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합뉴스1989년 6월17일 당시 김기춘 검찰총장(가운데)이 기자들과 일문일답을 하고 있다.

1967년 10월17일 밤 부산 보수동 근처를 지나던 택시가 커다란 상자를 든 청년을 태웠어. 뚜렷한 목적지 없이 바닷가로 가자고 주문하는 청년을 밀수꾼이라 여긴 택시 기사는 청년을 내려준 뒤 바로 파출소에 신고했어. 신고를 받은 순경이 출동해 청년을 검문했는데, 순경이 상자 속 물건에 신경을 쓰는 사이 범인은 달아나버렸지. 상자 안 내용물을 확인한 경찰은 소스라치고 말았어. 안에 든 것은 소년의 시신이었거든. 과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가다가 사라진 열한 살짜리 소년 김근하였어.

사건 2주일 뒤 경찰은 범인을 체포해 자백 일체를 받아냈다고 발표해. 범인은 소년의 가정교사인 스무 살의 전 아무개였어. 이상한 일이 벌어졌단다. 범행 추정 시간에 전씨는 다른 아이들을 가르치고 있었다는 사실이 밝혀진 거야. 진상은 간단했지. 청년이 경찰의 고문을 견디다 못해 허위 자백한 거였으니까. 경찰이 전씨를 끌고 투숙하며 조사할 때 여관 종업원들까지도 비명 소리를 듣거나 고문하는 모습을 보았다고 증언했어.

청년은 만신창이가 되어 풀려났고, 청년의 가족들은 수사관들을 고소했단다. 사건은 부산지검의 어느 검사에게 배당되었어. 이 검사는 경찰들을 소환해 조사하겠다고 기세를 드높였지만 수사는 곧 흐지부지되고 말아. 경찰이 합의금 25만원으로 민형사상 책임을 묻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아냈기 때문이야. 고소인이 고소를 취하했다고 하지만 담당 검사는 생사람을 고문해 살인범으로 만든 경찰관을 ‘합의했다’는 명목으로 그냥 봐준 셈이 됐지. 당시 법이 어땠는지는 모르지만 그게 ‘합의’로 넘어갈 일이었을까. 이 물렁한 검사의 이름은 김기춘이었어.

김기춘. 아마 네게도 그 이름은 낯설지 않을 거야. ‘기춘대원군’이라 불리며 지난 박근혜 정권 때 역대 최고령 대통령비서실장으로 권력을 휘둘렀던 바로 그 사람이야. 알다시피 그는 전혀 물렁한 사람이 아니었어. 고문 경찰관에게는 관대했던 그이지만 독재정권에 맞서 민주주의를 외친 이들을 비롯해 ‘공안사범’들에게는 가혹하기 그지없었고, 박정희 대통령한테 ‘똘똘이’라는 별명까지 얻을 정도의 활약을 보였지. 대학 졸업 전에 사법고시를 패스한 좋은 머리와 정의를 실현하라고 배운 법을 그는 결코 바람직하지 못한 방향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던 거야.

1972년 10월17일 박정희 대통령은 별안간 국회 해산과 헌정 중단을 골자로 한 대통령 특별선언을 발표하며 계엄령을 내렸어. 이른바 ‘10월 유신’이었지. 대통령 특별선언에 따르면 ‘비상 국무회의는 1972년 10월27일까지 조국의 평화통일을 지향하는 헌법개정안을 공고’한다고 돼 있었어. “대통령은 국회의원 3분의 1과 모든 법관을 임명하고, 긴급조치권과 국회해산권을 가지며, 임기 6년에 횟수의 제한 없이 연임”이 가능한 데다 ‘통일주체국민회의 대의원’들을 모아놓고 간접선거로 대통령을 뽑도록 한, 어처구니없는 유신헌법은 유신 선포 전에 이미 만들어져 있었다는 얘기지.

김기춘 사전에 정의와 도덕은 없나

유신헌법을 만든 사람 중 한 명으로 꼽히는 서울대 한태연 교수는 2001년 한국헌법학회 학술대회에서 재미있는 증언을 했단다. “유신 이튿날 아침 청와대에서 ‘들어오라’는 연락을 받고 갔더니 박 대통령이 메모를 꺼내놓고는 ‘이건 법무부에서 작성한 것인데, 내용은 헌법 제정에 대한 내 구상이다’라면서 ‘법무부에 가서 작업을 도와달라’고 했다.” 법무부에 가긴 했는데 정작 한태연은 할 일이 없었다는구나. “신직수 (법무부) 장관과 김기춘 과장이 주동이 돼 안을 모두 만든 상태였다. 장관이 골격은 손댈 수 없다고 해서 자구 수정 정도만 했다.” 즉 학자들은 구색 맞추기였을 뿐 검사 출신 법무부 관리들이 세팅을 끝내놓은 것이지. 한태연은 덧붙인다. “욕은 우리가 다 먹고 만든 사람은 다 빠져버렸다(〈오마이뉴스〉 2001년 12월9일).”

김기춘 본인은 그 사실을 부인한다. “나는 당시 법무실 평검사였는데 장관이 여러 검사들에게 자료 조사나 스터디를 맡겼을 뿐”이라는 것이지. 어느 쪽이 진실인지 아빠가 가려낼 수는 없겠지만 ‘김똘똘’ 검사보다는 유신헌법의 정당성을 강변하던 한태연의 기억에 손을 들어주고 싶구나. “TV에 나와 (유신헌법에 대해) 명해설을 하기도 해 이름이 났고(〈경향신문〉 1981년 4월27일)”, 고속 승진을 거쳐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는 중앙정보부 대공수사국 부장을 최연소(만 34세10개월)로 맡았던 사람이 바로 김똘똘 검사였으니까.

5공화국 때는 물을 좀 먹었지만 6공화국 이후 김기춘은 다시금 날개를 달았어. 1988~1990년 검찰총장을 역임한다. ‘정의로운 검찰’을 내걸었던 그는 퇴임 인터뷰에서 앞으로 검찰이 힘을 기울여야 할 부분이 무엇인가 하는 질문에 이렇게 답하고 있더구나. “절대적으로 더 높은 도덕성이 필요하다.” 30년 경력의 전직 검찰총장은 1991년 법무부 장관으로 영전해 여전히 ‘정의와 도덕’을 설파했지.

1992년 14대 대통령 선거 이틀 전 전직 법무부 장관 김기춘은 부산의 한 복국집에 부산지검장, 부산지방경찰청장, 기무부대장, 안기부 지부장, 교육감 등을 모아놓고 지역감정을 부추겨 여당 후보를 밀어주자는 추악한 모의를 주모한다. 그는 이렇게 말하며 좌중을 압도했지. “부산·경남 사람들 이번에 김대중이 정주영이 어쩌니 하면 영도다리에서 칵 빠져죽자.”

입만 벌리면 정의와 도덕을 내세우던 사람. 자칭 ‘미스터 법질서’라고 우쭐대던, 몇 달 전까지만 해도 법무부 장관이었던 김기춘이었어. 그러던 그가 법이고 나발이고 현직 공무원들을 불러 모아 불법 선거운동을 선동했을 뿐 아니라 “노골적으로 해도 괜찮아. 검찰에서도 양해할 거야”라며 아예 불법을 지시한 거야. 대관절 그는 ‘정의와 도덕’을 평생 무슨 뜻으로 사용해왔던 걸까. 아빠는 현대사 연구가 한홍구 교수가 김기춘을 두고 한 표현에 백 번 천 번 공감해. “온갖 비적이 들끓던 만주에서 가장 무서운 비적은 법으로 무장한 법비(法匪)였다. 김기춘이야말로 법비 중의 법비였다(〈한겨레〉 2013년 10월27일).”

비(匪)는 곧 도둑이다. 법비란 법을 무기로 도둑질하는 놈이라는 뜻이지. 50여 년 전 김근하군 유괴 살인사건 당시 경찰은 고문을 통해 엉뚱한 사람을 살인범으로 만들어놓고도 모자라 답보 상태의 수사를 변명하며 이런 말을 했어. “검찰의 고문 수사 때문에 경찰 수사관들이 (의욕을 잃고) 손을 쓰지 않기 때문이다(〈동아일보〉 1967년 11월14일).” 이들 역시 사악한 법비들이었지. 당시 경찰의 범죄를 어물쩍 넘어간 검사였으며 전직 법무부 장관까지 지낸 김기춘은 불법 선거운동으로 기소된 주제에 “선거법이 표현의 자유, 참정권 등을 제한하고 있다”라며 위헌 제청을 냈고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을 받아내 처벌을 피해갔어. 이쯤 되면 법비의 수호신으로 등극할 듯도 하다.

법이 보호해야 할 사람의 인권을 법으로 짓밟고 법을 모독하는 법을 제 손으로 만들었던 강도, 법의 칼을 쳐들고서 법을 살해하던 살법(殺法)의 죄인 김기춘은 국정농단과 블랙리스트 작성 등의 책임을 지고 나이 여든에 인과응보를 경험하고 있다. 그래도 그의 ‘인(因)’에 비해 ‘보(報)’는 태부족이야. 이번 글에서 다 말하지 못한 그의 여죄는 우리 현대사에 여전히 넘쳐나고 있으니까.

기자명 김형민(SBS Biz PD)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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