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양 조선중앙통신지난해 12월22일 김정은 국무위원장이 제7기 3차 확대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의 당초 소망은, 새해 첫날 멋진 신년사를 발표하는 것이었다. 당이 지난해 2월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결렬의 충격을 극복하고 ‘2020년 북·미 관계 대(大)결전의 해’를 맞아 승리의 비전을 확고하게 다지는 모습을 주민들에게 보여주고 싶었다. 올해 신년사가 ‘당중앙위원회 전원회의 결정서’로 대체됐다는 것은 당초의 계획이 뜻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는 의미다.

김정은 위원장과 당 국제부 혹은 북한 외무성(이하 외무성)의 당초 계획대로라면 지난 연말 이전에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의 제3차 북·미 정상회담이 짧은 시간 내에서라도 성사되어야 했다. 그래야 멋진 신년사를 만들 수 있었다. 이를 위해 동창리에서 미사일 엔진 시험을 연거푸 시행하며 ‘크리스마스 선물’을 빙자한 벼랑 끝 전술을 펼친 것이다. 북한 측 계산대로라면, 국내 입지가 취약해졌을 트럼프 대통령이 뭔가 반응을 보여야 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오히려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식으로 정찰기를 파견하며 한반도 긴장을 북측과 함께 끌어올리는 식의 대응으로 일관했다.

미국의 ‘역(逆)긴장 고조 전략’으로 북측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부도 수표로 끝났다. 이런 가운데 북한의 ‘전원회의 결정서’가 나왔다. 이 결정서 역시 ‘핵·경제 병진 전략으로의 복귀’ 등 북·미 회담 이전 상황으로의 후퇴를 선언하지는 않았다. 물론 새로운 전략무기 개발을 계속할 것이며 조만간 그 모습을 보게 될 것이라는 등의 표현이 눈길을 끈다. 그러나 큰 방향은 지난해 4월의 4차 전원회의와 크게 다르지 않다.

지난해 4월 북측이 제시한 구호는 ‘자력갱생을 통한 제재 극복과 경제총력전’이었다. 12월 말의 제7기 5차 전원회의에서는 “우리의 전진을 저해하는 모든 난관을 정면돌파전으로 뚫고 나가자”라는 구호가 제시됐다. ‘정면돌파전’의 기본 전선은 경제다. 결정서는 “(핵·경제) 병진의 길을 걸을 때에나”라는 표현을 쓴다. 병진 전략은 이미 과거의 것이 되었다는 의미다. “경제 건설에 총력을 집중하기 위한 투쟁을 벌리고(벌이고) 있는 지금이나” 같은 표현을 보면, 이른바 정면돌파전이 2018년 4월의 전원회의에서 채택된 ‘경제 집중 노선’의 틀 안에 있는 것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왜 갑자기 “전략무기 개발 사업을 더 활기차게 밀고 나가야 한다”라며 지난 1년 동안 거의 사용하지 않았던 위협적 표현을 쓴 것일까? 결정서는 정면돌파전의 정치·외교·군사적 담보를 언급하는 대목에서 그와 같이 언급한다. 그런데 경제전선에 초점을 맞춘 정면돌파전을 담보하기 위해 ‘전략무기 개발’까지 주장할 필요가 있었을까?

다만 결정서를 자세히 보면 전략무기 개발의 필요성이 다른 맥락에서 등장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미국이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끝까지 추구한다면 조선반도 비핵화는 영원히 없을 것”이며 “적대시 정책이 철회되고 조선반도에 항구적 공고한 평화체제가 구축될 때까지 국가 안전을 위한 필수적이며 선결적인 전략무기 개발을 중단 없이 계속 줄기차게 진행해갈 것임을 단호히 선언”한 대목이다.

이른바 미국의 ‘적대시 정책’이 존재하는 한 ‘비핵화는 영원히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다. 지금까지와 같은 상황이라면, 기존 비핵화 회담을 중단하고 핵보유로 나가겠다는 선언이나 다름없다. 미국이 적대시 정책을 포기할 때까지 북한도 체제 안전을 위해 핵을 포기하지 않겠다는 의미다.

북측 전원회의 결정서가 담고 있는 이 같은 논리는, 북한 권력 내 ‘주체파’가 노동당의 공식 입장을 결정하는 세력으로 전면에 등장했음을 의미한다. 지난해 10월5일 스웨덴 스톡홀름에서 열린 ‘북한 비핵화와 한반도 평화체제 구축을 위한 북·미 실무회담(실무회담)’ 결렬 이후 주체파가 부상했다(〈시사IN〉 제631호 ‘북·미 대결전으로 김정은 위인 만들기’ 기사 참조). 주체파는 북한의 당·정·군 내에서 ‘핵 포기 신중론’을 주장해온 일군의 사람들을 뜻한다. 북한 권력 속성상 이들이 세력을 구축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평양 조선중앙통신지난해 12월4일 김정은 국무위원장(맨 오른쪽)이 부인 리설주 여사와 함께 ‘백두산지구 혁명전적지’를 둘러보고 있다.

“미국을 어떻게 믿고 핵을 포기하겠느냐”

그러나 하노이 북·미 정상회담 실패 이후 기존 ‘통전부식 접근’에 대한 반대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덕분에 주체파가 더 이상 무시할 수 없는 발언권을 획득하게 되었다. 이들의 주장은 한마디로 ‘미국을 어떻게 믿고 핵을 포기하느냐’는 것이다. 주체파에 따르면, ‘북한의 핵 포기는 미국으로부터 안전에 대한 담보가 확실하게 이뤄진 최후의 순간에 결행해도 늦지 않다’.

지난해 10월5일 스톡홀름에서 북·미 접촉이 결렬된 것은 북한 내부의 세력 변동 때문이기도 하다. 그동안 대미 협상을 주도하는 세력이 통전부에서 북한 외무성으로 변경되었다. 여기에 주체파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군부의 입장이 가세했다.

당시 북한 외무성은, 하노이 회담의 수모를 만회하고 ‘2020년 북·미 대결전’의 서막을 열어간다는 전략으로 스톡홀름 실무회담에 임했다. 이 실무회담의 결렬은 어느 정도 의도적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북측 처지에서는 하노이 정상회담의 수모를 갚아야 했다. 그렇다고 북측이 북·미 회담을 파탄으로 몰고 가려 했던 것은 아니다. 연말까지 제3차 북·미 정상회담을 열어야 김정은 위원장이 2020년 1월1일의 신년사를 자신 있게 발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후 외무성은 ‘김정은 위인 만들기’ 계획을 추동하려고 했다. 핵심 시나리오는, 김정은 위원장이 2020년 9월 유엔 총회에서 연설하는 것이다. 그와 북한이 국제무대에 화려하게 등장하게 된다. 그 여세를 몰아 미국 워싱턴에서 북·미 정상 공동선언으로 비핵화와 북·미 관계 개선을 국제사회에 천명하고 싶었다. 북한 내부적으로는 핵 무력의 완성을 통한 북·미 대결전에서 ‘사회주의의 최후 승리’를 가져온 위인으로 김정은 위원장을 띄울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다.

전 단계인 북·미 접촉에서부터 김정은 위원장의 존재감을 뚜렷하게 만들 필요가 있었다. 외무성의 일개 순회대사 수준에서 큰 성과가 나오는 것은, 북한 체제 차원에서 합리적이지 않다. 김명길 순회대사가 대표로 나선 스톡홀름 실무회담을 의도적으로 무산시킨 뒤 11월 말까지 한 번 더 실무회담을 치르고, 12월 중에 김정은 위원장과 트럼프 대통령 간 정상회담을 통해 2020년의 계획을 세워가는 쪽이 나았다.

그러자면 북한 측도 미국이 원하는 답을 내놓을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한다.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해 하노이 회담 당시, 영변 외부의 강선 등에 있는 우라늄 농축시설의 존재를 인정하고 폐기 프로세스를 밟으라고 요구한 바 있다. 북한 비핵화 과정의 첫 관문이라 할 수 있는 대목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지난해 6월30일 북·미 간 접촉에서 북측이 이미 긍정적 사인을 보낸 바 있다. 북·미 정상회담이 2019년 연말까지 성사되면, 미국의 상응하는 조치를 전제로 김정은 위원장이 영변 외부 시설의 존재를 인정하고 폐기 로드맵을 짜는 데 동의하는 복안을 가졌다.

ⓒAP Photo지난해 10월5일 김명길 북한 순회대사(가운데)가 “스톡홀름 북·미 실무협상 결렬”을 밝히고 있다.

변수가 생긴다. 북한 내부적으로는 체제 안전보장에 대한 주체파의 목소리가 무시할 수 없는 수준으로 커졌다. 스톡홀름 실무회담에서 북한이 미국에 제시한 요구 사항의 중심이 하노이 회담 당시와 확연히 달라졌다는 게 그 징후다. 하노이 회담에서 북한은 영변 핵시설 폐쇄의 대가로 2016~2017년에 결정된 유엔안보리 제재 5개의 해제를 요구했다. 스톡홀름 실무회담에 참석한 미국 대표들은 하노이 회담의 전례를 참조했다. 석탄과 섬유 수출에 대한 대북 유엔 제재를 3년간 유예하는 방안을 카드로 준비해갔다고 한다. 문제는 북측 생각이 하노이 회담 당시와 달랐다는 것이다. 회담 당일 김명길 순회대사의 결렬 성명서나 그다음 날(2019년 10월6일) 외무성 담화에 나타나듯, 북측은 ‘대조선 적대시 정책의 완전하고 되돌릴 수 없는 철회를 위한 실제적인 조치’를 요구했다. 북·미 양국의 요구가 서로 어긋난 것이다.

또 하나 변수는 미국 내부에서 일어났다. 지난해 7월 트럼프 대통령과 볼로디미르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통화가 누출되면서 시작된 탄핵 정국이다. 민주당 소속인 낸시 펠로시 미국 하원의장이 탄핵 조사를 선언한 날(2019년 9월24일)은 스톡홀름 실무회담 예정일로부터 10여 일 전이었다. 북한으로서는 하노이 회담 당시와 마찬가지로 여러 가지 ‘고려 사항’이 발생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이 하원에서 탄핵당한 뒤 2020년 11월의 미국 대선에서 낙선할 가능성도 있어 보였다. 북측으로서도 계획(2020년 9~10월에 북·미 정상회담)을 재고할 수밖에 없었다. 당분간 미국 내 상황을 주시할 필요가 있었다.

지난해 10월 스톡홀름 실무회담 결렬 이후 미국은 ‘2주 후 다시 만나자’고 북측에 요구했다. 북한 당국은 묵묵부답이었다. 미국 내 상황을 지켜보면서 추후의 협상 전략을 재검토하기 위한 시한으로 11월 말까지를 설정했기 때문이다. 그 사이인 지난해 10월15일 김정은 위원장이 돌연 백마를 타고 백두산에 나타났다. 그가 뭔가 중대 결심을 한 게 아니냐는 분석이 제기됐다. 지난해 10월23일 〈조선중앙통신〉은 김 위원장이 금강산에서 남쪽 시설물 철거를 지시했다고 보도했다. 이튿날인 10월24일 김계관 외무성 고문은, 김정은 위원장이 트럼프 대통령과의 각별한 관계에 대해 자기에게 언급했다며 “미국이 이번 연말을 지혜롭게 넘기는지 보고 싶다”라고 말했다. ‘2019년 내의 북·미 정상회담을 희망한다’는 외무성 입장을 대변한 발언이다. 즉, 김정은 위원장의 백두산 방문 이후에도 ‘외무성 주도의 북·미 협상’이라는 북측의 청사진에는 큰 변화가 없었다. 대북 소식통에 따르면, 당시(2019년 10월 말)까지만 해도 북·미 정상회담이 열릴 경우에 대비한 북측의 내부적 협상안은 이전과 비슷했다.

“미국은 대북 적대시 정책 먼저 철회하라”

북한의 대미(對美) 요구는 대체로 외무성 측 기존 구상의 틀 내에 있었다. 미국 측이 불가침 협정 같은 형식으로 체제 안전을 보장하면, 북측은 핵·미사일 시험을 동결하고 영변+α의 핵시설에 대한 해체 로드맵에 미국과 합의한다. 그 뒤에 미국은 대북 제재 완화에 착수한다.

한·미 당국은 북한의 안전보장 요구에 긍정적으로 반응한 것으로 보인다. 지난해 11월17일, 한·미 국방장관이 타이 방콕에서 회담을 갖고 11월 중 예정됐던 연합 공중훈련을 연기하겠다고 발표했다. 직후 트럼프 대통령은 트위터를 통해 ‘빨리 만날 것’을 김정은 위원장에게 요청했다. 지난해 11월18일 북한 김계관 외무성 고문이 다시 등장한다. 그는 이날 〈조선중앙통신〉 담화를 통해 “(미국 측의 반응을) 새로운 조·미 수뇌회담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했다”라며 환영의 뜻을 나타냈다. 이와 함께 그는 미묘한 발언을 꺼낸다. “미국이 진정으로 우리(북한)와 대화의 끈을 놓고 싶지 않다면 우리를 적으로 보는 적대시 정책을 철회할 결단을 내려야 한다.”

이 발언의 의미는, 이틀 뒤(지난해 11월20일), 최선희 외무성 부상이 모스크바에서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을 만난 뒤에 한 말로 명확해진다. “이제는 아마 ‘핵 문제와 관련한 논의는 앞으로 협상 테이블에서 내려지지 않았나’라는 게 제 생각. …미국과 협상하자면 대조선 적대시 정책을 다 철회해야 핵 문제를 다시 논의할 수 있을 것이다.”

지난해 10월 중순에서 11월 중순에 이르는 한 달 사이에 노선의 톤이 바뀐 것이다. 북한 권력 내부의 주체파가 외무성의 입장을 짓눌렀다고 볼 수 있다. 이 같은 변화의 핵심은, 북한 측이 미국 내의 정치적 위기(트럼프 대통령 탄핵 조사)를 기회로 활용해서 ‘핵보유 노선의 기정사실화’를 꾀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북측 논리에 따르면, ‘북한의 핵은 체제 수호를 위한 수단이다. 그러므로 북한이 핵을 포기하려면, 미국 역시 북한 체제를 위협하는 대북 적대시 정책을 포기해야 한다.’

그런데 이 논리에는 함정이 있다. 북측이 말하는 ‘대북 적대시 정책’이라는 것은 구체적이지 않으며 대단히 포괄적이다. 군사, 정치, 외교, 경제 등 모두에 걸쳐 있다. 그래서 미국이 구체적으로 취해야 할 조치를 선명하게 확정할 수 없다. ‘그게 안 되면 핵보유를 인정하라’는 것이 북측의 요구인 ‘적대시 정책 포기’의 요지다.

지난해 하노이 정상회담 전야와 비슷하다. 당시도 뮬러 특검 때문에 트럼프 대통령이 위기에 몰렸다고 본 북측이 대미 요구 수위를 높였다. 지난해 12월 북측이 ‘크리스마스 선물’을 거론하며 위기감을 조성한 것은, ‘궁지에 처한’ 트럼프 대통령이 협상에 응하는지 타진해보기 위함으로 보인다.

미국은 북한의 의도가 ‘핵보유의 기정사실화’에 있다는 점을 일찌감치 간파한 듯하다. 지난해 10월 말 방한한 랜드연구소의 브루스 베넷 박사는 “북한이 핵보유를 고집할 경우 미국의 핵잠수함이 한반도 근해를 지키게 될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워싱턴 사정에 밝은 소식통은 “미국이 이미 트럼프 대통령의 강력한 핵 억제 방침에 대해 중국과 러시아에 협조를 구하고 있다. 북한이 비핵화에 응하지 않는 방향으로 나아가게 된다면 미국은 시진핑 주석에게 그 책임을 묻게 될 것이다”라고 지적했다. 지난해 12월23일 CNN 방송 역시 북한 소식통을 인용해, 북한 지도부가 ICBM 발사 등으로 도발할 가능성보다는 “트럼프 대통령이 정치적으로 취약하다는 통찰하에 비핵화를 협상 테이블에서 제외하는 대미 강경 노선을 채택할 계획”이라고 보도한 바 있다.

기자명 남문희 기자 다른기사 보기 bulgot@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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