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0년대 대학가 패션의 대세는 게스 청바지와 나이키 운동화였다. 국내 브랜드로 뱅뱅 청바지와 프로스펙스 운동화가 있었지만 아무래도 게스와 나이키의 조합이 갑이었다. 좀 더 있어 보이려면 영문판 시사 주간지 〈타임〉을 반으로 접어 바지 뒷주머니에 꽂는 허세쯤은 부려줘야 했다. 지금 눈으로 보면 유치하기 짝이 없지만 수출만이 살길이라며 국산품 애용을 부르짖던 박정희 시대에는 생각지도 못한 거리 풍경이었다. 세계경제 호황 덕분에 한국 경제가 살아나고 수입자유화 정책으로 국내 소비 패턴에 큰 변화가 일어나던 무렵의 일이다. 당시 대학 내에는 영어 공부를 할 겸 국제적 안목도 넓힌다는 이유로 〈타임〉이나 〈뉴스위크〉를 읽는 스터디그룹이 꽤 많았다. 청바지 뒷주머니에 보란 듯이 타임을 찔러넣는 유행은 그렇게 생겨났다.

까마득한 시절의 이야기를, 그것도 별 대수롭지 않은 이야기를 장황하게 늘어놓은 이유가 있다. 28년 전인 1989년 10월29일, ‘한국의 〈타임〉’을 표방하며 원(原) 〈시사저널〉이 창간되었을 때 어느 독자가 보내온 논평이 생각나서다. “이제 우리도 당당하게 주간지를 들고 다닐 수 있게 됐다.” 나는 〈시사저널〉에 대한 이 이상의 칭찬을 떠올릴 수 없다. 선망의 눈으로 올려다보았던 그런 매체를 우리가 갖게 된 것이다. 창간한 지 1년도 지나지 않아 정기구독자 수가 10만명을 넘을 수 있었던 것은 새로운 언론에 대한 갈망이 그만큼 컸다는 사실을 말해준다. 원 〈시사저널〉이 성공하자 흥미 위주의 기사를 내보내던 기존의 주간지들이 변신을 꾀했으며 〈한겨레21〉을 비롯한 신생 매체 창간이 잇따랐다. 1990년대를 감히 시사 주간지 시대라고 부를 만한데, 그 시절을 함께 보낸 원 〈시사저널〉 기자들에게는 그것이 더없는 영광이다.

 

지난 7월 말 〈시사IN〉의 고제규 편집국장이 난데없이 전화를 걸어와서는 “〈시사IN〉 창간 10주년을 기념해 원 〈시사저널〉 선배들이 지면을 꾸며줬으면 한다”라고 부탁했다. 일단 거절했으나 매정하게 끊기가 어려워 “오랜만에 얼굴이나 보면서 얘기하자”라고 말한 것이 큰 실수였다. 연락이 닿는 몇이 편집국을 찾아가 편집회의 비슷한 것을 하게 됐는데, 일이 이상한 쪽으로 흘러가더니 결국 진행 책임을 떠맡게 됐다. 사실을 말하자면, 나는 그 책임을 다하지 못했다. 8월과 9월, 단체 카톡방을 통해 문자를 주고받고 기획안을 써서 이메일로 발송하고 네 차례 모임을 가졌지만 좀처럼 진척이 없었다. 막판에는 판이 깨질 위기도 있었다. 그런 곡절을 겪으며 간신히 창간 10주년 기념 특별호를 독자 앞에 내놓게 됐다.

잠시나마 이 기획을 진행하면서 새삼스럽게 알게 된 사실 하나는 모두가 취지에는 찬동하면서도 정작 글을 쓰는 데 대한 두려움 같은 것이 있더라는 점이다. 〈시사IN〉 독자들에게 현장을 떠난 지 오래인 내가 무슨 말을 들려줄 수 있을까, 하는 부담감이 컸다. 그럼에도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것은 〈시사IN〉에 대한 부채의식, 그러니까 10년 전에 후배들이 〈시사저널〉에서 파업을 하고 〈시사IN〉을 창간하기까지 어려운 시기에 큰 도움을 주지 못했다는 자책감이 등을 밀었기 때문이다. 달리 말하면, 선후배 간의 끈끈한 연대의식이 이번 특별 지면을 가능케 해준 것이다.

부족한 지면이다. 만회할 기회가 주어진다면 더 많은 ‘올드 보이’들이 참여해 더 값진 지면을 꾸며보겠다는 변명을 붙인다. 

 

 

김상익
1989년 10월 원(原) 〈시사저널〉에 입사해 편집부·경제부·특집부·사회부 등 여러 부서에서 일했다. 〈시사저널〉이 부도난 후 독립신문사에 인수된 때 2년간 편집장 노릇을 했다. 2002년 월드컵 대회를 신나게 관전한 뒤 휴직계를 내고 시애틀에서 2년간 열심히 놀았다. 복직을 준비하던 중 “금창태가 ‘사장직을 걸고 김상익이 돌아올 자리는 없애겠다’고 말했다”라는 말을 전해 들었다. 귀국 후 몇 달 싸우다 사표를 내고 그만뒀다. 지금은 더 열심히 노는 방법을 익히기 위해 일렉 기타 강습을 받고 있다.
 

 

 

 

 

기자명 김상익 편집국장 다른기사 보기 editor@sisain.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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