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명윤자신의 인력거에 앉아 손님을 기다리는 나디프 씨.

나디프 씨(45)는 내 또래다. 남들이 보면 내 할아버지라 해도 믿을 정도로 치아가 반절은 없는 사내지만 나보다 두 살 어리다. 과거 인도제국의 수도였던 콜카타에서 인력거를 몬다. 방글라데시 출신인 그는 1988년 2379명의 사망자를 낸 대홍수 때 인도로 무단 월경해 지금까지 살고 있다.

당시 콜카타에는 방글라데시에서 홍수가 발생할 때마다 난민이 몰려들었다. 매년 여름만 되면 아수라장이 펼쳐지길 반복했다. 한때 영국령 인도제국의 수도로, 런던을 쏙 빼닮은 도시라는 말을 듣던 콜카타는 그렇게 밀려오는 난민들이 자리 잡았다. ‘죽음의 도시.’ 인도 수상을 지낸 라지브 간디가 당시 콜카타를 바라보며 한 말이다.

콜카타가 속한 웨스트벵갈주와 방글라데시는 한때 벵갈주로 합쳐 있던 땅이었다. 그래서 콜카타 사람들은 방글라데시 사람들을 동포라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두 지역이 얼마나 가깝냐면, 방글라데시의 국가(國歌)를 만든 이가 인도인인 타고르다. 두 지역은 국적을 초월해 같은 언어를 사용하는 민족 혹은 동족이라는 인식이 더 강하다.

그가 처음으로 정치 집회에 참여한 이유

가진 거라고는 맨몸뚱이 하나인 나디프 씨가 할 수 있는 일은 몇 가지 없었다. 인력거는 온전히 사람이 끄는 교통수단이다. 나무로 만든 차체의 하중만 90㎏에, 두 사람이 타면 한 사람이 감당해야 하는 중량이 200㎏을 훌쩍 넘는다. 인도인들은 여기에 짐까지 싣는다. 인력거는 탑승자가 거만하게 뒤로 기대어 앉을수록 인력거꾼이 편하다. 하중이 뒤로 실리며 인력거가 들리기 때문이다. 인력거꾼에 대한 미안한 마음으로 엉거주춤 앉아 있으면 하중이 앞으로 쏠린다. 노동강도가 서너 배나 차이 난다. 그의 앞니가 빠진 이유가 그랬다. 인력거를 처음 탄 외국인이 미안한 나머지 몸을 이리저리 비틀다 하중이 쏠려 인력거 손잡이를 놓치면서, 그 손잡이가 그의 얼굴을 강타했다.

31년째 인도에서 보내는 삶. 대홍수 때 가족과 뿔뿔이 흩어진 그는 고향으로 사람을 보내 부모와 친척의 생사를 수소문했지만, 뾰족한 답을 듣지는 못했다. 그의 아내도 방글라데시 난민이다. 아이가 있는데, 부모가 둘 다 외국인 신분이라 아이는 학교를 다니지 못했다. 인력거가 비인간적 노동이라는 비판 때문에 정부에서 신규 면허를 내주지 않기 때문에 아이들은 인력거조차 몰지 못한다.

나디프 씨는 요즘 모디 정부가 개정한 시민권 수정안 때문에 걱정이 많다. 2014년 이전 인도에 입경한 난민에게 인도 시민권을 손쉽게 얻을 수 있게 하는 법이다. 한데 무슬림만 콕 집어 제외한 탓에 그의 가족은 혜택을 받지 못한다. 그는 인도에 머무르는 무슬림 난민 수백만 명이 미얀마의 로힝야족처럼 언젠가 추방되지 않을까 불안하다. “30년이나 산 콜카타가 내 고향이 아니야?”라고 반문하는 그에게 해줄 말이 없었다.

모디 정부가 들어선 후 무슬림에 대한 차별은 점점 더 심해지고 있다. 나디프는 최근 생전 처음 시민권 수정안에 반대하는 정치 집회에 참여했다. 인력거꾼이 파업할 때도 방글라데시 출신인지라 혹여 불이익을 당할까 봐 외면하던 그였다. “그런데 거기에도 내 자리는 없어. 모두 번듯하게 차려입은 나리들이던걸. 찢어진 러닝셔츠를 입은 나는 거기에도 낄 수가 없더라.”

“요즘 어디 사니? 주소 불러. 한국에서 러닝셔츠나 보내줄게.” 내가 할 수 있는 말은 그뿐이었다. 조만간 콜카타 취재 일정을 만들어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얼굴이라도 봐야 마음이 편할 것 같다.

기자명 환타 (여행작가·<환타지 없는 여행> 저자)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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