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사IN 이명익‘18세 선거권’을 위해 뛰어온 청소년 인권 활동가 정유정씨.

믿어지지 않아서 관련 기사를 검색해 모두 읽었다. 그제야 조금 실감이 났다. “조금 울었어요.” 정유정씨(18)가 쑥스러운 듯 웃었다. 지난해 12월27일 ‘공직선거법 일부개정법률안’이 통과돼 선거 연령이 만 19세에서 만 18세로 낮아졌다. 4월15일 제21대 총선부터 만 18세 유권자 53만7000여 명(2001년 4월17일~2002년 4월16일 출생자)이 선거권을 갖는다. 전체 유권자의 약 1.2%이다. 정씨도 그중 한 명이다.

탈학교 청소년인 정씨는 각종 기자회견이 열리는 수도권에 살면서 실명으로 발언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청소년 인권 활동가다. 그동안 수많은 언론을 상대해왔다. 18세 선거권이 통과된 뒤 가장 크게 체감하는 것도 기자들의 질문이 달라진 점이다. “더 이상 ‘왜 18세가 선거권을 가져야 하느냐’라는 질문을 받지 않아도 돼서 좋아요. 18세 선거권이 이제는 ‘상식’이 됐잖아요.”

정씨가 학교를 그만둔 건 2018년 4월이었다. 중학교 때 ‘여자들은 수학을 못한다’ ‘성소수자는 이상한 사람이다’ 따위 혐오 발언과 폭언을 일삼는 교사에게 문제의식을 느껴 쓴 대자보가 잘게 찢겨 변기에 버려지는 꼴을 봐야 했다. 학교 명예를 실추시킨다는 이유였다. 학생인권조례도 방패막이가 되어주지 못했다. 학교를 다닐 만한 정신적 체력이 남아 있지 않았다.

교실 대신 천막을 찾았다. 그곳에 또래 친구이자 동료 활동가들이 있었다. 2018년 6월 지방선거를 앞두고 선거 연령을 낮추기 위해 촛불청소년인권법제정연대가 서울 여의도 국회의사당 앞에서 농성 중이었다. 김윤송씨(18), 남보경씨(19), 김정민씨(20)가 삭발을 결심했을 때 바리캉을 든 사람이 정씨였다. 당시 농성은 43일 동안 이어졌지만, 선거권 연령 하향이라는 목표를 이루지 못했다.

선거권을 위해 머리카락까지 밀었던 김윤송씨는 정작 4월15일에 투표를 할 수 없다. 2002년 11월 출생자라서다. 그렇지만 김씨는 아쉬움이 없다. 처음부터 자신이 ‘혜택’을 볼 수 있을 거라는 기대를 하고 시작한 일이 아니었다. “제 일이라서가 아니라 필요한 일이니까 했던 거죠.” 흑인과 여성들이 참정권을 쟁취해온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었다. 참정권 부여 기준이 인종이나 성별일 필요가 없듯이, 나이일 필요도 없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법적 미성년자인 만 18세가 ‘19금’의 벽을 깨기란 쉽지 않았다. 1948년 국회가 만 21세 이상에게 선거권을 부여한 이후 1960년에는 만 20세로, 2005년에는 만 19세로 참정권 연령이 점차 낮아지기는 했다. ‘18세 선거권’은 1997년 김대중 대통령이 처음 공약으로 내걸었지만 이루어지지 않았고, 2002년 ‘낮추자’ 운동을 이끌던 청소년들이 16대 대선 모의 투표를 진행하면서 조금씩 조명을 받기 시작했다. 이처럼 선거권 연령 하향은 청소년 인권 활동가들이 해온 오랜 싸움의 역사 속에 놓여 있다. 이 때문에 청소년 인권 활동가들은 이번에 선거권을 얻게 된 ‘청소년 당사자’에게 주목하기보다는 ‘청소년 인권 활동’ 전체를 봐달라고 부탁한다.

ⓒ시사IN 윤무영‘18세 선거권’을 위해 뛰어온 청소년 인권 활동가 김윤송씨.

김윤송씨는 최근 18세 선거권을 둘러싼 정부의 ‘호들갑’을 흥미롭게 보고 있다. 청소년 인권과 관련된 꾸준한 문제 제기는 본체만체하던 사람들이 갑자기 ‘가이드라인을 만들어야 한다’ ‘선거 교육을 해야 한다’라며 고3 교실이 혼란해질 거라고 지레짐작하는 게 요상하다. “성인들에게는 구태여 하지 않는 민주시민 교육을 청소년한테만 하는 것도 차별적이죠. 사실 투표를 뭐 그렇게 잘못할 수가 있나요? 청소년이 잘못된 후보를 뽑는 게 걱정된다는데, 아니 애초에 그 잘못된 후보는 왜 투표용지에 올라와 있는 거죠?(웃음).”

스쿨 미투를 계기로 만들어진 청소년 페미니스트 네트워크 ‘위티’ 대표 최유경씨(18)는 이번에 주어진 첫 선거권을 꼭 행사할 예정이다. 주변 친구들을 보면 스스로를 미성숙하다고 생각하는 경우도 많다. 하지만 최씨는 스스로 미성숙하다고 여길수록 오히려 더 정치에 적극 참여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성인들은 별 고민 없이 당연하고 당당하게 투표하잖아요. 성숙과 비성숙의 경계가 ‘19세’라는 게 이상하지 않나요? 누구든 자신이 미성숙하다고 느껴진다면 오히려 정치에 더 적극적으로 참여해야 한다고 봐요. 자신과 주위의 문제를 사회적으로 어떻게 해결해나갈 수 있을지 고민하는 과정을 통해 성숙해질 수 있다고 믿습니다.”

청소년 활동가들의 목표는 ‘16세 선거권’

1월15일 중앙선거관리위원회는 18세 선거권 확대에 따른 종합대응계획을 발표했다. 선거 교육 교재를 나눠주고, 불법적인 선거 행위를 적발하기 위한 신고·제보 센터를 운영하겠다는 내용이 주요 뼈대다. 하지만 최씨가 말한 ‘고민하는 과정’은 학교에서 교과목으로만 배울 수 있는 건 아니다. 최씨는 스쿨 미투의 경험을 복기했다. “당시 ‘학교에서 어떤 교육을 해야 하느냐’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받았어요. 무엇보다 학생들의 발언권을 보장해줘야 하고 모든 교과과정을 소수자 관점에서 재개편해야 한다고 답했는데, 전체를 바꾸지 않고 단순히 ‘페미니즘 교육’을 추가한다고 해서 해결될 문제가 아니기 때문이죠. 마찬가지로 민주시민 교육 수업을 받는다고 해서 민주시민이 될 수는 없어요. 교육이 필요하겠지만 그건 최소한의 방침이죠.”

ⓒ시사IN 이명익‘18세 선거권’을 위해 뛰어온 청소년 인권 활동가 최유경씨.

하지만 청소년은 여전히 동료 시민이 아니라 ‘미래’이자 ‘보호’받아야 할 대상으로 대상화되곤 한다. 1월9일 서울시청 다목적홀에서는 전국 500여 개 시민사회단체가 모인 ‘시민사회단체연대회의’ 주최의 신년 하례회가 열렸다. 이 자리에 18세 청소년 유권자 대표로 참석한 정유정씨는 “청소년이 ‘미래 세대’와 같은 말로 불리지 않는 내일을 바란다. 유예된 존재, 수동적 보호의 대상이 아닌 지금 현재를 살아가는 동등한 시민으로 함께하고 싶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단상에서 내려오자마자 ‘청소년은 우리의 미래’라는 말을 수차례 들어야 했다.

정씨는 진정으로 청소년을 ‘보호’하고 싶다면 청소년이 시민의 범주 안에서 건강하게 권리를 누릴 수 있는 방법을 터득할 기회를 줘야 하고, 선거권은 그 시작이 될 수 있다고 봤다. “청소년이 투표하고 정치에 참여하는 행위가 위험하다는 말을 들을 때마다, 어른들이 얼마나 심각한 정치 혐오에 빠져 있는지 새삼 생각해보게 돼요.”

이제 겨우 청소년이 정치를 할 수 있는 한 뼘의 공간이 생겼다. 18세가 투표를 할 수 있게 됐다고 해서 세상이 당장 크게 바뀌지는 않을 테다. 하지만 18세 선거권은 청소년 운동에서 드문 승리의 경험이기도 하다. 이제 청소년 인권 활동가들의 목표는 ‘16세 선거권’이다. 물론 선거권 연령 하향 외에도 여전히 과제가 많다. 정당 당원으로 등록할 수 있는 나이는 만 19세이고, 국회의원 후보로 등록할 수 있는 피선거권은 만 25세 이상이다. 갈 길이 멀다.

기자명 나경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didi@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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