〉가 인기를 끄는 요인은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여서다. 시청자들은 드라마 속 인물들의 갈등을 보며 자신이 다니는 직장을 떠올린다. 분명한 선과 악도 없다.
ⓒSBS 홍보실〈스토브리그〉는 업계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가 돋보이는 드라마다.

한 해 ‘야구 농사’를 위한 밑거름은 겨울에 다져진다. 시즌이 끝나는 11월부터 시범 경기가 시작되는 3월까지가 구단들이 가장 분주해지는 시기다. 선수 영입과 방출, 연봉 협상 등 전력 강화를 위한 물밑 작업이 모두 이때 이루어진다. 텅 빈 그라운드 뒤편에서 국내 프로야구 10개 구단이 치열한 두뇌싸움과 협상을 벌인다. 프로야구에서는 이 시기를 ‘스토브리그’라 부른다. 비시즌 기간에 야구팬들이 난로(Stove) 주변에 모여 선수와 구단의 동향에 대해 떠드는 모습을 본떠 만든 말이다.

한 야구팀이 이번 스토브리그를 달구고 있다. SBS 드라마 〈스토브리그〉의 주 배경인 야구단 ‘드림스’다. 드라마는 만년 꼴찌 프로야구팀 드림스에 백승수 단장(남궁민)이 들어오면서 새 시즌을 위해 팀을 혁신하는 과정을 담았다. 첫 회(지난해 12월13일) 시청률 5.5%로 시작한 이 드라마는 입소문을 타기 시작하면서 11화(1월18일)에서 16.5%를 기록할 정도로 인기를 끌고 있다. 설 연휴로 인해 1월24일과 25일 이틀간 결방하자 시청자 게시판은 물론 국내 야구 갤러리와 커뮤니티에 분노와 아쉬움 섞인 반응이 쏟아졌다. “솔직히 야구팬들은 더블헤더(우천으로 인해 전날 경기가 취소될 경우 하루에 경기를 두 번 진행하는 것) 좋아하지는 않지만 이 드라마는 더블헤더 보고 싶네요.”

드림스는 4년 연속 꼴찌팀에 코치 간 파벌 싸움으로 내분을 겪고 있었다.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도 상대팀 바이킹스와 9점 차로 벌어지자 팬들은 싸늘한 표정으로 자리를 뜬다. 관중석에 앉은 누군가가 이렇게 소리친다. “니들 그 따위로 할 거면 야구 때려쳐라.” 첫 화부터 야구 갤러리와 커뮤니티에는 “이거 우리 팀 이야기 같다”라며 감정이입하는 야구팬들이 속출했다. 박찬근씨(37)는 보자마자 LG 트윈스팀을 떠올렸다. 사회인야구 동호회에서 활동할 정도로 야구에 관심이 많은 그는 “만년 하위권 성적으로 가을 야구는 꿈도 못 꾸는 설정이나 팀에서 분란을 일으키지만 구단주의 비호를 받는 타자 임동규 캐릭터를 보면서 비슷하다고 느꼈다”라고 말했다.

데자뷔를 경험하는 건 LG 팬만이 아니다. 드라마가 시작하기 전 ‘본 드라마는 픽션이며 특정 인물이나 사건, 구단, 단체 및 조직, 배경 등은 실제와 어떠한 관련이 없음을 밝힙니다’라는 문구가 뜨지만 야구팬 커뮤니티에서는 그 장면이 “〈스토브리그〉에서 가장 말이 안 되는 장면”이라는 우스갯소리가 나돈다. 드라마 소재가 된 스카우트 비리, 귀화 선수의 병역 논란, 연봉 삭감, 고교 선수 구타 등은 한국 프로야구사에서 실제로 발생했던 사건이기 때문이다. 유선주 TV 칼럼니스트는 “작가가 내부인이 아닌가 싶을 정도로 업계에 대한 디테일한 묘사가 돋보인다”라고 평했다. 실제로 각 구단 프런트 관계자와 스포츠 전문기자 등 대본 자문위원만 18명일 정도로 충실한 취재와 고증에 바탕을 둔 각본으로 알려져 있다.

주인공 백승수 단장 캐릭터는 롯데 자이언츠의 성민규 단장을 모티브로 삼았을 거라는 추측이 압도적이다. 1982년생 젊은 단장인 데다 골든글러브 출신 안치홍 선수를 영입하는 등 파격적인 행보를 보이는 점이 닮아서다. 드라마 팬들 사이에서는 백 단장이 ‘남궁민규’로 통한다. 외국인 용병 선수로 나온 로버트 길(이용우)의 사연은 한국 국적을 포기하고 미국 메이저리그에서 활동했던 백차승 선수를 연상케 한다. “투수는 귀족, 외야수는 상인, 내야수는 노비, 포수는 거지”라고 말했던 NC 다이노스 김태군 포수의 실제 어록이 대사로 소환된다. “드림스 강두기 선수 실사판 이분 아닌가요?” “이건 아무리 봐도 롯데인데” “오늘은 두산 등판했네요. 삼성 얘기는 언제 나오려나” 하는 추측들이 게시판을 채우는 이유다.

비합리적인 조직에 관한 이야기

그렇다고 해서 ‘야잘알(야구를 잘 아는)’만 즐길 수 있는 드라마는 아니다. 드라마가 인기를 끄는 본질적 요인은 ‘일하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데 있다. ‘스토브리그’라는 소재를 통해 운영팀, 마케팅팀, 구단주, 단장, 선수단 등 야구단을 구성하는 인물들이 어떻게 일하고 갈등을 겪는지 보여준다. 선수 트레이드를 앞두고 단장이 면밀한 데이터 분석을 통해 구단 관계자들을 설득하는 과정을 보여주거나, 연봉 협상 국면에서 구단과 선수들 사이에 벌어지는 미묘한 감정싸움을 그린다. 급여를 받지 않는 비활동 기간인 1~2월에 선수 훈련을 강제해야 하는지를 두고 단장과 야구협회장이 날 선 논쟁을 주고받는다. 이런 장면들이 드라마의 중심 서사다. 유선주 TV 칼럼니스트는 “연애 감정이나 신파 없이 오로지 일하는 이야기만으로 충분한 긴장을 만들어낼 수 있다는 것을 이 드라마가 보여주고 있다”라고 말했다.

〈스토브리그〉 애청자인 박찬근씨가 보기에도 이 드라마는 “야구가 아니라 비합리적인 조직에 대한 이야기”다. 극중 백승수 단장은 구단의 비합리적 관행에 의문을 품고 적폐를 청산하려 하는 인물이다. 기존 ‘고인물’들은 그를 “업계를 모르는 야구 문외한”이라 비난한다. 비리를 저지른 스카우트 팀장에 대해 “오래 봐온 분이라 믿는다”라고 동료들이 비호하는 장면에서 특히 공감했다. 박찬근씨가 8년째 다니고 있는 직장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실제 회사에서도 단순히 해오던 방식이라는 이유만으로 시스템이 짜인 경우가 많지 않나. 백 단장 캐릭터는 젊은 세대가 바라는 리더의 모습을 그대로 구현해놓은 것 같다.”

사이다 같은 백 단장의 돌직구 어록이 매번 온라인에서 회자된다. “정치는 잘하는데 야구는 못하면 그게 제일 쪽팔린 거 아닙니까” “박힌 돌에는 이끼가 더 많이 낍니다”와 같은 대사에 시청자들은 카타르시스를 느낀다.

드라마는 백 단장의 캐릭터를 영웅으로 그리진 않는다. ‘고인물’로 대표되는 구단주 대행이나 코치들도 원래부터 악인은 아니다. 코치와 감독이, 선수와 선수가, 단장과 구단주가 갈등하는 이유는 조직 내에서 각자의 이해관계가 다르기 때문이다. 11화에서 백 단장과 설전을 벌이던 구단주 대행 권경민(오정세)은 말한다. “1년 예산 고작 200억 쓰는 너희들이 뭘 그렇게 아등바등 싸우면서 일해? 사이좋게 일하기 힘들어?” 이 드라마에는 분명한 선과 악이 없다. 영원한 아군과 적도 존재하지 않는다. 현실의 일터와 닮은 부분이다. 꼭 야구팬이 아니더라도 이 드라마에 몰입할 수 있는 이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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