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현지 그림

곰탕 그릇에 소금을 넣은 뒤 후추를 쳤다. 파를 넣어 색감을 맞추고 깍두기 국물로 농도를 조절했다. 마음은 급한데 손은 굼떴다. 어떤 말부터 꺼내야 하나. 한참 동안 알맹이 없는 얘기가 오고 가다가 국물이 다 식었다. 파산, 이혼, 파탄 그리고 상처. 날선 단어가 숨 쉴 틈 없이 밖으로 쏟아졌다. 듣기만 해도 숨이 찼다. 무게를 알기에 가볍게 맞장구도 칠 수 없는 격렬함이 말과 표정으로 드러나고 사라졌다. 당부를 하겠다던 처음 마음가짐은 사라지고 듣는 자리로 변했다. 쌍용차 해고 노동자들의 복직이 좌절되었을 때, 일일이 밥 한 끼라도 먼저 먹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상태가 걱정스러웠다. 처음 만난 형과 곰탕집 대화가 끝날 무렵, 예상했던 상태를 이미 벗어난 이들도 많다는 것을 알았다. 마음이 더 급해졌다.

정부 지원 타내려 해고자 이용

마라톤 풀코스를 달려 결승선이 코앞인데 결승선이 사라졌다. 더 뛰어야 하나, 달리기를 멈춰야 하나. 해고 노동자들의 지난했던 해고 생활이 청산을 앞둔 지난해 12월24일 다시 연장되었다. 10년7개월의 해고 시계가 이번에는 멈춰야 했는데, 이해할 수 없는 이유로 다시 돌아가기 시작했다. 어떤 자들의 잇속과 정략을 위해 쌍용차 해고 노동자 46명이 인질이 되고 만 것이다.

2018년 9월21일 쌍용차 해고 노동자 복직 문제는 매듭지어졌다. 이른바 노노사정(쌍용차 기업노조, 금속노조 쌍용차지부, 회사, 경제사회노동위원회) 4자 합의는 “2019년 상반기까지 전원 복직을 완료하고, 부서 배치를 받지 못한 인원에 대해서는 2019년 말까지만 무급휴직으로 처리한 이후 2020년 1월부터는 부서 배치한다.” 그럼에도 복직이 연기된 이유는 무엇인가.

2019년 12월24일 사측은 기업노조와 별도 합의를 했다. “기업 사정이 원활치 않아 경기 회복과 라인 운영에 따라 추후 복직”시키겠다고 했다. 해고자 복직 합의를 노노사정 4자가 했는데 그 결정의 번복을 노사 2자만이 했다. 1월9일 경기지방노동위에 부당노동행위 구제 신청을 냈다. 복직 합의 주체와 번복 주체가 다른 합의서는 인정할 수 없다는 점과 노무 수령 거부(일방적인 유급휴직 통보)는 명백한 부당노동행위라고 주장했다. 특히 사측과 공장 안 기업노조의 횡포에 가까운 이번 복직 연장 결정은 다른 의도가 분명히 도사리고 있다는 점이 더 큰 문제다. 이번 복직 대상자 가운데는 쌍용차 파업 당시 지부장이던 한상균 전 민주노총 위원장을 포함해 김득중 지부장 등 쌍용차 투쟁의 상징성이 큰 인물이 다수 포함되어 있기 때문이다.

쌍용차의 이번 복직 연기 조치 이유는 복합적이다. 먼저, 쌍용차의 경영 여건이 어려운 가운데 산업은행이나 정부 지원이 필요한 상태다. 그 필요성을 강조하려고 해고자를 이용하고 있다. 얼마 되지 않는 해고자 46명도 복직시킬 여력이 없다는 점을 대내외적으로 알리는 길을 선택했다. 두 번째는 현장 노동자들에 대한 통제와 지배 개입을 다시 높이려는 의도가 있다. 쌍용차는 2009년 파업 이후 노동조합을 이른바 어용노조화 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기업노조 위원장에게만 엄청난 특혜를 제공함으로써 현장과 노조 간 분리 전략을 취했다. 이번 복직을 계기로 다시 꿈틀대는 현장 흐름을 차단하고 사측과 기업노조가 주도권을 쥐겠다는 전략으로 보인다.

곰탕을 먹고 나서는데 형이 52년을 쓰던 이름을 바꿨다고 했다. ‘석’자에서 ‘현’자로. 바꾼 현자가 어떤 뜻이냐 물었더니 ‘솥귀 현(鉉)’이라 했다. 집에 오는 전철 안에서 한자를 찾아봤다. 솥을 아궁이에 걸게 만드는 고리라는 뜻이었다. 꼭 필요한 존재란 뜻도 된다. 10년7개월 잘 달려온 이들이 아궁이에 안착할 수 있는 방법은 뭘까. 덩그러니 솥귀 빠진 솥단지들이 오늘도 공장 안에서 기약 없는 출근 투쟁을 벌이고 있다.

기자명 이창근(쌍용자동차 노동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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