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0년대, 미국은 자신의 성립 기반을 전반적으로 재검토해야 하는 위기의 시대를 맞았다. 민권운동과 베트남 전쟁은 안과 밖에서 미국의 전통적 가치와 국민적 단합에 균열을 일으켰고, 젊은이와 학생들은 미국의 주류적 사고방식과 상반되는 정치적 견해와 대안적 생활양식을 시험했다. 이 시대의 미국 역사와 문화를 이야기할 때 반드시 거론되는 것 가운데 하나가 히피다. 그러나 정색하고 찾아보면 이 분야의 책은 쉽게 찾기 힘들다. 크리스티앙 생장 폴랭의 〈히피와 반문화- 60년대, 잃어버린 유토피아의 추억〉(문학과지성사, 2015)이 나와 있는 것은 반색할 일이다.

지은이는 미국의 1960년대 반문화 운동을 “바깥과 행동을 지향하는 정치적인 쪽”과 “내면과 감각을 지향하는 히피적인 쪽”으로 나눈다. 신좌파 또는 반체제론자라는 이름의 전자는 사회적 불평등이나 베트남 전쟁 반대와 같은 정치적 투쟁에 몰두하면서 모든 형태의 권위에 맞서 궐기하는 시위를 행동 수단으로 삼았다. 반면 그 후에 나타난 히피 역시 미국 사회에 반항하기는 하지만, 그들의 비판은 정치적 문제보다는 주로 중산층의 생활양식을 겨냥한다. 이 수상쩍은 젊은이들은 자신이 창조한 대안적 스타일 속에서 유토피아를 건설하고자 한다.

미국의 1960년대가 반문화로 폭발하게 된 원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직후부터 치솟은 출산 붐이 자주 거론된다. 1946년부터 늘어난 미국의 출산율은 1964년에 이르러 스무 살 미만의 인구가 40%를 차지하게 되는데, 새로운 세대는 대중 소비사회의 자아도취적이고 물질적인 분위기 속에서 마음껏 해방감을 누리는 동시에 그것으로부터 억압을 느꼈다. 자본주의는 온갖 쾌락을 제공하려는 것처럼 유혹하며, 그것을 미끼로 청년과 노동자를 길들였다. 허버트 마르쿠제는 이 모순을 파고들면서 반체제 좌파와 히피 양쪽의 숭앙을 받는 반문화의 지도적 사상가가 되었다.

ⓒ이지영 그림

마르쿠제는 〈에로스와 문명〉(나남출판, 2004) 〈일차원적 인간〉(한마음사, 2009) 같은 책을 통해 문명(문화)은 인간의 본능을 억압함으로써 생겨난 것이며, 문명이 발전하는 것은 개인에 대한 자본주의의 억압과 교화가 점점 더 심해지는 것을 뜻한다고 말한다. 빌헬름 라이히로부터 영감을 얻은 마르쿠제는 ‘본능의 억압=문명’이라는 프로이트의 공식을 ‘본능의 해방=문명’이라는 혁명의 공식으로 바꾸고자 했다.

지난 회에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성의 변증법〉(꾸리에, 2016)에 대해 쓰면서, 페미니즘 분야의 고전인 이 책을 다른 독법으로 읽을 수 있다는 사족을 달았다(〈시사IN〉 제458호 ‘페미니즘의 고전을 다시 읽다’ 참조). 많은 여성주의자들에게 〈성의 변증법〉은 ‘계급 모순’ 위에 ‘성 모순’이 있다는 것을 강변한 책으로 읽힌다. 하지만 파이어스톤의 핵심은 277쪽에 압축되어 있다. 파이어스톤은 여기서 소망 충족의 우회로인 승화 과정, 즉 “문화라는 대리물”은 더 이상 필요 없으며, “자아에 의해서 ‘원본능’의 만족이 통제되고 지연”되어야 할 필요도 없는, ‘본능의 직접 만족’이 가능한 세계를 꿈꾼다. 이런 전망은 여성해방 이론의 전통보다 반문화에서 분출한 것이다.

히피와 좌파 반체제는 서로 경원했다. 이들은 서로를 멍청이 집단으로 보았다. 히피는 아메리칸 인디언을 짝사랑했지만 인디언 공동체는 그들의 구역에서 공공연히 애정행각을 벌이는 히피에 질겁했다. 인디언 공동체의 몰이해에 부딪힌 히피들은 인디언식 이름을 짓거나 인디언 의상과 장신구를 걸치는 데 만족해야 했다. 히피 시대에 나온 어떠한 문학작품이나 영화에도 ‘흑인 히피’가 나오지 않는 것처럼, 흑인과 히피는 물과 기름이었다. 가난한 흑인들에게 ‘자발적 가난’을 선택했다고 뻐겨대는 히피는 꼴사나운 존재였다. 흑인과 히피에게 투쟁이라는 말의 뜻은 달랐다. 히피 남자와 여자가 가끔씩 서로의 청바지를 바꾸어 입는 일도 있긴 했겠지만, 히피 여자의 공식 의상은 여성적이라고 수식되는 치렁치렁한 치마였다. 히피 집단의 여성은 해방은커녕 자기 어머니 세대보다 더 수동적이고 남자들에게 순종적인, 보살피는 모성의 역할을 떠맡았다.

히피는 자연친화적이며 반과학적이다?

〈히피와 반문화〉는 미국의 히피 운동에 대해 부정적이다. 이 책을 옮긴 성기완은 그 이유를 프랑스 저자의 시기심에서 찾는다. 1967년 히피 운동의 절정인 ‘사랑의 여름’이 있고 난 한 해 뒤에, 프랑스에서는 ‘68혁명’이 있었다. 프랑스 지식인이 보기에 히피 운동은 수미일관한 이론이 없는 잡동사니다. 마지막으로 이 책의 지은이가 놓친 히피이즘과 과학기술 숭배에 대해 언급해야겠다. 그러기 전에 먼저 리처드 브라우티건이 쓴 시 ‘어여쁘고 고귀한 기계들이 멀찍이서 지켜봐주는’을 읽어보자.

〈히피와 반문화〉크리스티앙 생장 폴랭 지음성기완 옮김문학과지성사 펴냄

“나는 생각한다/ (빠를수록 좋다!)/ 사이버네틱 초원을./ 동물들과 컴퓨터들이/ 서로 도우며 함께 살고/ 조화롭게 프로그래밍하는 곳/ 마치 맑은 물이/ 파란 하늘을 어루만지듯// 나는 생각한다/ (부디 지금 당장!)/ 사이버네틱 숲을./ 소나무와 전자제품들이 빽빽하고/ 사슴이 평화롭게/ 컴퓨터 사이를 거니는 곳/ 마치 회오리 모양 꽃봉우리를 지닌/ 꽃들처럼// 나는 생각한다/ (그래야 한다!)/ 사이버네틱 생태계를./ 우리가 노동에서 해방되어/ 다시 자연으로 돌아가/ 우리의 포유류/ 형제자매들과 함께할 수 있는 곳/ 어여쁘고 고귀한 기계들이/ 멀찍이서 지켜봐주는 곳.”

리처드 브라우티건은 1967년 샌프란시스코에서 열린 히피들의 축제에서 이 시를 읽었는데, 그는 같은 해에 발표된 소설 〈미국의 송어낚시〉(비채, 2013)로 히피의 성자(聖者)가 되었다. 흔히 히피라면 자연친화적이면서 과학기술과 절연한 이들로 알고 있지만 이런 이분법은 히피이즘의 실체와 다르다. 영문학자 김성곤은 리오 마크스의 아직 번역되지 않은 〈The Machine in the Garden〉을 소개하면서, 인간은 기계를 버리고 목가적 정원에서 살 수만은 없다고 말한다. 정원조차도 잔디 깎는 기계가 필요하므로 기계와 정원은 조화와 합일이 중요하다. 리오 마크스는 기계를 배척하고 전원에서만 살겠다는 태도를 ‘감상적 목가주의’, 기계와 정원의 공존과 조화를 추구하는 태도를 ‘복합적 목가주의’라고 부른다. 히피들의 또 다른 경전인 〈갈매기의 꿈〉(현문미디어, 2015)을 쓴 리처드 바크와 〈선과 모터사이클 관리술〉(문학과지성사, 2010)을 쓴 로버트 메이너드 피어시그는 이런 지혜를 잘 알고 있었다. 컴퓨터가 군사용으로 개발된 사실은 비밀도 아니지만, 이케다 준이치의 〈왜 모두 미국에서 탄생했을까〉(메디치, 2013)는 컴퓨터 개발에 히피가 맡았던 저항 문화의 역할을 자세히 밝혔다. 이 책의 부제 ‘히피의 창조력에서 실리콘밸리까지’가 놀랍다고 느꼈다면 바로 읽어보시라.

기자명 장정일 (소설가)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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