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6년 10월1일 최덕근 블라디보스토크 영사가 아파트를 나섰다. 출근길 계단에서 괴한들에게 머리를 여덟 차례 가격당했다. 시신에서는 ‘네오스티그민 브로마이드’라는 독극물이 검출됐다. 최 영사는 당시 안기부 소속 화이트(외교관 신분으로 활동하는 정보요원)였다. 그의 양복 안쪽 호주머니에서 북한의 마약 밀매와 위폐공장 첩보 등이 빼곡하게 적힌 메모지가 나왔다. 당시 안기부 동료들은 ‘안기부장’으로 장례를 치르자는 의견을 냈다. 정보요원은 죽어서도 신분을 밝힐 수 없는 숙명, 가족장으로 치러졌다. 고인의 마지막 가는 길, 동료와 가족들은 안기부 청사 안에서 노제라도 치르기를 바랐다. 그마저 불허되었다. 장례 차량은 내곡동 청사 입구에 잠시 멈췄을 뿐이다.

2015년 국정원 해킹팀 RCS 의혹과 관련해 임 아무개 직원이 자살했다. 자살 배경도 석연치 않았지만 그 뒤 일어난 일은 더 이상했다. 이병호 당시 국정원장이 공개 조문을 했다. 이 원장이 조문한 뒤 국정원 직원들은 기수별로 조의금을 모았다. 장례 차량은 국정원 청사 안으로 들어가 노제를 지냈다. 국정원의 ‘정통 정보맨’들 사이에 볼멘소리가 나왔다. “원장이 죽음을 이용하고 있다” “다음에도 이런 일이 일어나면 자살하라는 메시지냐?” 

최근 몇 년 사이 유독 국정원과 관련된 죽음의 행렬이 이어지고 있다. 최 영사 사례처럼 정보전의 최전선이 아닌,  ‘후방’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는 일이 빈번하다. 2014년 간첩 조작이 발각되자 번개탄을 피워 자살을 기도한 권 아무개 직원(그는 목숨을 구했다), 2015년 임 아무개 직원, 그리고 최근 자살한 국정원 직원 정 아무개 변호사 등이다. 국정원에 파견 나간 변창훈 검사도 스스로 몸을 던졌다.

특히 변 검사의 죽음을 둘러싸고 정치권과 검찰 안에서 말이 적지 않다. 나는 그의 죽음과 관련한 논란을 접하고 세 가지 의문이 들었다. 왜 이렇게 한 기관에서 죽음의 행렬이 이어지는가? 조직 문화인가? 첫째 의문에는 솔직히 답을 못 찾겠다. 둘째, 변 검사의 원 소속 기관인 검찰에서 지난 10년간 조사를 받던 피의자 100여 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그때 검찰 내부 인트라넷에 지금처럼 추모나 자성의 목소리가 있었나? 내가 과문한 탓인지 모르겠지만 전혀 없었다. 셋째, 위에서 시켜서 한 실무자일 뿐인데 처벌해야 하느냐는 목소리도 검찰 안에서 나오나 보다. 나는 정반대로 생각한다. 실무자라서 봐준다면 권력기관의 적폐는 반복된다. 권력기관에 몸담고 있는 이들은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아야 한다. 조직에 충성하는 게 맞다. 조건이 있다. 헌법 질서 안에서 충성해야 한다. 법을 어기면서까지 조직에 충성하는 이들은 조폭과 다름없다. 누구나 죽음 앞에선 평등하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빈다.

기자명 고제규 편집국장 다른기사 보기 unjusa@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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