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학에서 12학기 동안 글쓰기를 가르쳤다. 열정 있는 학생들과 함께한 시간 내내 내 가슴은 첫사랑을 다시 만난 듯 설렜다. 35년 가까이 글을 써왔지만 정작 ‘가르치는 데’ 눈뜨기까지는 3년 넘게 걸렸다. 그전에는 의욕만 앞서 학생들에게 억지로 떠먹이려고 했을 뿐이다. 나 자신과 학생의 한계를 깨달아 가르치고 배우는 시간이 즐겁고 자연스러워지기까지 그렇게나 오랜 시간이 걸릴 줄은 몰랐다.

유감스럽게도 행복한 경험만 한 것은 아니다. 갈수록 좋아져야 마땅하건만 가르치고 배우는 환경이 날로 척박해졌다. 초기에 전임과 강사들은 학급당 수강 신청자를 20명 안쪽으로만 받기로 굳게 약속했다. 숫자가 그 이상으로 불면 사실상 개별 지도가 불가능하기 때문이었다. 그 다짐은 겨우 두 학기 정도만 유효했을까, 교수들은 학교 당국의 압력에 맥없이 굴복했다. 강사들이야 더 말해 무엇하겠는가. 학생 수가 지금은 예사로 30명을 넘긴다. 사소하게는 강사실에서 복사기가 사라졌다. 학생들에게 자료를 나눠주려면 가뜩이나 가난한 강사가 자기 돈 내고 줄 서서 학교 앞 문구점에서 복사를 해야 한다.

ⓒ한성원

여덟 번째 학기 강의를 마치자 행정실에서 연락이 왔다. 연속 8학기를 강의한 강사는 무조건 한 학기를 쉬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비정규직보호법을 피해 가기 위한 편법이었다. 학생들에게 기득권의 횡포에 맞서는 게 지식인의 임무라고 가르쳐온 주제가 아니었던가. 마음고생을 하면서도 아무 말 않고 한 학기를 쉰 다음 다시 가르치기 시작했다. 학생들과 만나는 시간이 그만큼 소중했기 때문이다. 다음에는 4학기를 마치자 연락이 왔다. 또 한 학기를 쉬어야 한다는 것이었다. 지난번에는 8학기였는데 이번에는 왜 4학기냐고 물었지만 명확한 답변을 듣지 못했다. 그냥 원칙이 그렇다는 설명뿐이었다. 하기야 단순히 연락 업무만 맡은 실무 직원과 실랑이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그 길로 강의를 접고 말았다.

생각할수록 기막힌 일이다. 햇수로 무려 7년간이나 강의를 했는데 그만둘 때 꽃다발은커녕 누구 한 사람 수고했다고 말해주는 이가 없었다. 과연 나 말고 오랫동안 내가 학교에서 가르쳤다는 사실을 아는 이가 있는지조차 의심스러웠다. 그만두자마자 그 길로 도서관 출입과 도서 대출도 막혀버렸다. 마치 카프카의 소설(〈성〉)에 등장하는 성과 마주한 기분이었다.

모든 인간적 가치는 경비 절감이라는 학교의 단호한 목표 앞에서 무기력하기 이를 데 없었다. 공자님이 ‘인생삼락’이라고까지 상찬했던 가르치는 일이 학교와 선생 간의 싸늘한 용역 거래로 완벽하게 전락했다. 그 오랜 기간 밤잠을 설쳐가며 잡지 마감을 하면서 쌓은 경험, 학생들과 부대끼며 간신히 터득한 가르치는 요령 따위는 비정규직을 절대 정규직으로 전환해주지 않겠다는 학교 당국의 의지 앞에서 초라했다. 그동안 학부모와 정부가 내게 투자한 돈은 학교 당국의 장부에는 기재될 공간이 없으므로 무의미했다. 혼자 이런저런 가치 부여를 하며 발버둥 쳤을 뿐 사실 처음부터 나(강사)는 교육과 학교로부터 완벽하게 소외돼 있었다는 걸 비로소 깨달았다.

올해 강사법 시행을 앞두고 대학은 지금 시끄럽기 이를 데 없다. 강사들에게 법이 정한 최소한의 대우(1년 이상 임용 보장, 퇴직금 지급 등등)를 해주기 싫어 강의를 대폭 축소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시간강사가 사실상 해고당했으며 학생은 등록금을 내고도 수강신청을 하지 못하는 어처구니없는 상황에 직면했다. 가뜩이나 강의 부담이 크고 잡무에 시달리던 젊은 전임교수들의 어깨는 더욱 무거워졌다. 내가 알던 전임교수 몇몇은 근래 삶의 질이 너무 떨어진다며 사직서를 썼다. 아까운 인재들이다. 돈 앞에서는 모든 게 퇴색한다. 이런 꼴을 보기 전에 일찍 그만두기를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학교는 교육으로부터 소외되었다.

자본주의 생존 방식을 주입·강요하는 학교

미국 뉴욕 대학에서 40년 넘게 변증법적 방법론과 사회주의 이론을 가르쳐온 버텔 올먼 교수에 따르면 학교야말로 자본주의의 최전선이다. 자본주의 생존 방식을 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주입하고 강요하는 곳이다. 과제를 해결할 때 반드시 지켜야 하는 시간과 형식을 규정함으로써 앞으로 겪게 될 엄격한 노동 규율에 익숙해진다. 시험공부를 하면서 습득하는 자제력은 직장에서 무례, 인신공격, 권태를 참고 견디게 한다. 이의를 허용하지 않는 문제를 풀며 미래의 고용주가 내릴 명령을 무비판적으로 받아들이는 습관을 기른다.

올먼 교수의 예언은 불길하기 이를 데 없다. 이런 전형적인 자본주의 세례를 받은 학생 중 일부는 언젠가 자살하거나 마약·알코올 중독자, 혹은 부랑자나 죄수가 될 것이다. 그보다 운이 좋은 또 다른 일부는 그저 직장이나 가정을 잃거나, 우울증에 거듭 시달리다가 배우자나 자녀에게 분노와 좌절감을 쏟아낼 것이다. 그가 말하고 싶은 요지는 이런 거다. ‘하지만 여러분에게는 잘못이 없다. 신의 뜻이거나 불운 탓도 아니다. 게임이 조작돼 있을 뿐이다. 여러분은 평등한 기회는 고사하고 해볼 만한 기회조차 받은 적이 없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예전에는 그가 과장한다고 생각했지만 요즘에는 그렇지만도 않다고 본다. 비정규직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었다는 법이 번번이 비정규직을 고통 속에 빠뜨린다. 사기꾼이나 바보가 대통령이 됐을 때는 말할 것도 없거니와 민주화 투사나 인권 변호사가 대통령이 되어도 변하는 것이 없다. 대학의 이사회는 입법 취지를 정면으로 거슬러 서슴없이 비정규직 강사와 직원을 해고하고도 무사하다. 내가 보기에 이는 공공에 대한 정면 도전이자 반사회적 행위이다. ‘게임이 조작되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일이 벌어질 수 있을까. 만약 우리 사회에서 변혁을 요구하는 불길이 다시 타오르기 시작한다면 발화점은 대학가가 될 것이다.

전 세계적으로 버텔 올먼 교수 같은 사회주의자들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는 이가 점점 늘고 있다. 1991년 소련 붕괴 이후 실패한 공산주의 국가의 헌법을 장식하는 죽은 단어 정도로만 여겨졌던 사회주의 혹은 사회주의자라는 단어가 유럽과 미국의 언론에 다시 빈번하게 등장하기 시작했다. 많은 이들이 자본주의가 가진 근본 모순이 사람들을 고통스럽게 만든다고 자각했다.

사회주의자임을 자처하는 지도자들이 주요 국가에서 과거 어느 때보다 ‘심각하게’ 대권에 접근해가고 있다. 소련 몰락 이후 ‘제3의 길’로 전향했던 영국의 토니 블레어, 미국의 빌 클린턴, 독일의 게르하르트 슈뢰더 등과 질적으로 완전히 다른 부류다. 공공지출을 축소하고 시장친화적이었던 제3의 길 추종자들보다 훨씬 정통 좌파에 가깝다.

대표 주자는 미국 버몬트 주 민주당 상원의원인 올해 77세의 버니 샌더스이다. 그는 지난번 대선에 이어 2020년에 다시 도전하겠다고 지난 2월 선언했다. 조직원 5만6000명을 거느린 미국 민주사회주의자(DSA)는 샌더스를 2020년 유일한 대통령 후보로 지지한다고 밝혔다. 2016년 대통령 예비선거에서 18~29세 미국인 유권자는 힐러리 클린턴이나 도널드 트럼프 후보보다 그에게 더 많은 표를 던졌다. 최근 갤럽 조사에 따르면 그 나이 또래 미국 유권자 51%가 사회주의에 호감을 갖고 있다.

DSA에는 떠오르는 스타 알렉산드리아 오카시오 코르테스 하원의원도 있다. 1989년 10월14일생으로 만 30세가 채 되지 않은 그녀는 2016년 버니 샌더스 캠프에 참여해 정계에 입문했다. 그녀는 지난해 10선의 현역 의원인 조 크롤리를 당내 경선에서 꺾은 뒤 중간선거에서 당선해 최연소 여성 하원의원이 되었다. 그녀는 버니 샌더스가 고령이어서 점점 좌경화돼가는 민주당 예비 선거판에서 존재감이 점점 뚜렷해진다. 좌익에는 열광의 대상이고 우익에는 매혹적인 공포이다.

민주당의 또 다른 인기 예비주자 중 한 명인 엘리자베스 워런 역시 기업 이사회 멤버 40%를 종업원이 선출하게 해야 한다는 공약을 내걸 정도로 사회주의 편향이다.

침체 일로를 걷던 영국노동당도 2017년 선거를 기점으로 희망가를 부르기 시작했다. 강경파 제러미 코빈이 다우닝가 10번지의 열쇠를 넘겨받을 가능성이 커졌다. 영국노동당은 주류 정당 가운데 가장 급진적인 경제민주화 계획을 세우고 있다. 집권하면 종업원 250명 이하의 기업은 무조건 지분의 10%를 노동자 대표가 관리하는 펀드로 전환한다는 공약을 내걸었다. 직원은 그 펀드에서 배당금을 받는다.

프랑스에는 극좌로 자처하는 정치인 장뤼크 멜랑숑이 있다. 주 35시간 노동과 의료비 100% 상환을 기치로 내건 그는 2017년 대선 1차 투표에서 4위에 그쳐 결선투표에 진출하지 못했다. 그러나 지지자가 적지 않았다. 그는 마크롱 후보 득표의 80%에 육박하는 표를 긁어모았다. 그가 쓴 책 〈인간이 먼저다〉는 프랑스에서 30만 부나 팔렸고 우리나라에서도 인기를 끌었다.

의료와 교육비의 무상화, 부유세 신설은 기본이고 기초연금, 베이비 본드, 노동자로의 기업 소유 이전에서부터 그린 뉴딜에 이르기까지 전 세계 사회주의자들이 내건 공약은 광범위하고 파격적이다. 그들의 주장 가운데는 황당한 것도 많지만 이들이 인기를 끌고 있다는 것은 우익의 대실패를 의미한다. 빈부격차를 억누르는 데에도, 기후변화를 막는 데에도 한계를 보였다는 걸 뜻한다. 무엇보다 트럼프를 미국 대통령으로 당선시키고야 말지 않았던가.

우리 사회도 분위기는 성숙했다고 본다. 젊은이와 약자의 분노가 쌓이고 있다. 박근혜 같은 지도자를 대통령으로 뽑았던 이력도 있지 않은가. 우리 사회에서도 젊고 매력적인 사회주의자가 출현하기를, 왼쪽 날개가 힘차게 돋아나 무너진 균형을 잡기를 고대한다.

참고한 활자:〈인간이 먼저다〉(위즈덤하우스), 〈마르크스와 함께 A학점을〉(모멘토), 〈이코노미스트〉 〈인디펜던트〉 〈가디언〉

기자명 문정우 기자 다른기사 보기 woo@sisain.co.kr
저작권자 © 시사IN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 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