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니들이 알려준 욕망과 실수의 내 인생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혼자서 더 나은 사람이 되려고 노력하며 살아왔다. 학원 가고, 과외 선생님이 매주 오고, 유학을 가는 게 무슨 의미인지 솔직히 잘 몰랐다. 혼자서 뭔가 할 수 있게 된다는 건 돈을 아끼는 것이라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피아노곡을 배우고 싶으면 악보를 뽑아 교회 피아노로 연습했다. 예배를 마치고 다들 밥 먹고 있을 때 조지 윈스턴이니 히사이시 조의 악보를 인터넷 어딘가에서 구해다 주보용 프린터로 뽑아서 쳤다. 아무도 내가 뭘 치는지, 지난주보다 얼마나 잘하게 되었는지 관심이 없었다.커서 보니 ‘남들’이 어릴 때 흔하게 했다는 수영·태 “인간이 왜 그렇게 돈 버는 데 시간을 써요?”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10대 후반부터 ‘알바’를 시작해 노동하게 된 지 14년째다. 일하는 게 좋아서 한 적은 없다. 쉬는 날이면 집에 누워만 있었다. 이제는 돈 받지 않아도 하는 일, 재밌는 일, 의미 있는 일이 우리를 살린다고 생각한다. 그런 걸 원활히 하며 살기 위한 방편으로서 기본소득을 원한다.페미니스트 경제지리학자 캐서린 깁슨은 2017년 한국에서 열린 한 포럼에서 ‘지불노동(돈 받는 노동)’을 하지 않고 장애연금을 받아 생활하며 마을에서 기꺼이 학생 돌봄, 학교 시설관리, 정신장애인의 자조 네트워크 운영 등을 담당하는 사람의 사례를 공유했다. ‘사회가 정해준’ 관계에서 우리는…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영화 〈이장〉에는 낡아버린 가부장이 등장한다. 영화의 중심인물인 5남매의 큰아버지는 외딴섬에서 한평생을 살았다. 이 노년 남성은 재개발 부지에 들어가버린 아버지의 묘를 이장하러 어렵게 시간을 내서 모인 네 자매에게 ‘오느라 고생했다’는 인사치레 한마디도 하지 않는다. 머리를 짧게 자르고 ‘머슴아’처럼 입은 넷째 조카 혜연을 유일한 아들인 막내 조카와 헷갈려 하는 와중에 첫마디로 “장남도 없이 어떻게 무덤을 파냐!”라고 대뜸 소리를 지른다. 자신의 의견이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싶으면 더 설명하는 대신 마당의 항아리를 들어서 깨버린다 ‘n번방’의 26만명 신상 공개하라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성폭력은 구조의 문제”라는 말을 이해하는 동안 나는 내 세계관과 사고방식을 몇 번이나 깨야 했다. 그중 하나는 공동체 내 성폭력 사건 해결에 대한 것이었다. 어떤 모순을 이해할 수 없었다. 예를 들면 “피해자가 거부하면 사건을 다루지 말아야 한다”는 식의 주장과 “성폭력은 가해자와 피해자 둘만의 문제가 아니다”라는 일반론은 서로 충돌하는 것 같았다. 만약 성폭력이 정말 모두의 문제라면 모두가 사건을 논하고 해결해나갈 수 있어야 했다. 만약 사건을 말하고 결정하는 게 피해 당사자의 유일한 권한이라면 성폭력은 개인의 것이어야 했다.거 뒤늦게 입학한 여대에서의 경험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고교 시절 여대는 기피 대상이었다. 교사들 역시 남녀공학을 가라고 권장했다. ‘연애는 대학 가서 하라’는 말을 귀에 못이 박히도록 들어온 10대들에게 이성 연애가 발생할 확률이 낮은 공간은 마치 고등학교의 연장처럼 느껴졌다. 여대에서는 술을 들이붓고 잔디밭에 토하는 대신 과일주스를 마시며 학교 행사를 진행하고, 우르르 몰려다니는 일도 드물다고 했다. 그런 곳에서 학교를 다니면 ‘일반적’ 기업의 ‘사회생활’에 적응하기 어렵다는 얘기도 떠돌았다.2014년 뒤늦게 여대에 들어갔다. 사회에는 여대를 깎아내리는 통념도 있었으나, 여대에 대한 내 몸을 돌보는 삶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피부과는 피부관리 상품을, 산부인과는 질 성형 상품을, 치과는 교정과 미백 상품을 팔아 돈을 버는 사회에서 내 몸 곳곳에 염증이 난다고 특별히 관심을 가져주는 의사와 병원은 없었다. 한두 번의 병원 방문으로 다 해결할 수 없는 궁금증과 병원에 또 가기는 싫은 자잘한 증상이 남을 때면 검색 엔진을 돌렸다. 아플 때 신뢰 속에 적정 의료를 권하는 의사와 의료기관이 없는 환경에서 지내는 건 아픈 몸을 관찰하고 느낄 수 있는 감각을 잃어간다는 의미이기도 하다.올해는 몸을 쓰고 돌보는 경험을 열심히 하는 중이다. 살림 의료복지사회적협동조합에 페미니스트로 잘 사는 법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페미니즘은 우연히 ‘나만의 것’인 줄 알았던 괴로움이 구조 속에서 유사한 위치에 있는 ‘모든 개인들의 것’이었다는 진실을 마주하게 한다. 고백의 모양새는 조금씩 다르지만 마치 한 사람에게서 나온 듯 넓은 원 안에서 포개지곤 한다. 이 양상이 구조의 생김새를 폭로한다.더 잘하려, 예민하지 않으려, 견디려 애쓰던 사람들은 ‘개안’했다고 느낀다. “다 구조의 문제야. 그러니 네 잘못이 아냐”라는 메시지를 곧 페미니즘 그 자체로 받아들이게 된다. “내 잘못이 아닌” 상태로 가만히 있으면, 삶은 나아질까? 내 고민은 여기서 다시 출발했다.책 가을은 이별을 준비하는 시간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해마다 가을이 되면 기분이 싱숭생숭해지곤 한다. 가을은 내게 이동과 변화의 계절이다. 서울에서 작은 이사를 일곱 번쯤, 큰 이사는 두 번을 했다. 택배로 큰 짐을 부치고 온갖 가방과 쇼핑백에 남은 짐을 담아 어깨에 둘러메고 대중교통으로 짐을 나른 것은 작은 이사고, 승합차며 트럭을 동원해야 했던 것은 큰 이사다. 큰 이사 때마다 계절이 가을이었다.10년 전 서울에 올라왔다. 한 달, 3개월 혹은 6개월, 길면 1년짜리 계약으로 기숙사와 고시원과 친구 집을 전전하다 7년 전 처음으로 내 명의로 원룸을 얻었다. 원룸은 임대주택이었고, 미봉책 되어가는 성폭력 예방교육 홍혜은 (저술가·기획자) 성폭력의 가장 근본적 대책을 생각하다 보면 교육에 이르게 된다. 사건이 발생하기 전에 예방하는 게 낫다는 얘기다. 그래서 기관별로 한 해에 한 번씩은 시행하게 되어 있는 교육의 이름은 ‘성희롱 성폭력 예방교육’이다. 미투 운동 이후 각 분야의 피해자 연대는 해당 분야에 성폭력 예방교육을 철저히 실시할 것을 요구 조건으로 내걸기도 했다.그러나 지금 나는 미심쩍다. 성폭력이 ‘성’의 문제라기보다는 ‘폭력’의 문제라고 할 때, 어떤 것이든 피해와 가해를 둘러싼 권력 구도 전반을, 우리가 발 딛고 살아가는 문화 전반을 제대로 뜯어보지 않는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