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00일은 어쩌면 거대한 7시간이었다. 명백한 참사 앞에서 책임자들은 눈을 감고 고개를 돌렸다. 배는 왜 기울었는지, 아이들은 왜 구조되지 못했는지를 알아낼 수 있는 골든타임이 속절없이 흘렀다. “가만히 있으라”는 명령을 어긴 유가족과 시민들은 극렬 시위꾼 혹은 종북 세력으로 매도당했다. 진실은 거짓과 은폐 속에서 허우적댔다. 2014년 4월16일 이후 1000일은 한국 사회가 세월호를 차근차근 기억 속에서 몰아내는 시간이었다.

그 시간 속에서 단원고 2학년1반 문지성양의 아버지 문종택씨(55·위 사진)와 같은 세월호 유가족들의 시계는 멈춰 있었다. 내 아이가 죽은 이유를 알기 위해 엄마 아빠들은 영정 사진을 들고 행진을, 단식을, 삭발을, 노숙을 했다. 문씨는 세월호 유가족 방송 ‘416 TV’의 카메라를 들고 그 모습을 담았다. 그의 렌즈 속에 비친 1000일을 딸에게 들려주는 아버지의 목소리로 정리했다. 2017년 1월9일은 세월호 희생자 304명과 함께 우리 사회의 정의가 침몰한 지 1000일을 맞는 날이다.

ⓒ시사IN 이명익단원고 2학년1반 문지성양의 아버지 문종택씨가 세월호 유가족 방송 ‘416 TV’ 카메라를 들고 경기도 안산시 화랑유원지 내 세월호 합동분향소 앞에 섰다.

2014년 봄.
나무에는 꽃이 피었지만 땅에는 아직 낙엽이 많았다. 조그마한 벌레라도 찾는 양 체육관 주변 검불 더미들을 헤쳤다. 네가 쭈그리고 앉아 울고 있지는 않을까, 자동차들 사이사이, 건물 구석을 다 뒤졌다. 남녀 화장실 구분 없이 다 들어가 문을 열어젖혔다.

지성아, 그날 넌 생존자 명단에 들어 있었다. 4월16일이 다 지나도록 해경도, 해양수산부도, 언론사도 제대로 된 생존·실종자 명단을 갖고 있지 않았다. 실제 네 이름을 실종자로 옮기는 일을 아빠가 했다. 네가 실종자여야 너를 찾으니까. KBS에 전화해서 “우리 애가 안 보이는데 생존자 명단에 올랐다. 실종자 명단으로 옮겨달라” 했더니 그건 해경에서 결정하니 해경에 전화해보라더구나. 전화번호를 가르쳐달라고 했더니 모른대. 한참을 사정해 겨우 바꿔놔도 다음 날 방송국 당직이 바뀌면 원래대로 돌아왔다. 네 이름은 그렇게 사흘째 실종자와 생존자 명단을 오갔다.

나중에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런 혼선에 청와대도 적잖이 당황했더구나. 4월16일 오후 2시24분, 해경과 통화하던 청와대 관계자는 실종자 수가 애초 보고와 어긋나자 이렇게 말했지. “어이쿠, 이거 큰일이네. VIP에게 다 보고했는데.”

4월17일, 박근혜 대통령이 진도 실내체육관에 나타났다. 대통령은 울부짖는 실종자 가족들에게 최선을 다해 아이들을 살려내겠다고 약속했다. 아빠는 손을 들고 대통령에게 물었다. “그렇게 추상적으로 말고, 바다에서 잠수부들이 실제 구조 작업하는 모습을 눈으로 확인하시고 주무시기 전까지 제게 전화를 줄 수 있겠습니까?” 대통령은 그러겠노라 대답하며 아빠 핸드폰 번호를 받아갔다. 체육관에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그날 밤 10시께, ‘발신자 없음’ 번호로 전화가 걸려왔다. 대통령이었다. 제발 너를 살려달라고, 2학년1반 문지성을 찾아달라고 읍소하고 싶었다. 하지만 꾹 참고 “최정예 요원을 투입해 단 한 사람만이라도 구해내면 국민들이 얼마나 좋아하겠나” 이런 이야기만 하고 전화를 끊었다. 다음 날 신문과 방송은 대통령이 약속대로 세월호 학부모에게 전화를 걸었다는 청와대발 미담 기사로 도배됐다. 홍보 기사의 내용을 채우기 위해 내게 전화를 건 민경욱 당시 청와대 대변인에게 아빠는 “언젠가 내가 또 대통령을 찾을 일이 있을 것 같다. 그때 딱 한 번만 더 연결해주실 수 있겠느냐?”라고 물었다. 대변인은 알겠다고 대답했다. 거짓말이었다. 이후 아빠는 숱한 날 대통령을 찾아 이야기를 전하려 했지만 성사되지 못했다.

너를 찾은 건 4월30일이다. 배 밖에서 발견된 첫 번째 실종자였지. 밀물과 썰물에 쓸려 다니다 바다 위 닻줄에 걸린 너는 얼굴이 없었다. 너를 건진 어부를 포함해 아이들을 구해준 섬 주민들에게 인사를 하러 인근 섬을 한 바퀴 돌았다. 그때 만난 선주들은 말했다. “해경 ×××, 죽일 놈의 ××들. 저 ××들이 안 구했어.”

ⓒ시사IN 이명익

5월19일 박 대통령은 대국민담화에서 해경 해체를 선언했다. 눈물도 흘렸지. 아빠와 네 친구의 엄마 아빠들은 그 눈물을 믿지 않았다. 우리는 일찌감치 싸늘한 정부를 느꼈거든. 사고 닷새째인 4월20일 실종자 가족들이 더딘 수색과 오락가락하는 정부 발표에 화가 나서 “청와대까지 걸어가자”며 나섰을 때 진도대교에 얼마나 많은 경찰이 모여 막아서던지. “연간 교통사고로 죽는 사람 수를 생각하면 (세월호 사망자가) 그리 많은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 KBS 간부 말에 화가 나 서울 여의도에 모였을 때도 참사가 난 지 갓 한 달이 지나지 않은 5월8일이었다(위 사진). 알고 보니 4월30일 청와대 홍보수석이던 이정현 새누리당 의원이 KBS 보도국장에게 전화해 “하필이면 또 세상에 (대통령이) KBS를 오늘 봤네”라며 세월호 보도 수정·삭제를 지시했더구나. 대통령이 카메라 앞에서 눈물을 흘리던 날은 경찰이 우리 유가족 중 일부를 미행하다 들통난 날이기도 하다.

ⓒ시사IN 신선영

2014년 여름
은 정말 더웠다. 여의도 국회 본청 앞 대리석 바닥이 밤에도 보일러를 틀어놓은 것처럼 뜨듯했다. 아빠가 어떻게 아느냐고? 그때 거기 누워 있었거든. 세월호 참사 유가족들은 7월12일부터 국회에서 노숙 농성에 들어갔다(위 사진). 그건 여러 행동 중 하나였다. 삼보일배, 단식, 서명운동, 도보행진…. 요구는 한 가지. 세월호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법을 제정해달라는 거였다.

정치권과 언론은 우리를 주목하지 않았다. 세간은 유병언 잡기로 떠들썩했고 지방선거가 치러지는 동안 정치인들은 안전하고 깨끗한 사회를 약속했지만 재발 방지를 위한 우리의 요구에는 정작 귀를 기울이지 않았다. 여당이 예상보다 선전한 6·4 지방선거가 끝나자마자 박 대통령은 국무총리 후보로 문창극씨를 임명했다가 친일 논란으로 낙마하자 세월호 참사 이후 사의를 표명했던 정홍원 총리를 유임시켰다. 언론에서는 ‘박 대통령이 세월호 딛고 자신감 있는 행보에 나섰다’라고 분석했다. 뒷날 알려진 청와대 작성 문건에 따르면 당시 청와대는 세월호 참사를 ‘여객선 사고 악재’라 불렀더구나. 이 ‘여객선 사고’ 진상규명 요구가 ‘대정부 투쟁 재점화 불씨로 작용할 소지’가 있다며 문건은 ‘보수 언론·단체들의 적극적인 맞대응 집회·여론전 전개 병행’을 주문했다.

나는 그것도 모르고 전국을 돌며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 1000만인 서명운동’에 나섰다. 국민 1000만명의 서명을 들고 가면 대통령을 한번 만날 수 있을 것만 같았거든. 많은 국민들이 서명해줬다. 아이 손잡은 어머니, 휠체어 탄 장애인, 눈물을 뚝뚝 떨어뜨리며 이름을 쓰는 젊은 친구들…. 그러던 어느 날 대구의 한 백화점 인근 지하차도에서였다. “아유 지겨워, 이거 좀 치워.” 한 할머니가 서명대를 툭툭 치며 시비를 걸었다. 처음이었다. 하지만 곧 익숙해졌지. 이후 그런 일을 숱하게 당했거든. 내공이 쌓인 나와 네 친구 엄마 아빠들은 그래서 광화문광장에서 단식을 이어갈 때 눈앞에서 일베 회원들이 피자를 먹거나 보수 단체 회원들이 전을 부쳐도(아래 사진) 그리 당황하지 않았다.


2014년 가을과 겨울
. 우리는 계속 거리에 있었다. 세월호 참사 진상규명을 위한 특별조사위원회에 수사권과 기소권을 부여한 특별법을 제정하기 위해 유가족들은 국회를 설득하고 청와대를 압박했다. 특별법은 바람대로 되지 않았다. 특조위에 수사권과 기소권이 부여되지 않은 채 11월7일 특별법(4·16세월호참사 진상규명 및 안전사회 건설 등을 위한 특별법)이 통과됐다. 그래도 특조위가 독립적인 기구로서 진실을 밝혀낼 수 있을 것이라고 아빠는 한 가닥 기대를 걸었다.

하지만 기대는 금방 꺾였다. 특별법에 따라 진상규명 특조위를 구성할 준비를 하던 중이었다. 2015년 1월16일 김재원 새누리당 원내수석부대표가 세월호 특조위를 ‘세금 도둑’이라 칭했다. 예산과 조직 규모가 지나치다는 것이다. ‘세금 도둑’이라는 활자가 이튿날 보수 신문 지면을 뒤덮었다. 여당은 특조위 위원으로 과거 공안검사, 일베의 세월호 비난 글을 퍼 나른 변호사 등을 지명했다. 그때 여당 추천 몫으로 함께 특조위에 들어간 사람 중에는 훗날 박 대통령이 ‘특검·탄핵 판결 대비용’ 민정수석으로 임명한 조대환 변호사도 있었다.

진상규명이 제대로 시작되지도 않았는데 한국 사회는 이제 세월호를 ‘마무리’하고 ‘종결’하려고만 하더라. 2014년 10월6일 검찰이 세월호 참사 수사 최종 결과를 발표했다. 무리한 개조와 과적, 조타 미숙 등으로 배가 침몰했다는 발표 내용은 세간의 의혹을 별로 씻어내지 못했다. 11월11일에는 정부가 세월호 실종자 수색 종료를 공식 선언했다. 그날 이후 정부가 찾기를 포기한 네 친구 조은화·허다윤·남현철·박영인과 너희 학교 양승진·고창석 선생님, 권재근씨(52)와 권혁규군(6), 이영숙씨(51) 등 9명은 아직 바다 속에 있다.

2015년 봄. 네가 떠난 지 1년이 흘렀다. 진도체육관에서 한뎃잠을 자던 아빠와 다른 유가족들은 1년이 흘러도 여전히 풍찬노숙을 하고 있었다. 광화문광장, 청운동, 진도 팽목항 등지에서 우리는 단식을 하고 행진을 하다 경찰 차벽에 막히고 다치고 연행됐다.

그때 우리가 요구한 건 ‘세월호참사 진상규명 특별법 시행령안 폐기’와 ‘조속한 세월호 인양’이었다. 지난해 수사권과 기소권을 양보하고 그나마 특조위의 독립성 하나만 믿고 특별법을 통과시켰는데, 정부가 한참 시간을 끌다 내민 시행령안은 특조위의 독립성마저 완전히 무력화하는 법안이었다. 정부의 참사 대응을 조사해야 할 특조위 활동을 정부 파견 공무원이 통제하도록 설계한 식이었다.

ⓒ시사IN 이명익

이에 반발해 한창 싸우던 어느 날 정부는 뜬금없이 언론에 세월호 유가족 배·보상금 액수를 발표했다. 온 방송과 신문이 아빠가 몇억원을 받게 될지 계산하고 있더라. 2015년 4월2일 아빠를 포함한 유가족 52명은 서울 광화문광장 세종대왕 동상 앞에서 삭발을 했다(위 사진). 돈을 먼저 주지 말라고. 보상 절차를 중단하고, 진상규명과 선체 인양을 먼저 해달라며 말이다.

2015년 여름부터 겨울까지는 도무지 언제 캡사이신을 맞고 어디서 물대포에 젖었는지 정확히 기억나지 않을 정도로, 아빠는 거리에서 계속 싸웠다. 6월19일 경찰이 세월호 추모 불법집회 주도 혐의로 416연대를 압수수색했을 때 아빠는 몸으로 경찰을 막아섰다. ‘이대로라면 곧 가족협의회도 당하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7월17일 우리를 돕던 박래군 4·16연대 상임운영위원이 집시법 위반 등으로 구속됐다. 아마 2016년 10월 박근혜·최순실 국정 농단 사태가 밝혀지지 않았다면 지금쯤 아빠나 다른 세월호 유가족들도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우리가 그토록 반대하던 특별법 시행령안은 기어코 국무회의를 통과했다(5월6일). 그해 가을과 겨울, 아빠는 ‘시행령 폐지’에서 ‘시행령 개정’으로 고친 피켓을 들고 특별법 시행 후 6개월이 훌쩍 지나서야 막 시작된 특조위 활동을 지켜볼 수밖에 없었다. 이후에도 정부는 예산 배정을 미루거나 예산안에 트집을 잡는 방식 등으로 계속 특조위 활동을 방해했다. 당시 드러난 해양수산부 작성 문건에 따르면, 정부는 특히 특조위의 ‘BH(청와대) 조사’에 민감했다.

우여곡절 끝에 열린 세월호 특조위 첫 청문회(12월14일)에서 아빠는 가슴을 쳤다. 여당 추천 특조위원은 전원 불참하고 KBS를 비롯한 지상파 3사와 뉴스 전문 채널 2개사, 종합편성 채널 4개사는 청문회를 중계하지 않았다. 증인으로 참석한 당시 구조 책임자들은 “모른다”와 “기억나지 않는다”를 반복했다. 딱 한 사람, 80일간 수색 작업에 참여해 아이들을 뭍으로 끌어올린 민간 잠수부 한 사람만이 “실종자를 끝까지 다 수습해주지 못해서 미안하다”라고 사과했다.

2016년 봄부터 가을까지 아빠는 지쳐갔다. 세월호 진상규명의 유일한 통로였던 특조위 조사 활동이 6월30일자로 종료됐다. 예산을 배정받고 제대로 활동한 지 1년도 되지 않은 시점이었다. 특별법에서 보장한 1년6개월을 채우지 못했는데도 정부는 종료를 강행했다. 6월17일에는 네 친구들 시신을 많이 수습해준 민간 잠수부 김관홍씨가 세상을 떠났다. 6월25일 경찰은 광화문광장에서 진상규명 활동 재개와 특별법 개정을 촉구하는 세월호 가족들을 연행하고 노란 리본과 천막을 빼앗았다.

ⓒ시사IN 신선영

네가 다니던 단원고에선 너와 네 친구들을 제적 처리하고 너희들이 공부하던 교실에 전시해놓은 유품과 추모 물건들(위 사진)을 치우려고 했다. 일부 재학생 부모와 부딪치며 싸우다가, 아빠와 유가족들은 5월9일 기억교실을 안산교육지원청 별관으로 이전하는 방안에 합의했다. 합의라지만 사실상 밀려났다. 어떤 유가족은 ‘흔적이 사라지면 기억에서 멀어집니다’라는 피켓을 들고 끝까지 버티려 했지만 여론은 싸늘했다. 세월호는 사람들에게 이미 추모의 대상이 아니었다. 지긋지긋한 싸움이었다.

아주 오랜만에, 기쁜 일도 생겼다. ‘세월호 변호사’ 박주민 변호사가 4월13일 총선에서 국회의원으로 당선됐다. 선거 유세 기간 아빠는 노란 리본이 달린 카메라를 들고 박 후보 캠프에 가지 않았다. 2학년6반 영석이 아버지는 인형 탈을 쓰고 선거 홍보 노래에 맞춰 춤을 췄다. 김관홍 잠수사는 운전기사를 자청했다. 아무도 노란 옷을 입거나 ‘세월호’를 입에 올리지 않았다. 선거에 도움이 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그만큼 국민이 우리를 보는 시선이 따사롭지 않다는 걸, 아빠와 네 친구 부모님들은 알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최순실씨가 뉴스에 등장했다. 아빠는 남들처럼 많이 놀라지 않았다. 그저 ‘아 이런 큰 뉴스거리가 생겨서 우리 세월호는 더더욱 잊히겠구나’ 했다. 그런데 예상이 빗나갔다. 하나씩 벗겨지는 박 대통령과 이번 정부의 말도 안 되는 국정 농단의 속살 사이사이에 네 죽음의 비밀을 풀어줄 실마리가 숨어 있었다. 잊은 줄 알았던 언론과 시민들이 너를, 네 친구들을, 세월호를 부르기 시작했다. 사람들은 2014년 4월16일을 잊지 않고 있었더구나.

2016년 겨울. 아빠는 춥지 않았다. 거리에 카메라를 들고 나서면 ‘지성이 아빠’를 알아본 많은 촛불 시민들이 눈을 맞추고 웃어줬다. 그간 우리가 이야기하면 정신 나간 사람 취급하던 ‘대통령의 7시간’을 여당 국회의원들까지 언급하기 시작했다. 검찰 조사, 국회 청문회, 특검 조사를 거치며 2014년 4월16일 대통령의 행적과 세월호 관련자 탄압에 관한 사실이 많이 밝혀졌다.

ⓒ시사IN 조남진

12월9일 오후 4시10분, 박 대통령 탄핵소추안이 가결되던 순간 아빠는 국회 앞에 있었다. 환호하는 세월호 유가족들(위 사진)을 416 TV 카메라로 담아내는 게 아빠의 목표였다. 그런데 완수하지 못했다. 잠시 카메라를 껐다. 꽉 막힌 인파를 뚫지 못하고 한쪽에 세워놓은 416 TV 방송차 위에 올라가, 아빠는 한동안 얼굴을 감싸고 울었다.

2017년 1월1일에도 아빠는 전남 진도군 동거차도에 올랐다. 2015년부터 매해 동거차도에 가서 새해를 맞았다. 그곳에서는 오래전부터 세월호 유가족과 실종자 가족들이 텐트를 쳐놓고 인양 업체 상하이샐비지가 세월호 인양 사전작업을 벌이는 모습을 망원경으로 지켜보고 있다. 올해는 떡국 아홉 그릇을 상에 올렸다(아래 사진). 아직도 돌아오지 못한 세월호 미수습자 아홉 명을 위한 차례상이다. 이들을 위해서라도 아빠는 아직 손에서 카메라를 놓을 수 없다.

ⓒ연합뉴스

진도체육관에서 대통령을 본 그날, 아빠는 전화를 해달라는 부탁 이전에 대통령에게 이런 질문을 했다. “대한민국 주인이 누구입니까?” 대통령은 다소 벙벙한 얼굴로 “국민이요”라고 답했지. 이 당연한 문답이 오고 간 이후 아빠는 내내 궁금했다. 나라의 주인인 국민 304명을 천천히 가라앉는 배에서 왜 구해내지 못했는지, 애초 배는 왜 기울었는지, 국민의 생명을 보호할 의무를 지닌 책임자들은 도대체 무엇을 하고 있었는지. 이 당연한 질문에 대통령과 우리 사회는 답을 하지 못한 채 1000일이 흘러갔다.

이 물음들은 1000일 이후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네가 왜 죽었는지 알아야 다시는 너와 같은 죽음이 반복되지 않을 것 아니냐. 그런다고… 지성아, 고운 내 딸아, 네가 살아 돌아오는 건 아니지만.

기자명 변진경 기자 다른기사 보기 alm242@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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